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비우고 지우는 삶의 가르침
끝없이 비우고 지우는 삶의 가르침
  • 오마이뉴스 김병하
  • 승인 2017.10.2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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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교실을 끝내고

'지식과세상 사회적협동조합'(대구)에서 9월 첫 주부터 <금강경>교실을 열어 10월 마지막 주에 마쳤다. 함께 공부할 교재는 백성욱의 <금강경강화>(2012)로 택했다.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줄임말이다. 즉, 저편 언덕에 이르게 하는(波羅密=到彼岸) 금강석 같은 지혜(般若=知慧)를 담은 경(經)이라는 게다.

도올 김용옥은 "<금강경>은 논리의 전개가 아니라, 이것은 깨달음의 찬가요, 해탈의 노래"라 했다. 그는 <금강경>을 <벼락경>이랬다. 즉, 청천벽력처럼 내리치는 지혜를 담은 경이라는 의미다. 근데 "그 벼락은 내 존재를 둘러싼 대상 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금강의 벽력은 곧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야 한다"는 게다. 그래야 '나'가 무화(無化)되고 공화(空化)된다. <금강경>은 나를 끊임없이 비우고 지우는 걸 가르치는 경이다.

<금강경>은 "오직 네 한 마음이 밝아져야 한다"는 요지의 '육백부반야'(六百部般若) 중에 핵심이 되는 경이다. 대반야경 600권을 5000자로 축약한 게 <금강경>이고, 이를 260자로 압축한 게 <반야심경>이다. 이것을 한구절로 요약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란다. 즉,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을 비추어 보니 모두가 텅 비었다는 게다. 이를 다시 한글자로 압축하면 비출 '조'(照)란다. 자기를 비추어 보고, 되돌아보는 게 곧 깨침의 핵심이다.

 

<금강경>은 AD 150-200년경 대승경전 초기에 편술되었으며,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금강경>을 한역한 것은 402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경>은 산스크리트 원본보다도 구마라집의 한역본이 정본인 것처럼 두루 읽혀져 왔다.

흔히 <금강경>은 '무상'(無相)을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삼아 묘행(妙行)을 그 용(用)으로 삼는다고 한다. 일찍이 혜능(慧能; 638-713) 선사는 <금강경>의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 즉 "응당 머묾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이 한마디에 큰 깨침을 얻었다고 한다.
 

백성욱 선생의 <금강경강화> 책 표지 금강경독송회에서 녹취 정리한 백성욱 선생의 <금강경강화)(2012, 동국대출판부)
▲ 백성욱 선생의 <금강경강화> 책 표지 금강경독송회에서 녹취 정리한 백성욱 선생의 <금강경강화)(2012, 동국대출판부)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금강경>의 전체 32분(分)중에 '즉비'(則非), 곧 아님이라는 부정의 논리에 의한 긍정의 가르침이 29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를테면, <금강경> 8분 말미에 '佛法者(불법자) 卽非佛法(즉비불법)'라고 해서 "불법이라고 하면 곧 불법이 아니라"는 게다. 즉, '불법(佛法)'이라할지라도 그것에 산냐(相)를 세우지 말라는 게다. 그것은 강을 건너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뗏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21분 말미에 '衆生者(중생자) 如來說非衆生(여래설비중생) 是名衆生(시명중생)'이라 해서 "중생이라는 것은 여래가 말한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일 뿐이라"는 게다. 중생이라고 하지만, 중생에게도 여래의 씨앗이 내장(內藏)되어 있으므로, 법문을 듣고 밝은 마음이 생기면 중생이 아니다. 즉, 중생이 부처요, 부처가 중생이다. 이처럼 <금강경>은 '진속이제'(眞俗二諦)의 '불이'(不二)사상으로 대승불교의 종지를 반영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상념'(想念)이라는 말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산냐'(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 '상(相)'의 대표적 네 가지 상(四相)으로 '나다'라는 아상(我相), '너다'라는 인상(人相 ), 뭇 생명체인 '그들'이라는 중생상(衆生相), 그리고 '생명은 유한하다'는 수자상(壽者相)을 들고 있다. <금강경> 3분에서 사상(四相)을 처음 언급하되, "若菩薩(약보살)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卽非菩薩(즉비보살)이니라"고 했다. 즉,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생각이나, 남이라는 생각이나, 중생이라는 생각이나, 생명은 유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는 게다. <금강경> 32분 중 일곱 군데서나(즉, 3, 6, 14, 15, 17, 25, 31분) 네 가지 상이 거듭 언급되고 있다.

