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는 마음의 조작이다"
"일체는 마음의 조작이다"
  • 김광수/한양여대 교수,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 승인 2017.07.0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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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주객전도의 유식학, 심외무물인가(下)
▲ 김광수 한양여대 교수(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불교닷컴

나는 현재 유식 불교의 독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유식불교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의 대부분의 불자들은, 대부분의 스님이나 학자들까지도 유식불교가 “오로지 마음 뿐이다”는 교의를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들이 세상을 부정하고, 중생을 부정하고, 제몸만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합리화 하는데 유식이라는 단어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라면 일체를 마음이 만들었으니, 태양도 이 지구도 내 마음이 만들었다고 주장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인생이 꿈인가

혹자는 이 인생이, 중생살이가 꿈이라는 것을 근거로, 이 모든 것이 환영(幻影)일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우선 꿈의 문제부터 보자. ① 의지: 나는 나의 의사와 의지(意志)대로 마음먹고 행동하고 수행하고 부처가 되는데, 꿈에서의 나는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인생이 꿈이라면 적어도 나의 자유의지는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 불교 아니던가? 수행해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도 자유의지이고, 고행을 극복하고 선정을 닦고 보시행을 행하여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도 자유의지이다. 내가 꿈이라면 무슨 자유의지가 있겠는가? 나는 그런 영화(映畵) 속의 인간인가?

② 경험과 객관성: 일단 현실이 꿈이라면 너와 내가 같은 것(대상, 경험)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객관성이라는 것은 일체 있을 수가 없다. 꿈에서는 내가 어머니와 만나더라도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을 모르신다. 그러니까 꿈을 허망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만남이 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면 허망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인생은 꿈과 같은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렇더라도 꿈은 아니다. 우리는 “꿈이다”와 “꿈과 같다”를 혼동하면 안된다.

③ 점유와 영속: 꿈에서 본 내용이나 인물이나 물질은 영속되지도 않고, 일정한 장소를 점유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현실은 꿈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꿈을 깬다”는 현상도 있다. “인생이, 현실이 꿈과 같다”라고 말하면 선종이 되고, “인생은 꿈이다”라고 말하면 그건 신비주의가 된다. 나는 신비주의는 진실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데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④ 주재: 현실이 꿈이라는 주장은 “그 꿈을 누가 만들어 내느냐, 누가 주재하느냐”도 설명할 수 없다. 이 꿈을 주재하는 자, 생산하는 자는-혹시 그런 자가 있다면- 기독교의 하나님 과 유사한 그런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타력신앙이 되어버린다.

⑤ 타자의 존재증명: 세상이 꿈이라면, 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게는 나라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꿈이라면 그대는 나의 존재도 실재가 아니고 꿈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데 그럴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해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대의 꿈속에서만 환영으로 존재할 뿐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을 승복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유식학에서 타자(他者)의 존재종명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타자의 존재는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서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가 내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무표색, 혹은 법경

일체유심조 논의는 두가지이다. A. 마음 밖에 물체가 있는가와, B. 일체를 마음이 만드는가이다. 마음 밖에 물체가 있는가 논의를 계속해 보자. “오로지 식만 있다”고 하는 것이 유식(唯識)의 교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유식이라는 한자말을 글자 그대로 잘못 읽었기 때문에 생기는 잘못이다 (특히 한자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그 논의 이전에 식(識)에 관해 고찰해 보자

초기불교에서는 의근(意根)이 대경(對境)을 만나서 의식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대경에 해당되는 것은 법(法)이라고 표현된다. 사실 의식(意識)의 대상이 무엇인가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표색(無表色)이라고 했다. 이 말부터가 쉽지 않다. 표가 없는 색이다? 눈은 물체를 보고 눈의식을 생산해 내지만, 意(마음)은 무엇을 보고 의식(意識)을 생산해 낸다는 말인가? 흔히 요즘 말로는 그것을 관념(觀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각의 대상? 그게 무언가? 생각의 대상은 기억일 수도 있고 추리일 수도 있고, 사람이나 사건일 수도 있고 의심일 수도 있다. 그리고 느낌일 수도 있고 알수없는 그 어떤 것,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그냥 법경(法境), 혹은 법진(法塵)이라고 했고 좀더 유식하게 말해서 무표색이라고 했다. 사실은 무표인데 무표색이라고 한 것도 <마음은 무언가 대상이 있어야지만 의식이 생겨날 수 있다>는 논리구조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근경식의 3事가 화합해서 명색(名色)이 생긴다는 근본교리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다시피, 마음이란 (意는) 대상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상은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일 수도 있고, 추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거의 기억이나 추리도 물질이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하여튼, 모든 의식은 대상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유식(唯識)의 기본 교리이다. 유식의 교리 자체가 의식은 대상에 연(緣)하여 생겨난다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언젠가 읽은 책에서 레닌이 말하였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생각하거나 상상해 낼 수는 없다”고. 소위 여러가지 상상물이나 공상과학물은 모두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변형, 조작, 변조, 합성, 상상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용(龍)이나 봉황새도 그러하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오직 불교를 믿는 다는 사람들만 상식 밖의 이야기를 한다.

