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청담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7.06.19 13:42
  • 댓글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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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156. 청담의 유아론: ‘산사에 심은 뜻은‘ 비판

청담 선사(1902~1971)는 인욕보살이라 불릴 정도로 평생 욕됨을 참아내셨으며 청정한 계행과 자비로운 성품으로 많은 불교인들의 귀의를 받으셨다. 스님은, 식민지 시절의 왜색불교의 영향으로 대처불교가 되어버린 한국불교를 비구종단으로 거듭나게 한 정화의 주축이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훌륭한 청담 스님의 철학이 비불교적이다. 부처님이 부정하고 혁파한 힌두교적인 유아론(有我論)이다. 스님의 저서인 <산사에 심은 뜻은>에는 수없이 유아론적인 사상이 나타난다. 소위 '참나(眞我)'가 나타난다.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참나는 '참된 나(true atman)'라는 뜻이다. 힌두교에 의하면 아트만은 '참된 나'이므로, 청담의 사상은 정확히 힌두교 사상이다. 힌두교의 참나, 즉 아트만은 연기법(緣起法)을 벗어난 초월적인 존재이다. 청담의 참나 역시 정확히 초월적인 존재이고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벽한’ 존재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생각은 가아이고 생각을 하는 것은 진아(眞我 참나)이다. 서암·서옹·진제·송담 등 현대 한국의 고승들과 한자경 등 불교학자들이 ‘참나가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일회적인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통의견이라는 증거이다.

종교에는 경전에 나타난 명시적인 교리와, 경전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교단에 전해져 내려오는 암묵적인 교리가 있는데, 참나는 한국불교의 암묵적 교리이다. 옛날에는 지리적 장벽으로 인하여, 한 지방의 교리가 잘못되기 쉬웠다. 그 지방의 이름 높은 고승이, 수상한 경로로 입수한 혹은 스스로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삿된 교리를 정통교리인 양 주장해도 그게 삿된 교리라는 것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한국불교의 참나이다.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602~664)은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ca)라는 중생이 존재한다'는 이론이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왕복하는 데 장장 17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현장이 스승으로 모신 날란다 불교대학의 학장 계현 스님은 일천제가 존재한다는 쪽이었다! 그러니 옛날에는 잘못된 이론을 바로잡기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다른 나라(불교)에는 없고 유독 한국(불교)에만 있는, 참나가 바로 이런 예이다.

한국불교의 유아론은 그 뿌리가 아득하다. 그 역사가 1,000년에 이를 것이다. 아마 보조 지눌(1158~1210) 스님까지 거슬러 올라갈지 모르지만, 최소한 청담 스님이 중시조(中始祖)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청담 스님의 저서 <산사에 심은 뜻은>에 나타난 스님의 사상을 비판한다. 문장을 구체적으로 인용하고 상세한 비판을 달 것이다.
 
나는 곧 마음이다. 육신은 비록 내 것이라 해도 그것은 의상처럼 잠시 빌어 입은 것이다. (32쪽)

평: 유아론적인 사상이다. 청담은 육신이란 마음이 입는 옷 정도로 간주하고 있다. 한국의 고승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 이리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이 몸이라는 옷을 벗고 다른 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의 생각으로서, 소위 환생(還生)이다. 자기 마음이, 마음이 떠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면 차시환생(借屍還生)이다. 하지만 마음은 육신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진다. 식(識)은 근·경(根境)을 연해서 일어난다. 따라서 근·경이 사라지면 식도 사라진다. 식은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이생에서 저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업이지 식이 아니다.)
 
‘나’라는 이 마음은 불에 탈 수도 없는 것이고 물에 젖을 수도 없는 것이며, 자살도 타살도 할 방법이 없다. 나라는 ‘나’는 영원불멸의 것이요, 또한 절대자유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무결한 실체, 즉 우주 이전의 실체요, 차원 이전의 것이므로 나를 앞서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34-35쪽)
 
