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날 때 마시고, 차가 차를 부르고”
“마음 날 때 마시고, 차가 차를 부르고”
  • 한유미/한국차심평원장
  • 승인 2017.11.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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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생 한유미의 차와 놀자] (12) 차 마시기 좋은 때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치 소풍처럼 차가 생산되는 계절을 기다린다. 차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씨와 마음의 동요에 민감하다. 차 마시기 좋은 날이지, 차 마시기 좋은 기분이야 등등. 필자처럼 차의 맛을 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그날의 몸 상태에 따라 심평하기 좋은 날에 특히 예민해진다. 가끔, 유난히 콧구멍에 물안개가 내려앉은 것 같은 수분이 촉촉함으로 가득 찬 날들이 있곤 한다.

차에 관계된 일을 하거나, 깊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차 마시는 일이 삶의 비중을 많이 차지한다. 경제적 능력 없이 과도하게 차를 좋아하면 일하는 시간은 짧고 소비가 많아 차병이 주는 번뇌가 부작용으로 따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차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언제일까.

차에 대한 병이 깊고 술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당대 《다경》의 저자 중국인 육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버금갈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이 대표적이다. 차에 대한 애정으로 따지자면 중독을 넘어선 수준으로 두 사람 다 한 치의 양보가 없을 사람들이다.

“아침이 밝아올 때,
뜬 구름이 맑은 하늘에 피었을 때,
낮잠에서 막 깨었을 때,
밝은 달이 맑은 산골 개울물에 떨어져 비칠 때
차 마시기 좋을 때”
                                    다산 정약용 《걸명소》

추사와 정약용은 초의스님으로부터 차를 공급받았다. 초의스님은 정약용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다인(茶人)의 길에 접어들었다. 공급과 수요에 차 싸움을 벌였다고 해야 할 정도로 초의는 두 사람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물론 영예로운 시달림이어서 초의의 명성이 그들의 주변인들로까지 퍼져 ‘차박사’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지만 말이다.

육우도 생전에 차박사로 불렸지만, 초의와는 다르게 굴욕적인 상황에서 붙은 칭호였다. 육우 이후 시대의 글 《봉씨문견기》에 전다박사(煎茶博士)라는 말이 나온다. 차를 잘 끓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청대 《속다경》에는 차박사(茶博士)라는 말이 나온다. 역시 숙련된 솜씨로 차를 잘 끓이는 전문가라는 뜻이다. 아마 차박사라는 초의의 별명도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특히 정약용은 귀양생활을 하면서 화병으로 인해 늘 체기에 시달려 차 없이는 한시도 견디지 못했다. 공급받는 정도로는 양에 차지 않아 결국 나중에는 자신이 차를 생산했다. 초의에게 차를 받을 때마다 늘 모자란다고 애원했던 정약용은, 자신의 차를 가까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차는 절대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며 조금씩 약으로만 쓰라고 신신당부하여 웃음을 부른다. 차를 대체 얼마나 마시기에 ‘받아도 받아도 모자란다’고 초의를 볶아댔을까.

초의의 다시(茶詩) 《동다송》에 “다산 선생은 《걸명소》에서 차 마시기 좋은 때를 ‘아침이 밝아올 때, 뜬 구름이 맑은 하늘에 피었을 때, 낮잠에서 막 깨었을 때, 밝은 달이 맑은 산골 개울물에 떨어져 비칠 때’”라고 했다.

이 내용으로만 본다면 정약용의 머릿속은 온통 차생각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독도 이런 중독이 없다. 사실, 차병이라는 것이 있다. 차에 대한 병이 깊어지면 누구라도 정약용 못지않다. 경제력이 약한 사람이 차병에 걸리면 괴로움도 그런 괴로움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는 절대 과하게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충고를 던지고 다닌다. 대체 차의 무슨 힘이 그런 것까지 정약용을 빼다 박게 하는 것일까.

