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천대천세계는 거대한 연기 시스템이다
삼라만상이 어울려 중중무진의 연기현상이 생긴다
거기 어디에도 현상을 주재하는 불변의 존재는 없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주장은 독재주의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선사들은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은 '송장은 눈이 있어도 못 본다'는 것이다.
그런 식 주장이라면, 텔레비전에 천연색 화면이 뜨게 하는 것은 전기이지 영상기술이 아니다. 왜냐 하면 전기가 끊기면 텔레비전은 멀쩡한데도 영상이 뜨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전자계산을 하는 것도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전기이다. 전기가 끊기면 멀쩡한 전자계산기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렇다. 영화가 상영되려면 영사기와 전기가 둘 다 있어야 한다. 영화상영은 둘의 연기작용이다. 사실은 영사기·필름·자막·전기 이 넷의 연기작용이다. 전자계산기가 계산을 하려면 본체(하드웨어, 몸)와 알고리듬(소프트웨어, 마음)과 전기(에너지, 생체전기)가 필요하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계산은 셋의 연기작용이다.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란 주장은, 지극히 어리석은 주장이다. (텔레비전이나 영사기가 없어도 전기만 통하면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청담·진제·송담·혜국 스님의 주장이다. (혜국 스님은, 2016.10.19일 중앙일보 인터뷰에 의하면, 수십 년 전에 수천 배 절을 하다가 '나는 없고 하는 놈이 따로 있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서 '따로 있는 놈'이란 참나(眞我 true atman 아트만)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아(無我)가 아니라 유아(有我)이다.)
이들이 '마음'이란 말로 의미하는 바는 초월적인 마음이다. 만약 (보는) 마음을 시각중추작용 즉 뇌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그 마음은 뇌가 죽으면 같이 사라지므로 즉 뇌가 살아있을 때만 작동하는 마음이 되므로, '(몸이 죽어도) 보는 마음'은 이들에게는 '초월적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참나가 본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몸을 벗고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마음이 있다'고 믿으며, ‘이 마음은 몸이 없어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뇌가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면, 뇌가 없이 본다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귀신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에 의하면, 귀신은 몸이 없어도 모든 걸 다 본다. 듣기도 한다. (귀신에게도 눈이 있는데 수정체와 망막도 있을까? 만약 있다면 빛알갱이 광자(光子)가 수정체를 통과해 망막을 때릴까? 만약 수정체와 망막이 없다면 왜 귀신얼굴에 눈이 달려있을까? 혹시 장식품일까? 귀신도 시각대상을 따라 눈을 돌리므로, 눈은 만약 장식품이라면 너무 실감나게 만들어졌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여주인공 데미 무어의 애인 귀신도 물질세계를 잘 본다. 이런 (귀신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진 게 경봉·혜국 등 큰스님들이다.
이들의 이런 사상에는 심오함이 없다. 원시적인 사상을 고등종교 불교로 포장한 것뿐이다. 포장지를 벗기면 벌거벗은 미신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걸 안 믿으면 내생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동물로 태어난다고 협박한다. 대단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이들 선사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냥 미개한 원시시대의 (정신적) 화석일 뿐이다. 산중에 살다보니 현대문명으로부터 유리되어, 감각작용의 메커니즘과 실상(實相)에 깨이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스스로 눈을 감고 지혜의 빛을 외면하며, (실상에 대한) 어둠으로 가득한 암흑세상에 사는 것이다.
'보는 놈을 찾으라'는 이들의 가르침과, '보는 놈은 참나 주인공'이라는 이들의 깨달음은 망상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다가는 망상으로 추락한다. 지금 여기서 망상지옥에 떨어진다: 문명과 야만 사이에 끼여 인지부조화로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크게 경계할 일이다. 이들이 다가오면 즉시 피할 일이다. '보는 놈'이라는 말만 들려도 자리를 옮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귀를 막을 일이다.
보는 것은 근·경·식(根境識) 삼자의 연기작용일 뿐이다: 현대적 용어로는 시각기관과 시각대상과 대뇌시각중추 삼자의 연기작용이다. 그 뒤에 불변의 주시자(注視者)는 없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현대 신경과학과 뇌과학이 증명한 바이기도 하다.
2016.10.15~21에 대구 동화사에서, 진제·대원·혜국 등 한국의 대표적인 선사 7명을 주인공으로, 간화선 대법회가 열렸다. 위에 소개한 혜국 스님의 '나는 없고 하는 놈이 따로 있다'는 주장은 이 자리에서의 발언이다. 스님은 수십 년 전의 망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다른 망상들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는 예전에 여러 법문을 통해서 ET와 외계인 등에 대해서 기괴한 이론을 발표한 적이 있다. ‘영화 ET는 실화에 기초한 영화이고 영국정부가 외계인 시체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깨달음을 얻은 후의 주장이므로, 틀림없이 '틀림없는 참나'가 한 주장일 것이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론을 힌두교적 유아론으로 뒤집다니, 간화선 대법회는 망상 대법회인가? 아니면 환망공상 대법회인가?
법회의 목적이 간화선을 활성화하고 세계화하는 하는 것이라면서, 법사들이 세상의 실상(實相,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어긋나는 법문을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자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큰스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현대과학이 밝힌 진실에 위배되는 소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조계종 대수행자 송담 스님의 '진화론 부정'과 '힌두교적 유아론'이다. 이들은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지금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종불변론(種不變論)'을 주장하고, 몸 안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참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참나가, 개·소·말·닭·돼지·까치·붕어·피래미·바퀴벌레 등, 불변의 여러 종들의 몸을 ‘이사 다니듯 들락날락한다’는 게 이들이 믿는 윤회론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실상에 정반대로 어긋나는, 이들의 깨달음은 사이비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야원에서 팔공산까지 오다 중간에서 뭔가 크게 잘못되어 그 결과 미신과 유아론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늦게 전에,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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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들이 깨달았을 때
"나는 없고"가 무아이다. 이것은 초기경 오온이 연기한 자아가 사라짐, 무아를 체득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자아가 사라진 다음에도(무아 이후) 알아채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참나이고 본래면목이고 도이고 하는 차원이다. 오온의 차원과 다른 차원, 즉 무위법으로서의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강병균은 이것을 자꾸 오온 차원으로 끌고 내려와서 참나는 유아다라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오온의 차원에서 중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한다. 부처님은 이 착각을 연기법을 통해 부숴준다. 즉, 자아라는게 허상이라는 거다.
선사들이 "나는 없고"할때 이미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무아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아가 사라지는 것을 체험만 하면(적적) 그것이 공병이라는 것이다. 자아가 사라진 다음에도 불가사의 하게 알아차리는 성성함(지혜작용)이 있다것이다.
왜 선사들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유위법 차원은 유아로 끌어 내리지 못해 안달인가.
그리고 강병균씨의 마지막 말,
"그러므로 이제, 더 늦게 전에,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에서 웃어주면 되나. 미안하지만 선불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감조차 못잡고 있는 강병균씨는 불자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가 꽤나 오래 됐다. 지금 남걱정할 일이 아니다. 딱하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