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참나이다 <청담, 서암, 진제>
지렁이는 왜 사람처럼 사고를 못할까? 한국(참나)불교에 의하면 ‘모든 생물에게는 참나(眞我 true atman)가 있고 생각은 참나가 한다’는데, 왜 지렁이는 사람처럼 사고를 못할까? (지렁이의) 참나가 지렁이 몸(뇌)에 갇혀서 그런가?
그런데 어떻게 참나가 물질적 몸에 갇히나? 업(業)이 전혀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참나가 어떻게 물질적 몸에 개처럼 끌려들어가 윤회를 하나? (진제 종정 등 한국 선사들은 '참나가 이 몸을 나와 저 몸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이사 가듯 몸을 옮겨 다닌다는 것이다.) 그 위대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나에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백 번 양보해서 참나가 몸(뇌)에 갇힐 수 있다 해보자. 그럼 몸을 벗은 후에는, 즉 죽은 후에는, 지렁이도 (중음신 상태에서는, 즉 귀신 상태에서는) 사람처럼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지렁이는 죽은 후에 (중음신 상태에서, 즉 귀신 상태에서) 갑자기 인간처럼 사유를 하나? 안 배운 삼법인(三法印)·연기법(緣起法)·사성제(四聖諦)도 저절로 아나?
참나가 모든 걸 알고 깨달아 있다면, 그런 참나가 몸으로 들어가고 무지(無知)한 상태가 될 리는 만무하다. 어떻게 참나가 아는 걸 잊어버릴 수가 있나? 지식을 잃어버릴 수 있나? 그런 참나라면 (우리가 간난신고 끝에 참나를) 찾은들 멍청해지거나 다시 잃어버릴 수 있겠다.
따라서 사유하는 것은 참나가 아니다. 연기법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참나가 아니다. 사유의 결과로 연기법을 발견한 것은 참나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참나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걸 사유를 통해 다시 알게 된다'는 헛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보리수 밑에서 사유를 한 것은 누구인가? 부처의 참나인가? 만약 참나라면 왜 연기법을 발견하는 데 6년이나 걸렸는가? 참나는 6신통 등 무한한 능력을 지녔다는데, 그깟 사유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어 6년이나 걸렸나? 이런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참나를 상정해서 그렇다. 이런 모순을 피하려면, 그냥 참나(라는 망상)만 없애면 된다.
그리고 불도(佛道)란 (토각공화[兎角空花], 즉 토끼뿔이나 허공에 핀 허깨비 꽃에 지나지 않는) 참나를 찾는 게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를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포기하고 보리수 아래서 7일 동안 사유해 연기법을 깨달았듯이, 우리도 열심히 사유해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다. 물을 다른 사람이 대신 먹어줄 수 없듯이, 연기법도 다른 사람이 대신 깨달아 줄 수 없다. 그래서 사유를 해야 하는 것이다. 미리 모든 걸 다 깨닫고 있는 참나는 없다.
그러므로, 상주불변(常住不變)하고 상락아정(常樂我淨)한 일체종지(一切種知)의, '참나를 찾자'는 소리는 헛소리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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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는 참다운 아트만(true atman)이라는 뜻인데
힌두교 사상이다.
부처님은 이 아트만 사상에 반대하셨다.
그런데 무식한 한국 중들이 참다운 아트만인 참나를 들고나와서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우긴 지 오래이다.
이들은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인지한다고 주장한다.
하도 무식해서 그게 힌두교 아트만 사상인지도 모른다.
무식한 신도들은 한국의 큰스님들이 부처님을 욕보이는지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참나를 믿어야 한다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