정말이지 차는 하루 종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 혼자 마셔도 그렇고 둘이 마셔도 그렇고 시끌벅적 여럿이 마셔도 그렇다. 정신노동을 할 때는 정신의 명료함을 위해 마시고, 육체노동에 찌들 때는 육신의 피로를 잊는다고 마신다. 우울하면 울화를 달랜다고 마시고, 기쁘면 이 기쁨을 어찌 그냥 넘기겠냐고 수선을 떤다. 수선을 떨면서 그 정신없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온갖 구실을 붙여댄다. 그렇게 마시다 보면 차가 더 좋아지고, 좋다보니 더 빠져들어 나중에는 내가 차를 마시는지 차에 먹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일러 ‘차가 차를 부른다’고 한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자신의 찻잔과 다구만은 덥석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자신의 찻자리도 남에게 잘 내어주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차는 매력을 넘어선 마력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 마력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사람이 때로는 백치미의 환영에 젖어들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단언컨대, 원시적 인간미(진정한 휴식라고 할 수 있는 백치미)를 부르는 음료는 아마 차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차는 자랑이 된다.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놓아버리게 만드는 힘’, 그 앞에서는 의지의 자발성이 구실을 하지 못한다. 통제되지도 않지만 애써 견주고 싶은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지간한 감정들도 차 앞에선 시시할 때가 많다. 차 앞에선 호기나 객기도 잘 통하지 않는다. 차의 정(情: 차의 영향으로 느끼는 좋은 감정)은 그저 마시라 한다.

정약용은 마흔 살에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살이는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지만 사회와의 격리로 시간이 많다. 그 많은 시간동안 책을 읽는 일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있었겠는가? 많은 저서를 남기게 된 것도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역사의 좋은 유산이 한 사람의 불행을 먹고 태어나는 일은 인간의 역사에 부지기수다. 그렇게 길고 넓게 본다면 인간의 불행도 복불복일 터이다. 이 말을 듣는다면 정약용은 뭐라고 할는지.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일이 없을 때,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시를 읊을 때,
글씨를 쓸 때,
이리저리 노닐 때,
잠에서 깨었을 때,
잠자기 전 술에 취했을 때,
맑고 깨끗하게 갖추었을 때,
정신을 수양하는 곳에서,
|마음이 좋을 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풍가빈의 《속다경》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던 사람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한적한 곳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의 우울함과, 느슨한 집필의 노동이라는 것의 바탕에는 지루함이 깔려 있다. 지루함을 좀 가볍게 표현한다면 단순함이 주는 심심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료하고 답답한 정약용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건 차의 진가 때문이다. 진가란 ‘심심함을 달래는 데 차보다 좋은 특효약은 없다’는 것이다.

차의 역사에서 해남, 강진의 차 바람은 정약용에 의해 불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정약용의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자연의 영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도시에 사는 지금 우리들의 차 마시기 좋은 때는 감정적 동요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곤 한다. 이웃나라 차인들의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언제였을까.

명말에 벼슬을 하다가 청대에 은거한 풍가빈의 차 마시기 좋은 때가 《속다경》에 기록되어 있다.

풍가빈의 〈개다전(山介 茶箋)〉에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일이 없을 때,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시를 읊을 때, 글씨를 쓸 때, 이리저리 노닐 때, 잠에서 깨었을 때, 잠자기 전 술에 취했을 때, 맑고 깨끗하게 갖추었을 때, 정신을 수양하는 곳에서, 마음이 좋을 때,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등이다’라고 했다.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내는 것은 중국의 풍습이었다. 이때를 예외로 하고,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심심할 때마다 입이 궁금해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이 날 때마다 마시는 음료가 차라는 사실은 국경을 넘어서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의 차 마시기 좋은 때는 언제인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찻그릇을 슬 앞으로 당겨본다.

 

차선생 한유미(韓有美)는
중국 항주다엽연구소(杭州茶葉硏究所) 심배화 선생에게 차심평(Tea Tasting)을 배웠다. 2003년부터 심평과 가공, 차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주해서 《육우다경》과 《동다송·다신전》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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