평: 다시 유아론이 등장한다. 유아론이 아니라면 이런 발언을 할 수가 없다. 지렁이의 나는 영원불멸의 것인가? 감정도 없고 지성도 없는 지렁이의 나가 영원불멸의 것이라면, 그것은 무지·무명에 갇혀있는 지렁이의 '현상 아(我)'가 아니다. 뭔가 현상계를 초월한 것이다. 이런 류의 철학은 깊은 사유가 없는 철학이다. ‘나’가 완전무결한 실체라니 이것은 힌두교의 아트만이다. 브라흐만(Brahman)이다. 언제 부처님이 '완전무결한 실체로서의 아(我)'를 설했다는 말인가? 청담은 불교사에서 평범한 한 승려일 뿐이다. 그의 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럽힐 수는 없다: 무아연기론(無我緣起論)을 욕되게 할 수 없다. 청담은, 깊은 사유가 없는 천박한 힌두교적 사유로, 아무 거리낌 없이 유아론을 설하고 있다. 한국불교에 정안(正眼)을 가진 자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모두가 내 이후의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이 ‘마음’이 창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이 창조하면 하느님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태양도 있고, 온 우주가 건설되는 것이다.
 
평: 청담은 '마음이 우주를 창조한다'고 말하고 있다. 대강백 각성 스님은 '마음이 허공을 창조한다'고 말하는데, 청담은 아예 노골적으로 '마음이 우주를 창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의 마음은, '영이의 마음'이나 '철수의 마음' 같은 개별적인 마음이 아니고, 하나의 마음이다. 우주의 질료로서의 마음이고 우주를, 즉 정신과 물질을 창조하는 창조주이다. (청담이 언급하고 있는) 마음은 기독교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는 초월적인 존재이다. 부처님은 결코 이런 존재를 설한 적이 없다. 힌두교 유아론에 경도된 불교인들이 만들어낸 마설(魔說)일 뿐이다.
 
마음은 사멸이 없는 것이다. 사멸이 없으므로 이 육신을 떠난 후에도 다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생윤회라 한다.
 
평: 청담의 유아론적인 불교관이 다시 등장한다.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사티비구를 꾸짖으셨다. 그런데 청담은 ‘마음이 윤회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경은 공부하지 않고 한국의 절집에 떠돌아다는 괴이한 이야기만 들은 탓이다.

기독교에도 경전 밖에 떠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교리가 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가 그렇다. 이 두 곳에 대한, <성경>에는 없는, 자세한 묘사가 떠돌아다닌다. 연옥도 <성경>에는 없는 교리이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 역시 <성경>에 없는 교리이다. (지금은 승천 사례가 보고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찍을 수 있고 인공위성으로 중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CNN을 통해서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될 것이다. "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예루살렘에서 늙은 처녀가 승천하고 있읍니다!")

청담의 마음과 윤회에 대한 것이, 이런 종류의 것이다. 한국 절집에 떠돌아다니는 정체불명의 교리이다. 모두 힌두교적인 것들이다.

마음이 삼생윤회(三生輪廻)를 한다는 청담의 주장은 자체모순이다. 마음이 청정무구(淸淨無垢)하다면 윤회계에 윤회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지극히 선한 사람이 극악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는 말과 같은 모순된 말이다.

다 같은 마음으로 태어난 인간이 빈부귀천 등 한량없는 차별을 나타내는 것도 전생에 제가 지은 원인에서 그러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고 한다. (33쪽)
 
평: 이런 종류의 인과응보는 마설(魔說)이다.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아 전신마비가 되었다면 그게 전생의 업으로 발생한 일인가? 그런 업은 필시 악업일진대, 벼락은 하나님이 악인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하면서 피뢰침 발명을 반대한 서양 기독교인들과 어떻게 다른가? 일찍이 2,000년 전에 한나라의 대학자 왕충은 이런 생각을 비웃고 꾸짖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벼락이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면 얼마 전에 안휘성에서 벼락에 맞아 죽은 염소 5마리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대라’고 했다.
 
먼저 나를 찾아내야 한다. (42쪽)
 
평: 나란 인연화합물이므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찾는 순간에도 끝없이 변하는데 뭘 찾는다는 말인가? 흐르는 물에서 흐르진 않는 물을 찾을 수 있는가? 변화무쌍한 구름에서 변하지 않는 구름을 찾을 수 있는가? 흘러가는 시공간에서 흐르지 않는 시공간을 찾을 수 있는가?
 
‘나’는 ‘나’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요 광명이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뿐이다.
 
