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깨달음
사이비 깨달음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6.10.31 16:13
  • 댓글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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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24.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참나

- 삼천대천세계는 거대한 연기 시스템이다
  삼라만상이 어울려 중중무진의 연기현상이 생긴다
  거기 어디에도 현상을 주재하는 불변의 존재는 없다
  그런 존재가 있다는 주장은 독재주의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선사들은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은 '송장은 눈이 있어도 못 본다'는 것이다.

그런 식 주장이라면, 텔레비전에 천연색 화면이 뜨게 하는 것은 전기이지 영상기술이 아니다. 왜냐 하면 전기가 끊기면 텔레비전은 멀쩡한데도 영상이 뜨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전자계산을 하는 것도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전기이다. 전기가 끊기면 멀쩡한 전자계산기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이렇다. 영화가 상영되려면 영사기와 전기가 둘 다 있어야 한다. 영화상영은 둘의 연기작용이다. 사실은 영사기·필름·자막·전기 이 넷의 연기작용이다. 전자계산기가 계산을 하려면 본체(하드웨어, 몸)와 알고리듬(소프트웨어, 마음)과 전기(에너지, 생체전기)가 필요하다. 이 중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계산은 셋의 연기작용이다.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란 주장은, 지극히 어리석은 주장이다. (텔레비전이나 영사기가 없어도 전기만 통하면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청담·진제·송담·혜국 스님의 주장이다. (혜국 스님은, 2016.10.19일 중앙일보 인터뷰에 의하면, 수십 년 전에 수천 배 절을 하다가 '나는 없고 하는 놈이 따로 있다'고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서 '따로 있는 놈'이란 참나(眞我 true atman 아트만)이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아(無我)가 아니라 유아(有我)이다.)

이들이 '마음'이란 말로 의미하는 바는 초월적인 마음이다. 만약 (보는) 마음을 시각중추작용 즉 뇌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그 마음은 뇌가 죽으면 같이 사라지므로 즉 뇌가 살아있을 때만 작동하는 마음이 되므로, '(몸이 죽어도) 보는 마음'은 이들에게는 '초월적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참나가 본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들은 '몸을 벗고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마음이 있다'고 믿으며, ‘이 마음은 몸이 없어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뇌가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면, 뇌가 없이 본다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당연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귀신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에 의하면, 귀신은 몸이 없어도 모든 걸 다 본다. 듣기도 한다. (귀신에게도 눈이 있는데 수정체와 망막도 있을까? 만약 있다면 빛알갱이 광자(光子)가 수정체를 통과해 망막을 때릴까? 만약 수정체와 망막이 없다면 왜 귀신얼굴에 눈이 달려있을까? 혹시 장식품일까? 귀신도 시각대상을 따라 눈을 돌리므로, 눈은 만약 장식품이라면 너무 실감나게 만들어졌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여주인공 데미 무어의 애인 귀신도 물질세계를 잘 본다. 이런 (귀신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진 게 경봉·혜국 등 큰스님들이다.

이들의 이런 사상에는 심오함이 없다. 원시적인 사상을 고등종교 불교로 포장한 것뿐이다. 포장지를 벗기면 벌거벗은 미신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걸 안 믿으면 내생에 지옥에 떨어지거나 동물로 태어난다고 협박한다. 대단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이들 선사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냥 미개한 원시시대의 (정신적) 화석일 뿐이다. 산중에 살다보니 현대문명으로부터 유리되어, 감각작용의 메커니즘과 실상(實相)에 깨이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스스로 눈을 감고 지혜의 빛을 외면하며, (실상에 대한) 어둠으로 가득한 암흑세상에 사는 것이다.

'보는 놈을 찾으라'는 이들의 가르침과, '보는 놈은 참나 주인공'이라는 이들의 깨달음은 망상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다가는 망상으로 추락한다. 지금 여기서 망상지옥에 떨어진다: 문명과 야만 사이에 끼여 인지부조화로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크게 경계할 일이다. 이들이 다가오면 즉시 피할 일이다. '보는 놈'이라는 말만 들려도 자리를 옮기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귀를 막을 일이다.

보는 것은 근·경·식(根境識) 삼자의 연기작용일 뿐이다: 현대적 용어로는 시각기관과 시각대상과 대뇌시각중추 삼자의 연기작용이다. 그 뒤에 불변의 주시자(注視者)는 없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현대 신경과학과 뇌과학이 증명한 바이기도 하다.

