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다르다고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니다.
도가에서는 道와 德을 말한다. 도가에서 말하는 道는 우주의 총원리로, 마치 불가의 眞如이며 부처이고, 空이며 一心이고, 또 위음왕불威音王佛 저편 다시 저 저편(向威音那邊更那邊)[父母未生前]의 것이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에서 말하는 一이라고 할 것이고, 德은 각 萬物의 원리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또 불가에서는 간혹 상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常의 사전적 의미는 ‘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항상’ 등과 같이 단순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가의 전적典籍인 도덕경道德經에서는 상常뿐만 아니라 현玄, 음陰, 곡谷 등도 도道에 비유한다.
우주가 막 생겨나자 있었다는 위음왕불은 시작인 듯 시작이 아니다. 시작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그것 이전에도 시작은 있었을 것이니, 고정하여 지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존재한다고 가정한 그 무엇을 일러 一物이라고 하고, 그것을 부처라고 하는데, 그것은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단지 인식認識할 수 있을 뿐이니 그것을 일러 空이라고 한다.
불가의 一物을 때로는 부처라고 하고 때로는 空이라고 하여, 그것들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결코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의 여러 가지 속성屬性 중에서 어느 속성을 대표하여 이름으로 삼았는가로 말미암아 이름이 달라졌을 뿐 결코 다른 것은 아니다.
마치 필자가 학교에서는 선생이지만, 집에 가면 아빠이고 남편이며, 은사님께는 제자이고,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자식인 것처럼, 비록 이름은 다를지라도, 나는 다 같은 나인 것과 같다.
도가에서 말하는 道도, 道라고 부르지만, 그것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萬物이 변하는 것과는 달리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있으니, 그것을 일러 常이라고 하며, 또 그것은 만물이 분명하게 나누어 진 것과는 달리 혼재混在하여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아득하며 까맣고 붉은듯하니 그것을 일러 현玄(현(玄)은 실을 꼬아놓은 모습이라고 하기 때문에 아래 부분의 요(幺)가 들어있는 글자는 실과 관련이 있고(실 사絲, 끈 뉴紐, 실 선綫), 실에 물감을 들이는 것으로 인하여, 색깔을 나타내는 글자는 대개 糸가 들어 있다.(검은 치緇, 흴 소素, 초록빛 록綠, 검색 감紺) 또 흔히 玄을 ‘검을 현’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실과 같이 꼬인 가죽이며, 가죽의 색깔이 검기 때문이다. 玄이 들어간 글자 중에서 그것이 가죽으로 쓰인 경우는 牽이 있다. 牽에서 玄은 소를 끄는 고삐를 그린 것이다.)이라고 하므로, 道가 곧 常이요, 常이 곧 玄인 것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萬物의 시작을 위음왕불(一物)이라고 하고, 다시 그 만물은 위음왕불로 귀일歸一한다고 한다.
암컷의 음陰은 세상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시작이니, 그것은 마치 一物이 만물의 시작인 것과 같기 때문에, 道를 또한 陰이라고 하고, 산봉우리의 온갖 것들이 골짜기(곡谷)에 모여 바다로 흘러드니, 그것은 마치 萬法이 하나에 모이는 것과 같아, 道를 또한 谷이라고 한다면, 道는 陰임과 동시에 谷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도가에서 道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는 常이나 玄 등은, 불가에서도 그저 ‘항상하다’나 ‘검다, 깊다’로만 쓰이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 용어 속에는 이미 변하지 않는 속성의 眞如(常)와 아득하고 그윽한 속성의 진여(玄)라는 의미가 전제된 것이니, 그것은 道家에서 道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과 결코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 만한 예로 불가의 작품에서 현허虛玄를 들어 설명해보자.
妙道ᄂᆞᆫ 虛玄ᄒᆞ야 不可思議니 忘言得旨라ᅀᅡ 端可悟明이리라 남성우, 『六祖法寶壇經諺解
微妙ᄒᆞᆫ 道ᄂᆞᆫ 虛코 기퍼 어루 ᄉᆞ라ᇰᄒᆞ야 議論티 몯ᄒᆞ리니 말ᄉᆞᆷ 닛고 ᄠᅳᆮ 得ᄒᆞ니ᅀᅡ 正히 어루 아라 ᄇᆞᆯ기리라
미묘(微妙)한 도는 허(虛)하고 깊어서 가히 생각하여 의논(議論)하지 못할 것이니, 말[言]을 잊고 뜻을 얻어야 바로 가히 깨달아 밝힐 것이다.
(微妙한 道는 텅 비고 깊어서(그윽하여) 생각하여 議論할 수 없는 것이니, 말(言)을 잊고 뜻(旨)을 얻어야, [비로소] 반드시 밝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위로부터 각각 언해諺解, 언해에 대한 한글번역, 필자의 번역 순으로 적은 것이며, 필자는 ‘可(가)’, ‘端(단)’, ‘悟明(오명)’ 등의 용법을 고려하여 다시 해석하였다.)
텅 빈 방을 환하게 밝힌다는 의미의 허실생백虛室生白은 장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불가에서 방하착放下著하는 대상인 마음을 비워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虛가 도가의 용어인 줄은 안다. 문제는 玄도 또한 도가의 용어임은 위의 설명을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일문一物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眞空)이기 때문에 허虛라고 표현하고, 일문一物은 그래도 있다고 전제하여야 하는 것(妙有)이기 때문에, 그윽한 그 무엇으로 인식하여 玄이라고 표현했다면, 허현虛玄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합하건데 소요逍遙나 좌탈입망坐脫立亡과 같이 누구나 도가의 용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단어는 물론이고, 불전佛典에 사용되는 꽤 많은 용어가 격의불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덧붙여 생각할 것은 한자는 단어를 택할 때도 뜻뿐만 아니라 소리까지도 고려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즉 虛玄은 마치 방불彷佛(髣髴)의 한국한자음의 初聲이 ‘ㅂ’이듯이, 그것의 초성이 모두 ‘ㅎ’이고, 소요逍遙나 망양魍魎 등은 中·終聲이 유사하여, 일정한 어떤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증명을 하자면 중국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략하낟. 그러나 사실만은 독자가 믿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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