평: 다시 힌두교적인 유아론이 등장한다. ‘나는 나다’라는 표현은 힌두교에서 브라흐만(Brahman)을 표현하는 말인 ‘나는 나다(I am that I am)’와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다. 기독교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나란 인연화합물인데 어떻게 유무를 초월한 존재라고 주장하는가? (지금의 나란, '과거의 나'와 '가족'과 '사회'와 '국가'와 '자연' 사이의, 연기작용의 소산이다.) 그림자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단지 태양과 사물의 연기현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 연기(緣起)라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지, 뭔가 신비로운 초월적인 게 배후에 있어서 유무를 초월하는 게 아니다. 그림자를 초월한 무엇이 그림자 뒤에 웅크리고 있는가?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달님이 떠오르면 다시 생긴다. (당신이) 해도 달도 싫다고 동굴로 들어가면, 그림자는 동굴 속으로 (당신을) 따라 들어가지 못한다.

청담은 ‘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유무를 초월하여 산 것이며 힘이요 광명이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깨끗한 것이어서 오직 ‘나’일뿐이다. 하지만 이런 나는 힌두교의 ‘니구나(無相) 브라흐만’이다.
 
나는 만법과 더불어 있지 않고 독립·독존·독귀·독권하며 유일무이한 실상진아(實相眞我)의 실존을 지칭함이 곧 ‘나’다.
 
평: 이런 나는 정확히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다. 연기법의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상의(相依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 만약 독립·독존·독귀·독권하는 존재가 있다면 이는 연기법을 초월한 존재이다. 이런 존재는 연기세계에 들어와 윤회를 할 이유도 없다. 독립·독존·독귀·독권하는 존재가 왜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업을 짓겠는가? 탐욕·증오·무지를 떠난 존재가, 어떻게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죽이면서도 동시에 자기가 상주불변한 줄 아는 일이 벌어지는가? 이런 명백한 모순에 눈을 감고, 부처님이 주장한 적 없는, 독립·독존·독귀·독권하는 존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가?
 
이 참 ‘나’를 발견, 체득함으로써 우주의 주인공이 되며 생사의 인과를 초탈해서 자재할 수 있다. (42쪽)
 
평: 언제 부처님이 이런 설법을 하셨다는 말인가? 청담의 사상은 삼천대천세계 크기의 마설(魔說)이다. 한국불교 최초로 순수 우리말인 ‘참나’(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산사에 심은 뜻은'의 출간이 1976년의 일이니, 40년 전의 일이다. 피(참나)가 긴 세월을 논을 차지하고 번식하여 무성하니 이제는 벼(무아)가 행여 뽑힐세라 눈치를 보며 구석에 숨어 연명하는 꼴이다.

참나를 발견한다니, 누가 누구를 발견하는가? 참나가 참나를 발견할 리는 없으므로, 가아(假我)가 참나(眞我)를 발견하는가? 그러면 우리 마음에는 가아와 참나라는 두 개의 나가 있는가?
팔만대장경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가?
 
영혼은 이렇게 전생의 인연 관계를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첫눈에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을 다 압니다.
 
평: 그런데 어떻게 사기를 당하는가? 청담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에 일본보다 10배나 사기범죄가 일어나는 이유가 혹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영혼이 없기 때문인가?

그리고 영혼은 아메바 시절과 물고기 시절의 기억도 다 가지고 있는가? 뇌 신경세포가 별로 없는 아메바나 물고기 시절의 전생을 다 기억한다면 왜 인간으로 환생해서도 단지 뇌 신경세포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가? 그 결과 알츠하이머나 치매에 걸리면, 왜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35억년 지구 생명체 역사에서 포유류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미미한 존재였다. 1.5억년 동안이나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들이 6,500만 년 전에 멸종하면서 포유류의 시대가 열렸다. 모든 걸 다 기억한다는 참나를 찾았다는 대수행자들이 왜 1.5억 년이나 지속된 공룡시대를 기억하지 못하(했)고 그전의 기난긴 33.5억 년간의 삶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했)는가? (예를 들어, 어떤 전생담에도 공룡이 등장한 적이 없다.)

답은 간단하다. 진화론을 몰랐고 지구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우주의 역사는 더 말할 게 없다. 무지한 자들이 절대적 확신으로 큰소리 치는 게 종교의 역사이다. 종교에는 선언만 있고 증거는 없다.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단 한 번도 생명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보여준 적이 없다.
 