<금강경> 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상을 여의어서 번뇌를 떠나 조용하다는 말씀)에서 만약 후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듣고(혹은 읽고) 믿고 아는 마음을 지니면 그 사람은 제일로 희유한 사람이라 했다. 왜냐면 "此人(차인)은 無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무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我相(아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면 人相衆生相壽者相(인상․중생상․수자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니 何以故(하이고)오 離一切諸相(이일체제상)하면 則名諸佛(즉명제불)"이라는 게다. 즉, 이 사람(즉, 금강경을 믿고 아는 사람)은 나다는 상이나, 남이라는 상이나, 중생이라는 상이나, 생명에 대한 상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곧 상이 아니니, 그런고로 일체의 모든 상을 여의면 그 사람은 그냥 부처라는 게다.

이 경을 받아 듣고 신해(信解)하는 사람은 아․인․중생․수자의 사상(四相)을 여의므로 그 사람은 곧 부처다. 네 가지 상(相) 중에 가장 떨치기 어려운 게 아상(我相)이어서, '나'라는 상을 여의면 나머지 인상·중생상·수자상은 따라서 비상(非相)으로 전환된다. 그만큼 나를 비우고 지우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지난한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자기실현'을 말하지만, 그 '자기'가 어떤 '자아'인지가 문제다. <중용>에서는 그 자아를 '하늘이 명한 본래성'(天命之謂性)으로 규정했다. 하여 그 본래성에 따르는 삶이 사람이 가야할 마땅한 길(道)이라 했다.
 

에드워드 콘츠가 영어로 번역한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표지 콘츠는 'Buddhist Wisdom'이라는 제목으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영어로 옮겼다.
▲ 에드워드 콘츠가 영어로 번역한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표지 콘츠는 'Buddhist Wisdom'이라는 제목으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영어로 옮겼다.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그 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길은 닦아야만 길이 된다. 최근 대한불안학회가 삶의 행복수칙 7계명을 제시하고 있다. 즉, (1) 불안을 불안해하지 말자. 불안은 인간에게 필수적 감정이다. (2) 불안과 더불어 살기: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떨쳐내려 애쓰기보다 그냥 친구처럼 데리고 살자. (3) 걱정할 때 걱정하되 나머지 시간에 뭘 하느냐가 중요하다. (4) 어쩔 수 없는 것은 내버려 두자.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5)지금 여기 현재를 살기: 지난 일을 너무 후회하지도, 미래 일을 너무 걱정하지도 말자. (6)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기.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자.

위의 행복수칙은 '나다'는 강고한 아상(我相)을 현실적으로 완전히 떨쳐 내기가 우리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적어도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고 본다. 결국, 나를 비우고 지우는 만큼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우리네 삶의 지독한 패러독스다. 

<금강경>에는 금강(diamond) 같이 단단한 지혜를 깨쳐 지니는 게 '구경각'(究竟覺)으로 더 할 나위 없는 복덕(즉, 福德性)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금강경>에 나오는 단지 네 구절 글귀만이라도 독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 그 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혹은 간지스강의 모레만큼 많은 수의 보물)로 가득 채워 보시(布施)하는 복덕을 능가한다는 걸 여러 군데서(<금강경> 8, 11, 12, 13, 14, 24, 32분 등) 강조한다.

왜냐하면 물질에 의한 복덕은 아무리 쌓아도 그 한계가 있지만, 우리들 마음 안에 미치는 <금강경>에 담긴 사구게(四句偈)의 '복덕성'(福德性)은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물성(物性)이지만 후자는 질성(質性)이기에 함께 비교할 수가 없다. 게다가 <금강경>이 있는 곳은 곧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가장 존중하는 제자가 있는 곳과 같다(<금강경>, 15분)고 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선남선녀가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데도 다른 사람이 업신여길 것 같으면, 그로인해 이(독송하는) 사람의 전생 죄업이 소멸될 수 있다(<금강경> 16분)는 게다. 그만큼 <금강경>의 가르침과 그 공부가 소중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 일터.

<금강경>은 전체적인 문체 자체가 게송(偈頌)할 수 있는 가사체로 되어 있다. 하여 아예 가사체 <금강경>을 찬가처럼 독송용으로 쉽게 편술한 휴대용 책자가 따로 있을 정도다. <금강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전형적인 '사구게'(四句偈)는 5분, 10분, 26분, 32분에서 적시되고 있다.

<금강경> 제5분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이치를 참되게 볼 수 있는 말씀)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凡所有相(범소유상)은 皆示虛妄(개시허망)이라
若見諸相(약견제상)이 非相(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무릇 있는 바의 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형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느니라."

모든 형상 자체가 허망한 것인 줄 알면, 그것에 집착을 갖지 않게 되며, 그리되면 우리가 여래를 제대로 보고 깨칠 수 있다는 게다. 여기 '허망'(虛妄)이라는 말을 콘체(E. Conze)는 fraud로 옮겼는데, 이것은 우리네 인식의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다. 위의 게송에 볼 '見'이 두 번 나오는 데, '안다' 혹은 '깨닫다'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콘체는 여기 '見'을 perceives로 옮겼다.