구사론과 무상유식

외계가 과연 존재하지 않는가에 관한 논쟁은 한역 󰡔아비달마 구사론󰡕에도 나온다. 아비달마 구사론 제 8권은 세계와 우주의 모습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비록 남섬부주 이외의 세계에 관한 설명은 상상에 의한 것이거나, 혹은 북구로주를 인도 북쪽 히말라야 비슷하게 묘사하는 (당시 사람들답게 순박한 상상으로) 그런 순진함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세계가 아주 없거나, 전혀 의식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는 않는다.

한편, 이 세계가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부파들에 대한 논쟁도 나온다. 즉, 세친은 상색(相色)을 부정하지만, 설일체유부나 대중부는 상색이 유체(有體)라고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세친의 주장도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이 내게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천년 이상 동안 이런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수많은 불교도들이 생각하듯이 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그리 일반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설일체유부는 “마음 밖의 물질의 실재”를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일부 유식론자들은 “마음 밖에 물질이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논쟁은 수백년동안을 이어갔다. 누구의 주장이 옳든 간에 그 사실만 보아도 적어도 마음 밖에 물질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주제는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유식학에 있어서도 수백년동안 무상(無相)유식학파와 유상(有相)유식학파가 논쟁을 벌여왔다. 즉, 우리가 느끼는 상(相)이라는 것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마음 밖에 있는 것이냐의 논쟁이었다. 물론 그 논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그냥 양측의 주장만이 계속되었을 뿐이다. 나는 물론 마음 밖에 물질이 당연히 있다는 쪽이다. 마음 밖에 물질이 없다고 하는 쪽을 견강부회라고 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소승불교의 주장은 다 엉터리라고 그토록 넓은 지역에서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천년이상 믿어 왔었지만. 그러나 오늘날 그 소승불교, 남방불교를 배우러 미얀마와 태국에 가고 이제 그 방법에 일생을 거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아졌듯이, 또한 극락정토가 서방에 있거나, 혹은 사후에 간다고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토록 오래 그토록 많은 반면에, 그런 서방정토는 없고, 자심정토(自心淨土) 즉, “정토는 자기 마음 속에 있다”고 믿는 중국 선종 계통 사람들도 또한 그토록 많은 것처럼, 그것이 아비달마 불교라고 해서 손쉽게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주객전도의 유식학

유식(唯識)은 산스크리트 원어로 vijnaptih- matrata이다. vijnaptih가 식(識)이고 matrata가 오로지 유(唯)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데, 즉, 한문 번역상의 문제이다. vijnaptih를 그냥 식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그것은 vijnana (식-인식한다)의 수동태 형이다.(우에다 요시부미, 󰡔대승불교의 사상󰡕, 민족사 1989, p.135, 151) 즉 인식되어지는 것이라는 단어이다. 즉 오로지 인식되어지는 것만 있다는 뜻이다. 유식의 교의가 그렇듯이, 인간이 물(水)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물고기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천신(天神)은 유리라고 생각하고, 아귀는 불로 본다. 즉, 누구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도 누구는 예쁘다고 하고, 누구는 악마라고 한다. 이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느끼실 것이다. 도깨비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사람이거나 혹은 쥐 한 마리일 수도 있다. 존재는 경험에 따라서 혹은 업에 따라서 각기 그때그때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 화엄경에 나온다는 각림보살의 유식게(대표적인 유식이론의 경전적 근거가 되는)는 “마음은 화공과 같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정말 옳은 말이다.

그러나, 화공도 벽이 있어야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물감이 있어야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과거의 물질적 경험이 있어야 그에 따라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물질이 아예 없다면 어찌 화공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 vijnaptih는 수동형인데, 수동형이란 타동사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타동사란 반드시 목적어를 취하는 동사이다. 목적어가 없이 어찌 수동태가 가능한가. 인식되는 대상이 없이 어찌 인식되어지는 vijnaptih가 가능한가. 그러므로, 유식 공부를 철저히 한 사람은 대상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유식 공부를 철저히 안한 사람들이 한자말만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오로지 식만 있다”고 말할 뿐이다.

옛날에 젊은 스님이 “심외무물이라,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튼 소리를 자꾸 하자 그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스승님은 그 젊은 스님을 목침으로 후려 쳤다. “이놈아, 이래도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느냐 !”

청변(淸辯 Baviveka, 혹은 바비야)의 주장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은 얼마 전에 대표적인 불교 학술지에 게재된 내용이다. 금강대학교 김성철 교수님의 글이다.

십지론에서 말하는 “삼계 유심”은 외계 대상을 부정하고 유식사상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경문으로 지금까지도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청변 등은 이 원 맥락이 외계대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 곧 행위자와 경험자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외계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친인데, 이는 유식20론송 제1송의 주석에서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심(citta)을 유식(vijnaptih, -혹은 표상)으로 해석해서 오로지 식만이 존재한다고 풀이했지만, 실상, 이에 대한 청변의 지적을 보면, 유심은 유식과는 달리, 心과 心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소 즉 대상이 없이는 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소 즉 대상이 없이는 심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십지경 에 대한 무성(無性)의 주석에서 언설된 것이다.