2016.10.15~21에 대구 동화사에서, 진제·대원·혜국 등 한국의 대표적인 선사 7명을 주인공으로, 간화선 대법회가 열렸다. 위에 소개한 혜국 스님의 '나는 없고 하는 놈이 따로 있다'는 주장은 이 자리에서의 발언이다. 스님은 수십 년 전의 망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다른 망상들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는 예전에 여러 법문을 통해서 ET와 외계인 등에 대해서 기괴한 이론을 발표한 적이 있다. ‘영화 ET는 실화에 기초한 영화이고 영국정부가 외계인 시체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깨달음을 얻은 후의 주장이므로, 틀림없이 '틀림없는 참나'가 한 주장일 것이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론을 힌두교적 유아론으로 뒤집다니, 간화선 대법회는 망상 대법회인가? 아니면 환망공상 대법회인가?

법회의 목적이 간화선을 활성화하고 세계화하는 하는 것이라면서, 법사들이 세상의 실상(實相,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어긋나는 법문을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자 전도몽상(顚倒夢想)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큰스님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는, 이분들이 현대과학이 밝힌 진실에 위배되는 소리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조계종 대수행자 송담 스님의 '진화론 부정'과 '힌두교적 유아론'이다. 이들은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지금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종불변론(種不變論)'을 주장하고, 몸 안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참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참나가, 개·소·말·닭·돼지·까치·붕어·피래미·바퀴벌레 등, 불변의 여러 종들의 몸을 ‘이사 다니듯 들락날락한다’는 게 이들이 믿는 윤회론이다.) 이와 같이 생명체의 실상에 정반대로 어긋나는, 이들의 깨달음은 사이비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야원에서 팔공산까지 오다 중간에서 뭔가 크게 잘못되어 그 결과 미신과 유아론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늦게 전에,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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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다 2016-10-31 17:44:24
강병균 이사람 진짜 구제불능이다.
선사들이 깨달았을 때
"나는 없고"가 무아이다. 이것은 초기경 오온이 연기한 자아가 사라짐, 무아를 체득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자아가 사라진 다음에도(무아 이후) 알아채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참나이고 본래면목이고 도이고 하는 차원이다. 오온의 차원과 다른 차원, 즉 무위법으로서의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강병균은 이것을 자꾸 오온 차원으로 끌고 내려와서 참나는 유아다라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오온의 차원에서 중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고 착각한다. 부처님은 이 착각을 연기법을 통해 부숴준다. 즉, 자아라는게 허상이라는 거다.

선사들이 "나는 없고"할때 이미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무아를 깨쳤다는 말이고 자아가 사라지는 것을 체험만 하면(적적) 그것이 공병이라는 것이다. 자아가 사라진 다음에도 불가사의 하게 알아차리는 성성함(지혜작용)이 있다것이다.

왜 선사들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유위법 차원은 유아로 끌어 내리지 못해 안달인가.

그리고 강병균씨의 마지막 말,
"그러므로 이제, 더 늦게 전에, 세계인들의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깨달음에 대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에서 웃어주면 되나. 미안하지만 선불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감조차 못잡고 있는 강병균씨는 불자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가 꽤나 오래 됐다. 지금 남걱정할 일이 아니다. 딱하다 진짜.

궁금타 2016-10-31 18:12:05
한국 선불교의 선사는 열반을 얻었을까, 못 얻었을까?

한국의 선사들은 열반을 얻으라고 할까, 참나를 얻으라고 할까?

한국 선사들이 찾으라는 그 참나는 열반일까, 범아일여의 착각일까?

한국의 선사들은 부처님을 따라, 부처님을 넘어선 것일까?

아님 부처님을 따르지 않고도, 또 다른 길로 가서 부처님을 넘었다고 그러는 걸까?

강병균은 사이비 불자 2016-11-05 16:55:24
12연기.

① 무명(無明), ② 행(行), ③ 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처(六處),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

마지막 노사이후 다시 1번 무명부터 반복된다는게 불교의 윤회관이다.

*연기법=인과법=12연기=윤회

이 윤회의 순환고리를 끊어내야 삼사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게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며 수행으로 무명을 끊어내면 연기적으로 이어지는 나머지 행들도 수차적으로 사라지게 되어 해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강병균은 윤회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 얘기는 12연기도 없다는 주장과 같다.
윤회가 없다라는 주장이 12연기도 부정하는 것임을 강병균은 모르는 것일까? 모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윤회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연기법(12연기)을 인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연기법 따로 윤회 따로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병균은 윤회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12번 항목 노사 이후 아무것도 없다. 즉, 단멸론자이다. 살아생전 쌓은 카르마가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거 자체가 없다는게 강병균의 주장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연기법이자 인과법은 강병균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런 자가 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이비 불자의 주장에 동조하여 불교를 부정하는 무식한 무리들이 스스로를 불자라고 칭할 수 있을까. 불가사의하다.