<금강경> 10분에는 육조 혜능(慧能) 선사에게 깨침을 준 이런 구절이 나온다.

"應無所住(응무소주)하야
而生其心(이생기심)이니라."

"마땅히 머묾이 없이 그 마음을 낼 지니라."

백성욱 선생은 이 구절 때문에 흔히 "불교는 아주 어려운 것이다."는 말을 듣는단다. "글쎄 어디든지 마음을 두지 말고 마음을 내라니 어떻게 하는 거요?"라고 묻는다는 게다. 이를 두고 그는 허청다리 같이 들리는 말이랬다. 이어 선생은 "모든 형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느니라."고 한 것은 자기 자체를 부인하는 소극성을 띤 것이라면, "마음이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은 곧 적극성을 띠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제26분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에서 부처님이 게송으로 이르시되,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커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하면
是人(시인)은 行邪道(행사도)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

이 게송을 두고, 배성욱 선생은 "밝은 광명을 형상으로 보려고 하거나, 형상 자체가 밝은 광명인줄 알면 참 곤란한 일이다"라고 했다. 도올은 좀 더 힘찬 언어로 이 게송을 다음처럼 옮겼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邪道)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이 게송에 비춰 도올은 "어느 성당에 마리아상이 피 흘린다고 쫓아가고, 어느 절간에 부처님상이 땀 흘린다고 달려가는 추태를 생각할 때, 이 <금강경>의 지혜는 그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종교미신을 단절시킬 수 있는 신령스러운 말씀으로 가득 차있는가?"라고 평했다.

32분을 마지막 게송으로 해서, <금강경>은 그 가르침을 접는다.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이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이며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이니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이니라."

"모든 지은 법이여!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
그대들이여
이 같이 볼지니."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을 노래하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다. 김영훈의 <생각줍기>(한겨레, 2017.10.11)에는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값진 게 '허무'(虛無)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허무의 심연, 그 어떤 것도 그 앞에 서면 '의미'를 잃는다. 하여 필자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끊임없이 비우고 지우는 삶을 그린다. 초기 불경에도 위의 게송과 비슷한 시구가 나온다.

"색(色)은 거품덩이와 같고
느낌(受)은 수포(水泡)와 같다.
상(想)은 신기루와 같고
행(行)은 파초(芭蕉; 까달리)와 같으며
식(識)은 환영(幻影)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들은 비추셨다."

이것은 오온(五蘊)을 비유해 읊은 시인데, <금강경>에 나오는 '수포'(水泡)와 '환영'(幻影)이라는  말이 이 시구에도 똑 같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오온(즉,色․受․想․行․識)을 내려놓는 삶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김형찬(프레시안, 2017.05.17)은 몸과 감정, 그리고 생각에서 힘을 내려놓으면 몸과 맘이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환영과 같은 '몸'을 가지고 저 여여(如如)한 '마음'의 알속에 안주할 건가? 이것이 <금강경>의 화두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와  각묵스님의 산스끄리트 원전을 주해한 <금강석역해> 도올의 <금강경강해>와 각묵스님이 산스끄리트 원전을 주해한 <금강경역해> 책의 표지.
▲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와 각묵스님의 산스끄리트 원전을 주해한 <금강석역해> 도올의 <금강경강해>와 각묵스님이 산스끄리트 원전을 주해한 <금강경역해> 책의 표지.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산냐(相/想)의 덫에 걸리지 않는 삶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고 마치 달을 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데,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어찌 갈무리할 건가? 각묵 스님이 산스끄리뜨 원전을 주해한 <금강경역해>(1991) 말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불교역사는 불교문화사이기도 하다. 불교는 가는 곳마다 독특한 문화전통을 창출해내었다. 그것이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일본불교, 티벳불교, 남방불교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 스님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우리 시대는 이런 각 나라의 불교문화 전통과 근본 부처님 가르침을 분리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불교(문화)는 한국불교(문화)대로, 티벳불교(문화)는 티벳불교(문화)대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향하고 열려 있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전통이라는 산냐에 가려서 귀중한 금구의 말씀을 등지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은 우리에게 불교가 "조선의 불교인가, 불교의 조선인가?"라고 되물었다. 달라이 라마 스님은 불교를 체(體)로 삼고 각 나라의 문화전통을 용(用)으로 삼는 걸 말했다면, 신채호 선생은 역사학자답게 조선 문화를 체(體)로 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그 용(用)으로 삼는 걸 말했다. <금강경>의 가르침과 21세기 한반도의 역사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것은 오롯이 당대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와의 제휴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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