인생의 본연면목인 근본 선나에 일치되어 생사에 초월 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70쪽)
 
평: 근본 선나(禪那)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미리 존재하는 존재에 일치시키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춤을 추는 것은 춤을 추는 동작이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춤에 일치시키는 게 아니다. 춤은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발을 옮기고 팔을 드는 상주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에 초월하게 되는 것은, 청담의 주장처럼 상주불변의 실체를 찾아서가 아니라, 일체가 연기현상임을 깨달아 즉 무상이고 무아임을 깨달아 탐욕과 증오를 떠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본체며 인생의 본래면목인 이 마음자리를 타개 발견하여 근본 선나에 일치됨으로써 생사를 초월하여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자아의 만덕을 갖출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70쪽)
 
평: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아도 없고 만덕(萬德)도 없다. 에이즈 균에도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만덕을 갖춘 생사를 초월한 자아가 있는가?
 
저 대자연계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가 다 선나인 것이다. (71쪽)
 
평: 청담은 사유수, 즉 사유작용이라는 것을 실체화하여 마치 그것을 얻거나 그것에 일치시켜야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단한 진리를 들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그리고 어지러운 추상명사들의 나열이 있을 뿐이다. ‘베사메무초(Besame Mucho)야, 그대는 외로운 나의 사랑’이라는 노래가사는 외국말인 스페인어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번역이다. ‘베사메 무초’는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흠뻑 키스해 달라’는 문장일 뿐이다. 사유수를 실체화하는 것은 베사메 무초에 대한 오해와 유사한 일이다.

'저 대자연계의 모든 사물이, 그 자체가 다 선나'라니 이는 모든 사물에 마음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의 일종이다. 청담의 사상은, 여기저기서 주어모은 괴이한 이론들의 잡탕이다. 한국불교의 뒤틀린 기이한 모습은 종교연구의 대상이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승속(僧俗)이 다들 침묵하고 있는지 신기하다.
 
아무리 인문이 발달했다 해도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현대과학이나 철학, 종교로서는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82쪽)
 
평: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인문과 현대과학·철학·종교는 다 도움이 된다. 오히려 이상한 종교인들의 이상한 생각이 문제이다.
 
여러분, 무엇이 말을 듣고 앉아있습니까? 생각의 이 본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그것 밖의 나_____생각의 주체가, 여러분 자신이 듣고 앉아 있습니다. 생각하는 우리의 본마음, 이것만은 죽일 수도 자살할 수도 없습니다. (83쪽)
 
평: 청담은 “참나가 보고 듣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참나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보고 듣고 생각한다는 것이 근·경·식(根境識) 삼자의 연기(緣起)라는 것을 부인하는 말이다. 대승불교 8종의 조사인 용수보살의 중론(中論)을 부인하는 것이며 능가경(楞伽經)을 부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사티 비구에게 말씀하셨듯이 ‘이생에서 저생으로 업을 짊어지고 가는 존재도 없는데’, 무슨 수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참나와 같은 존재가 있겠는가? 진제 스님의 주장처럼 참나가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 몸뚱이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디서 이런 마설(魔說)이 나와서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가?
 
또 ‘나’는 끝까지 ‘나’로서만이 ‘나’이지 그 밖의 어느 것과도 섞여 있는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평: 이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연기(緣起)의 결과이다. 오온이 화합하여, 즉 연기하여 있는 존재이다. 그밖의 다른 것과 섞여 있는 존재이다. 나는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내가 입고 먹고 가지고 있는 복장·음식·예절·인생관 등에 대한 선호와 정신은 (내가 몸 담고 사는) 사회의 영향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해 서 있는 것입니다. 중생도 초월했고 우주도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다 초월한 삶의 주인공입니다. (90쪽)
 
평: 18계가 다이다. 18계를 초월한 것은 따로 없다. 인간은 시공간 속에서 고락을 겪는 구체적인 존재이지 청담이 주장하듯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18계를 초월한) 초월적인 존재는 더욱 아니다.