이처럼, 대상(외경)이 없다는 주장도 매우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부정, 혹은 논쟁도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물론 이와는 반대주장도 있다. 즉, 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명한 론사들 사이에서도 외계가 있다는 주장도 그리 틀리는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생은 존재하는가

사실 외계(外界)가 없다는 사상의 심각한 해독(害毒)은 중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말로는 중생이라고 하면서도 그 사람들의 안중에 중생은 없는 것이다. 중생이 없다면 보살행도 없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선종을 자기 수행만 하는 소승(小乘)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평가가 근거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 밖에 외계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이른 바 공업(功業-함께 짓는 업)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공업의 경전적 근거도 많지만, 구태여 경전적 근거를 들지 않더라도 이 사회라는 것이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고, 서로 영향과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이렇게 불교는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신비적인, 허황된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잘 생각해 보자, 자기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세음보살의 구고구난(救苦救難)과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망국적 신비주의

마음 밖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칼에 맞아 죽거나, 총에 맞아 죽는 일은 없어야 헌다. 내가 죽는 것도 꿈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더라도 꿈에서 죽는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나의 아트만, 혹은 보특가라(pudgala)는 그대로 살아있다?

그건 그야말로 신비주의거나, 혹은 영혼불멸설이거나, 유아론(有我論)이다. 그 유아론에서도 외계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혹은 그것을 상견(常見)이라고도 하는 데 부처님은 그것을 분명히 부정하셨다. 간혹 수준 낮은 법문에서 윤회를 말하면서 “내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라는 실체가 있다고 하는 아트만적 사고방식, 개아론적 사고방식을 길러줄 위험이 있다. 분명 그것은 불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내 목숨을 죽이는 총이 있고 칼이 있는데도 그것을 없다고 한다면 대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는 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이며, 있는 게 무엇이며 없는 게 무엇이겠는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있다 없다, 죽는다 산다” 라고하는 최소한의 언어약속이 있다, 또 부처님도 그것을 근거로 수많은 법문을 하셨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무슨 언어생활이 되겠으며, 그 사람의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겠는가.

한 독문학자의 온당함

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면 나는 어디서 생겼는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면 나는 무엇을 먹고 지탱하는가? 음식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음식물을 먹고 지탱하면서 음식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음식에 대한 배반이다. 나를 먹여 살리는 음식을 없다고 한다면 음식으로부터의 앙화(殃禍)가 어찌 없겠는가. 그대와 함께 대화하는 내가 없다면 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대가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대와 나와의 대화와 만남과 관계는 없는 것이다.

많은 불자들이 이렇게 잘못된 사고방식을 하고 있으니까, 중생의 존재도 보이지 않고, 고통받는 중생도, 구제해야 할 중생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건 말건, 독재자가 세상을 망치건 말건, 핵전쟁이 나건 말건, 일본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자기 깨달음만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 물질도 없다”는 주장은 마땅히 패륜적인 주장이며, 제정신 있는 사람의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제 살림만 차리는 이기적인 수행자의 변명거리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가 말했다는 “일체유심조”는 뭐란 말인가. 원효도 정신나간 사람인가? 일체유심조라는 표현은 기신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뜻을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서울대학교 독문학과의 안삼환 교수는 일체유심조를 “마음이 일체를 조작한다” “일체는 마음의 조작이다” 라고 아주 정확히 표현하였다. 그것이 유식의 대의이다. 그러니, 한자의 간결성을 무시하고, 혹은 기신론이나 유식 공부를 제대로 안하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는 잘못된 풀이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광수/한양여대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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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 2017-08-13 07:25:11
마음이 뭔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하는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찾기가 어렵도다.' 하는 것처럼 참 마음의 세계를 모르고 손쉽게 마음과 물질을 나눠서 이야기 하는것 같다.
둘이 아닌 하나의 세겨ㅣ에 계합되어야지,
이론가 합리라고 내세우는것도 인간의식이 조작한 틀이다.
진리의 세계에서 보는것과 다르다.

무암 2017-08-05 13:38:21
존재란 말은 원래 잘못된 용어이고 연기현상만
항상 있지요. 유정묾만연기하나요?
유정물 밖의 것도 모두 연기하고 있잖아요ㅡ
우유도 계속연기하고 책상도 연기하고...
그래서 우유도 책상도 연기 (존재) 하고 있습니다.
일체유심조는 낭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인식하는
것은 내가 조작한다 ( 나의 뇌 안에서 연기가
일어난다는 뜻이에요ㅡ 내 입장에서 보면 내 안에서 연기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탈식이 2017-07-10 14:47:47
존재란 근경식 3사화합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에요.
3사화합이 안되었을때는 존재라고 부르면 아니되오.
그래서 심외무물이라고 하는거요.

당신이 태어나기전에 이세상은 존재했었나요?
깊이 아주 깊이 명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