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대한 오해
분노에 대한 오해
  •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 승인 2016.07.12 17:25
  • 댓글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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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마성 스님의 摩聖斷想-16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분노(忿怒․憤怒)’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성냄’이라고 한다. 불교도들은 분노라는 말보다 ‘진에(瞋恚)’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져 있다. 진에는 열반을 증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 번뇌[三毒] 가운데 하나이다. 삼독은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를 말한다. 줄여서 탐(貪)․진(瞋)․치(癡)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마음에 남아있다면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뜻에 어그러짐에 대하여 성내는 일’이 진에의 참뜻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노여움은 수행에 장애가 됨은 분명하다. 이러한 내면의 노여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욕(忍辱)’이라고 한다. 인욕이란 자기의 마음에 거슬리는 일에 대하여 노여워하지 않고 참고 견딤. 모욕을 참고 노여움을 일으키지 않음. 참고 견디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 마음을 안정시키고 성내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분노는 내적인가 외적인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분노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하여 불교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좁은 소견[短見]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이익[私益]이 아닌 공공의 이익[公益]을 위한 분노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공적인 분노는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사실 재가자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완전히 제거하여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바른생활을 통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재가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한다면, 불교도로서의 사명을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파괴하는 불의(不義)가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자행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올바른 불자라면 반드시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

불의는 모든 사회악(社會惡)의 근원이다. 사회악은 공공의 적일뿐만 아니라 불교의 적이기도 하다.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부처님의 나라, 즉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 지구상에는 온갖 불의가 판을 치고 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도 없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기본적인 권리[人權]는 그냥 얻게 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불의에 대한 분노로 인해 진화해 왔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의 상관이나 스승이라 할지라도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만일 이들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면, 불의를 보고도 못 본체 하라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사회의 잘못된 제도나 관행은 계속적으로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고위 공무원이 민중을 개나 돼지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신분제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의 발언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국민이 아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과 같은 국토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국가의 체제에 순종하도록 길들어져 왔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반기를 들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한국불교는 정상이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불교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불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는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 답을 찾기 어렵다.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다. 한국불교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출가자일지라도 수행을 잠시 멈추더라도 불교계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려고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권력을 가진 집단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제거하려고 한다. 일부 승려들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한다고 ‘해종언론’이라는 낙인을 찍어 불교언론을 탄압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행위를 보고도 분노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교도라고 말할 수 없다. 불의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그래도 계속 무임승차할 것인가. 불의에 분노하라

/ 마성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된 관심 분야는 불교사회사상이다. 현실을 떠난 가르침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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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은-天人하늘가는福 2016-08-07 14:08:04
불법은 불자들에게
악을 분멸하여 지적하고 나무라고 善[선]은 권장하여 하늘로가는 福
이렇게 악을 징계하여 주고,,,/ 선은 추구하는,,, 수행을 하여야 하는게
불자들의 의무이자 선행의 과보!

악의 행은 나쁜것을 가리지 않고 내버려 두거나하여
스스로 그대로 내버려두고,,,나쁜행 악행의 맛에 빠지고,,,
善[선]은 게을러 하지 못하여 스스로 하늘로 가지 못하는 惡[악인, 악종자들~]행의 과보!


권선징악은-人天 福 ,사람과 하늘로 가는 福이 되는데

人天의 福, 人 天[하늘]으로 가지 말라하면 그럼 어디로 가라고?

지옥?..아귀..걸신들 속으로 아하~
개나소나 불성 다~ 다있어니 축생으로-여하튼 어디던
나쁜자들을 만드는 지옥수행에 방해가 되니 이런 거짓도 가리지 말고 잘못도 가리지 말라하는
지옥등,하천세계로 가게하는 스님들은 속지말고 사실은 모두 진리와는 다른삶으로 추구하는 모두 추악한자들!