청담은 우리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완벽한 모종의 존재(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데, 찾는 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있다. 참나가 참나를 찾을 리는 만무하므로(이런 일은 참나가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가아(假我)가 찾는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가아가 어떻게 '완벽한' 참나를 찾을 수 있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가아가 참나를 찾는다 하더라도, 찾고 나면, 가아는 살아남는가? 아니면 사라지는가? 살아남는다면 여전히 문제아가 존재하는 것이고, 사라진다면 단멸론이 아닌가?
 
우주 가운데 제일 위대한 능력을 가진 염연한 존재가 ‘나’라는 말입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동물도 그렇고, 생명을 가진 것은 다 한가지입니다.
‘나’는 물질과 허공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차원 이전의 존재이고 질량 이전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존재이므로 우주가 파멸된 후에도 없어질 수 없는 영원의 실재이며, 일체를 초월한 실재입니다. (90쪽)

 
평: 청담의 ‘나’는 유아론(唯我論)의 극치이다. 이 ‘나’는, 그에 의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후에도 존재하는 영원한 실재이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정도의 유아론이다. 힌두교적 유아론과 다른 게 없다.

청담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가 생기기 전에는 참나만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참나가 해·달·별 등 우주를 창조한다고 한다. 여기서 문제는 참나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여럿이라면, 수천억 명의 참나들이 참나 국민투표라도 해서 우주의 창조안을 마련하는가? 그게 아니라 참나가 하나라면 참나는 힌두교 브라흐만이나 기독교 하나님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는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죽을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초월하여 나고 죽는 것까지 초월한 것입니다. (91쪽)
 
평: 나란 연기적 존재일 뿐이다. 죽을 수 없는 실재가 아니다.
 
생명의 주체는 물질도 허공도 생각도 아닌 ‘나’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육체가 죽는 것은 생명의 근본실재인 ‘나’와는 근원적으로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죽지도 않고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참 나[진아]’는 사고하여 추리하고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이하 생략).
 
나는 죽을 수 없는 불생불멸의 실재이고, 이름 지을 수 없는 ‘마음’자리이며 죽을 수 없는 영원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선이든 악이든 자기가 지어 놓은 과보를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인과설이고 윤회설입니다.

 
평: 횡설수설이다. 완벽한 나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나? 그리고 참나(true atman)가 윤회를 한다는 이론은 힌두교 윤회론이지 불교의 윤회론이 아니다. 불교의 윤회론은, 전찰라의 오온을 인(因 cause)으로 후찰라의 오온이 과(果 effect)로 생긴다는 것이다.
 
인과를 지어서 천당으로도 가고 지옥에 떨어지고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나’는 ‘참 나’를 저버린 가아(假我)의 삶입니다.
 
평: 참나와 가아, '진짜 나'와 '가짜 나', 두 개의 나가 있다는 말이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에 의하면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 몸뚱이로 들어가는 것은 참나이므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도 참나이다. 그런데 완벽한 참나가 어떻게 지옥에 갈 수 있나? 종교인들의 특징은 망상을 철석 같은 확신으로 진리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그렇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망상이 깊고 견고할수록 (자기 종단에서) 존경을 받고 지위가 올라간다.
 
참나는 육신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죽지 않는 비존재이므로 나는 영원히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평: 가아(假我)는 죽을 수 있는가? 도를 통한다는 것은 가아가 죽는 것인가?
 
모든 것의 주인공이고 근본체인 이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것도 없고, 톱으로 잘라 봐도 토막이 날 것도 없고, 쇠망치로 때려 봐도 부서질 것이 없습니다.
중생들은 이렇게 완전한 ‘참 나’를 찾을 줄 모르기 때문에...

 
평: 연기법도,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것도 없고, 톱으로 잘라 봐도 토막이 날 것도 없고, 쇠망치로 때려 봐도 부서질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찾아야지, 왜 엉뚱하게도 참나를 찾는가? 어느 경전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참나를 찾았다'고 쓰여 있는가?
 
청담은 말한다. "중생들은 이렇게 완전한 ‘참나’를 찾을 줄 모르기 때문에..."
왜 참나를 찾는가? 연기법을 찾으면 큰일이 나는가? 연기법을 인격화하고 의인화하면, 연기법은 유대교 또는 기독교 구약의 창조주 같은 인격신으로 전락한다.
 