참나=열반 2016-11-06 22:09:07
무지와 편견을 바탕으로 한 불교해석 그리고 그것에 기된 억지주장에 대해 욕처먹는 것은 당연하다. 강병균의 글만해도 전혀 비불교적이고 심지어 그는 윤회를 부정하여 초기불교 전체의 내용을 부정한다. 아라한들이 깨닫고 나서 다시는 윤회하지 않음을 안다고 선언하는 것과 12연기(연기법이자 인과법이자 윤회)를 부정한다. 강병균은 윤회를 부정하고 12연기를 인정하는 듯한 액션을 취하는데 그 자체가 이미 무지의 소산이다. 12연기의 반복이 윤회이고 12연기중 갈애를 멈추는 수행과 무명을 끊는 수행을 동시에 해서 12연기의 순환고리를 끊어내어 윤회를 벗어나자는게 불교의 핵심과제다.

초기불교가 상기 내용이라면 대승불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단절하자는 것도 아니고 초기불교가 목표한 아라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살행을 하자는 것이 목표여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아라한과를 얻어 윤회를 벗어나는 것 보다 타인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중생구제가 수행의 목표여야만 인간이 사는 곳이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관점이다. 석존이 깨닫고(아라한이 되고) 나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도전역을 돌면 다른이들을 구제하는 보살행을 했듯이. 이런 대승불교가 뭐가 그리 잘못을 했으며 뭐 그리 악마적 행위를 했다고 노발대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꽃이라 불린다. 대승불교 중에서 대승선 수행법의 하나로 중국에서 피어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다. 참나가 진짜 유아를 의미한다면 최소한 선어록에서 유아를 지칭한다는 근거라도 대야만 한다. 하지만 강병균류들은 그런 근거도 대지 않고 자기들 관점에 의지하여 참나를 유아론으로 매도하였다. 이런 무식한 짓을 하니 욕처먹는것이다. 단 한번도 선어록에 근거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선어록을 보면 참나와 동일어로 주인공이 있고 무일물이 있고 본래면목도 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을 보면 선어록들도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나가 유아론이면 선어록에서 같은 뜻이 무일물(한 물건도 아니다) 또한 유아론이 되어야 한다. 그러데 그는 참나는 유아론이라서 틀리고 무일물은 유아론이 아니라고 한다. 이 무슨 개똥같은 논리인가.

강병균이 비방해 마지 않는 혜국스님은 불교닷컴 기사에서도 테라와다 승려와의 대담에서 참나가 무아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까지 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아이후의 단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했다. 그런데 강병균 눈에는 그런 인터뷰가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당사자인 혜국스님이 무아는 불교근간이고 당연하다는 말씀하고 있는데 왜 강병균은 듣지를 못하고 선사들을 매도하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중생; 거친 생각들+거친 감정들+(알아차림)
1선정; 대상(호흡,화두)에 대한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 희열+은은한 즐거움+ 알아차림
2선정; 희열+은은한 즐거움+알아차림
3선정; 은은한 즐거움+ 알아차림
4선정; 알아차림(알아차림을 유지한 채 사유를 할 수 있음)

중생들은 거친 생각들을 자아라고 여긴다. 희로애락하는 자신의 감정을 실체화 하여 사유한다. 알아차림을 인지 하지 못한다. 계속 생각에 의해 질질 끌려다닌

수발때 2016-11-07 10:49:49
요아래 ...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고 우주가 없어진 후에도 있는 상주불변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게 유아가 아니면 뭐냐? 부처님이 그리 주장하신 적 있는가? //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참나 = 상주불변의 존재 = 유아]라고 주장한다.
무식의 극치이다. 이건 힌두교식 해석인데 자꾸 불교의 참나라고 똥칠한다.

불교의 無我는 중도의 무아이다.
[我]에 대한 극단적인 생각<有我, 非(無)我>을 없애라[無]라는 뜻이다.
즉 유아도 버리고, 비아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럴때 참나가 드러난다.

[ 여래는 두가지 극단에 의지하지 않고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라는 위대한 문구가 초기경전에 나온다.

tip :불교공부할때 항상 中道를 유념하면서 공부할 것.
諸行無常에서의 無常도 중도의 無常이다. 有常의 반대인 無常이 아니라,
(유상 무상) 常에 대한 두가지를 없애라[無]는 뜻이다.
불교에서 無는 {두가지를 없애라}는 뜻이 있음을 알아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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