그래서 수행에 방해가되고 수행자 의무이자 도리가 아니라고 하는 법은 모두 거짓이며 잘못된 불법
이들은 바로 하늘로 가는 길을 원척적으로 막는자들이며 막는 법

이와 같이 들었다 2016-08-05 17:50:59
이와 같이 들었다.

거짓말하지 말라
"나는 이 중생들 가운데 한 가지 법처럼,
그것을 많이 닦아 행하면 인간과 천상의 복을 받고 열반을 증득하게 되지 못하는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 한 가지 법이란 이른바 거짓말하지 않는

,,,

<중략>
,,,



어리석고 미혹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고서는 . ,,인간과 천상의 복을 받고 열반을 증득하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법인가. 첫째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일체대상,,,,,
그다음으로 ,,사랑하고 즐겨워하는 일체대상에서,,

,,,

<중략>
,,,

나는 지금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것과,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을 말하고,
다시 미워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과 사랑하는 이와 만나는 것을 말하였다. 여기에는 무슨 뜻이 있고 무슨 복 인연이 있는가."

...

<중략>
...
또 때에 따라서,,
사랑할때는 사랑한다 말 할 줄 알아야하며 싫은 것은 싫다고 말 할 줄 알아야 하며
선행과 악행을 알아야하며 아닌것은 아니라고 할 줄 알아야하며
가질것과 버릴것을 때에 따라서 행 하여야 하며
사랑과 미움
좋음과 나쁨
칭찬과 나무람등의 모든 것에서
일체의 옳고그름을 구분하여 지적하고 행 할 줄 알아야 하며
이렇게 알고 많이 닦아 행하면 반드시 인간과 천상의 복을 받고 열반을 증득하게 될것이다

도연 2016-07-29 05:46:00
너무나 과분한 말씀을 주셔서 송구스럽습니다.
비로자나불의 가피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_()_

도연 2016-07-29 05:22:12
그분이 주장이 대승불교를 범아일여 사상과 같다는 취지로 보아서 그렇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아래의 글을 올립니다.

제가 독해력이 부족하다고 하도 꾸중을 들어서 자신이 없는데, 그분의 취지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냥 윤홍식씨의 참나=열반=실체 라는 주장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연 2016-07-29 05:18:35
1. "참나=열반=실체"라는 오해

윤홍식씨의 참나는 5수음에서 나[我]를 보고서는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일체를 "모른다."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실체인 나"로 잘못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상견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윤홍식씨는 종이 컵을 덮고있던 손을 치우며 컵 안의 허공과 컵 밖의 허공이 같다고 합니다.
지당한 말씀인데, 종이 컵 안의 허공을 실체라고 하기에 문제입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종이 컵마다 허공인 실체가 하나씩 들어있고, 그 모든 컵 밖에 실체인 허공이 또 있는데, 이 두 허공이 결국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정확히 범아일여 사상입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인 실체가 아니라면, 두 개의 별개인 실체는 마치 기름과 물처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컵 안의 허공이나 컵 밖의 허공이나 모두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컵 안과 밖의 허공이 하나인, 전체로서의 허공이 실체인 궁극적 실재로서, 곧 비로자나불입니다.
이 하나인 자리에 이르러야 6바라밀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윤홍식씨의 열반이란 다른 컵과의 상대적인 관계를 외면하고 자신의 컵 안에 들어앉은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컵 밖의 허공과 하나가 되려면 "컵 안의 허공이 '나'"라는 망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열반은 "나"라는 망견을 버려서 전체인 실체 속에 망령된 "나"를 해소시켜버린 것입니다.
소승의 열반에서 자비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자비가 존재하는 바 현상계를 거부하여 떠났기 때문입니다.
대승의 불자처럼 이 현상계에 비로자나불의 본원(本願)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면, 그를 통해 비로자나불의 자비와 6바라밀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윤홍식씨의 "참나=열반"처럼 일체를 "모른다"하고 외면한 자리에서는 6바라밀이고 성령의 열매고 하는 것이 저절로 흘러나올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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