생각이 곧 나일 수 있느냐? 사람들은 흔히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한 어느 서양 철인의 말을 신봉하는 것같이 보이는데,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생각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나’로부터 생각되어진 피조적 소산(被造的所産)에 불과합니다. 생각을 내는 주체는 ‘나’이고 곧 ‘마음입니다.
 
평: 횡설수설이다. 생각은 참나가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말을 비판한다고 해놓고, 사실은 데카르트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참나가 생각을 한다면, 생각을 한다는 사실로부터 참나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쁜 생각은 누가 하는 것인가? 모든 생각을 참나가 하는 것이라면, 나쁜 생각도 참나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나쁜 생각을 하는 놈을 어떻게 '참된 나', 즉 ‘참 나’라고 부를 수 있는가? 청담이 주장하듯이 참나는 완벽한 존재라면, 어떻게 완벽한 존재가 나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번뇌는 누가 일으키는가? 그것도 생각이므로 참나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완벽한 참나가! 청담의 사상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노인네와 같은 사상이다. 부처님의 정치(精緻)한 사상을 버리고 이런 조악한 (참나) 사상을 따르는 게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 생각은 ‘나’로부터 생각되어진 2차적인 인식 세계이고 ’나‘의 피조물일 뿐, 생명의 주인공인 ’나‘는 아니며 ’마음‘의 실체도 아닙니다. (95쪽)
 
다시 말하면 생각은 ‘가아(假我)’이고 생각을 내는 ‘나’ 이것은 ‘진아(眞我)’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96쪽)
 
평: 대망언(大妄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옆집 사람을 톱으로 잘라 죽이고 그 사람 재물을 차지하자고 생각을 했다 하자. 그러면 청담의 주장에 의하면 ‘옆집 사람을 톱으로 잘라 죽이고 재물을 차지하자는’ ‘생각’은 가아(假我)이고, ‘그런 생각을 낸’ 것은 진아(眞我), 즉 참나라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나’라는 명사를 가지고 우리 생명의 주체를 설명해 왔지만 사실은 ‘나’라는 말도 맞지 않습니다. 진아(眞我)라고 해야 좀 더 가까울 것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나’다, ‘나’다 하고 내세우지만 이런 ‘나’는 현상계에 매달린 ‘나’이고 뚜렷한 주체가 없는 ‘망아(妄我)’입니다. (96쪽)
 
평: 청담의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청담이 말하는 '나'는 참나이다. 청담은 이원론자이다. ‘나(아 我)’를 가아·망아와 진아·참나, 둘로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나’는 항상 변화하고 방황해야 하는 ‘나’이므로 이것은 ‘진아’일 수 없습니다. ‘가아’고 ‘망아(妄我)’며 육신이고 현상계입니다. 우주 현상계 그대로가 전부 ‘가아’입니다. (96쪽)
 
평: 진아는 변하지 않는 '나'이다. 청담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게 바로 진아이다. 그러므로 청담은 유아론자이다. 힌두교 아트만주의자이다. 아마 청담은 자신이 힌두교 아트만주의자인 줄도 모를지 모른다. 청담은 우주 현상계를 가아(假我)로 보는데 그 현상계 너머에 '완전하고 참되고 변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절대아(絕對我)·진아(眞我) 정신활동 가아의 활동 생각의 생멸상 (98쪽)

이러한 모든 것의 창조주인 우리의 마음은 제 몸뚱이도 만들고 제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 등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내는 것인데, 인류 오천 년 문화도 이 마음에서 나온 한 개의 꿈의 소산인 것입니다. (112쪽)
 
꿈을 꿀 때에도 꿈속에 있던 몸뚱이, 처자, 재산을 다 그대로 놓아두고 마음만 생시로 나옵니다. 그래서 우주를 만들고 몸뚱이, 재산, 처자를 만듭니다.

 
평: 꿈속의 몸뚱이·처자·재산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놓고 나올 대상이 아니다. 청담은 ‘꿈속의 세상도 꿈밖의 세상도 마음이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다. ‘꿈이야 우리 마음이 만든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어떻게 ‘꿈밖의 세상을 우리 마음이 만든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해·달·산·강·생물을 어떻게 마음이 만드는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그런 것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꿈의 이치로 볼 때 마음이 온갖 능력을 다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이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 ‘나’입니다. 이 ‘마음’이 들어서 낮꿈, 밤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마음 나로부터 부처도 나오고 중생도 나옵니다. 지구도 태양도 나옵니다. 나 이것 외에는 현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115쪽)

 
평: 청담은 드디어 크게 속내를 드러낸다. 그에 의하면 지구도 태양도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음이 우주의 창조주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아무런 실용성이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마음을 닦아도 자기 마음이 만든다는 자연이 만들어 내는 홍수·가뭄·태풍·지진·화산폭발·산불·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불교에서는 희론(戱論)이라고 부른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체이고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고 온 누리의 진리이며 천지조화의 본체이고 신의 섭리이여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인생도 인류문화창조도 모두 이 마음의 환각으로 꿈속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122쪽)
 
영원불멸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123쪽).

평: 팔만대장경 어디에 '영원불멸의 실체인'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고 쓰여있는가? 청담은 이 '영원불멸의 실체인 마음(참나)'이 '신의 섭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무신론인 불교를 유신론으로 만들고 있다. 불교를 해·달·별 등 우주를 창조하는 창조주 하나님과 브라흐만을 섬기는 종교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크게 성공했다. 지금 한국불교는 참나불교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담 스님의 저서 <산사에 심은 뜻은>은 가히 참나경(眞我經)이라 해야할 정도로 참나사상의 진수(眞髓)와 정수(精髓)를 담은 희귀한 책이다. 이 책은, 만약 참나론이 참이라면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당연히 팔만사천 대장경에 들어가야할 위대한 경전이다. <육조단경>을 뛰어넘는 미증유의 위대한 경전이 될 것이다.

청담 스님은 드물게 보이는 인격자이셨다. 하지만 착하게 생긴 돌팔이가 악하게 생긴 돌팔이보다 더 위험하다. 이 점에서 청담 스님이 훌륭한 인격자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아론의 최고봉인 '참나라는 마설'의 유포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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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5 04:01:34
하나도 틀린 법문이 아닌 진리 그 자체를 설법하셨다
1. 매순간 순간 찰나로 돌아간다
2. 학술적으로 들어가면 찾지못하는게 불법이다.
3.참나에는 선도 악도 붙을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옥 천국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념에 마음작용일뿐 참나 그자체에는 지옥도 천국도 없다 부처님은 구더기를 제도하기위해 구더기도 되시기 때문이다
4. 힌두교의 무슨 사상 불교의 무슨 사상 다르다 틀리다 논하는건 좋다 인간은 충돌을 통해 발전하고 진화한다 고정됨이 없이 찰나 찰나 돌아가는것인데 결국 아 어 우 이는 같은 한글일뿐 한글 아님이 없다

강진사랑 2017-07-05 09:54:30
이미 무아다. 네가 상징계로 진입하여 차이와 반복의 회전목마를 타고 돌기에...
그리고, 작은소망이...강진바다를 사부로 모시겠다는 그런 소박한 소망이야말고, 너의 괴물스런 자아동일성을 해체하고 순수 무아로 가는 길임을 법보시한가. 왜냐고...오늘은 금강경 막장을 완전히 풀었기 때문에..

ㅈㅈㅈ반복 2017-07-05 09:49:14
에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아실테지만..,
지혜의 차원으로 못넘어가니...
경전지식은 인공지능이 수억배 뛰어나요..흑흑

헤헤헤 2017-07-05 09:45:22
ㅎㅎㅎ 사부님께 도전하느냐..
지혜는 수많은 개념의 연결고리를 찾는거다.
난 참나와 무아의 철학적 사상적 연결고리를 알고있지 ㅎㅎㅎ
하지 말안해준다. 왜냐고? 내마음이지...
그 자슥아...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볼

ㅈㅈㅈ 2017-07-05 09:38:39
무아를 단멸로 잘못 아는 강진바다 단멸론자님....
그냥 [지금 여기]에서 단멸하세요.
단멸론자가 무슨 작은소망, 철학, 인문학을 언급합니까?
어차피 단멸될 거 아닙니까?

"무아"를 3줄이상 설명해봐요.
당신은 무식함이 드러날까봐 쓰지도 못해요.
그냥 앞뒤도 안맞는 용어나열, 동어반복, 대학교수 언급하기,,,,
그러니까 어린아이의 옹알거림으로 들립니다.
무아를 3줄이상 설명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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