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 체결(1876)과 일본 불교의 조선 진출
(1) 불교 전래 후 조선말까지 불교의 흐름
372년(고구려 기준)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후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1300년이 흐르며 불교는 본래의 가르침이 변질되고 대중의 평등과 평화보다는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앞장서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여기에 성직자인 승려들이 앞장서서 말법의 시대를 엽니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지배이데올로기를 타락한 불교에서 유교로 대체하고 신생국가의 선명한 명분을 위해 강력한 억불정책을 시행합니다. 1406년 태조 이성계는 11개 종파, 242개 사찰만 남기고 나머지 사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합니다. 1407년엔 11개 종파를 7개 종파로 통합합니다. 1424년 세종은 7개 종파를 선교양종(선종 18개, 교종 18개 총 36개 사찰) 2개로 줄이고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지합니다. 1511년 중종은 경국대전에 있는 승려의 출가를 명시한 도승조를 삭제함으로 교종은 사라지고 선종만 남아 명맥을 유지합니다.(아흐마드 네이버 블러그, 조선왕조의 불교탄압사), (마도로스 네이버 까페, 교정&선종)
1392년부터 1902년까지 510년간 이어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사찰은 도시에서 밀려나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또한 봉건신분제 사회에서 승려의 지위는 사회지도층에서 천민으로 전락해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승려사회에도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이 출현합니다.
이능화(李能和)가 쓴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 「이판사판사찰내정」에 의하면 “이판(理判)은 참선, 강론, 수행, 홍법, 포교를 하는. 속칭 공부승(工夫僧)을 뜻하고 사판(事判)은 생산에 종사해 절의 살림을 꾸려나가나 사무행정을 해나가는 승려이다. 산림승(山林僧)이라고도 한다.(‘집에서 살림을 한다’라는 말의 어원) 이판과 사판은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 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어질 수 없다.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이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청허(淸虛)·부휴(浮休)·벽암(碧巖)·백곡(百谷) 스님 등의 대사들이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라고 설명합니다.
후대에 들며 승려의 종류를 뜻하는 ‘이판사판’은 ‘아수라장, 아비규환, 야단법석’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마지막 궁지’ 또는 ‘끝장’이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는 조선사회에서 승려의 위치와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불교의 쇄락과 함께 승려의 숫자도 급감하게 되고 후대로 갈수록 이판승은 골방으로 밀리고 사판승이 사찰에서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렇게 쇠락해 가던 불교는 천민과 농민 등 당시 하류 민중들 틈에 섞이게 되고 민중들은 과거 경배의 대상이었던 승려들을 통해 불교의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은 ‘평등(平等)’과 ‘정토(淨土)’라는 세상의 구현입니다. 당시 민중들은 지배계급의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과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이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민중들은 국왕의 선정으로 태평성대를 누리는 삶이나 신에 귀의함을 통해 다음 세상에 고통 받지 않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아닌 인민(人民) 세상의 주체로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는 진리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승려들의 타락이 낳은 표본 서울 원각사지(圓覺寺址)>
원각사지(圓覺寺址)는 종교의 타락이 국가권력에 이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에 불교인이라면 그 변천과정을 꼭 알아야 합니다.
서울 한복판 앞에는 청계천, 뒤에는 창경궁, 옆에는 종묘를 두고 위치한 원각사(圓覺寺)는 원래 흥복사(興福寺)란 절로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고찰(古刹)입니다. 조선 태조 때 선종의 한 종파인 조계종 본사(曹溪宗 本寺)로 지정되었고 1464년(세조 10) 세조는 홍복사의 터를 넓혀서 본당인 대광명전을 중앙에 두고 본당 뒤뜰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지어 대장경을 보관하고 본당 왼쪽에는 선당(禪堂)을 설치합니다. 문으로는 적광지문(寂光之門)·반야문·해탈문 등이 있었고 대종(大鐘)을 걸어둔 법뢰각(法雷閣) 동쪽에는 못을 만들고 서쪽에는 꽃밭을 만들고 이름을 현재의 원각사(圓覺寺)로 개칭합니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원각사는 폐사시키고 장악원(掌樂院) 또는 연방원(聯芳院)으로 개명하고 건물은 기생들의 숙소인 기생방(妓生房)으로 사용합니다. 이로 인해 원각사 주변은 기생이 있는 술집이 밀집하게 되고 일제 강점기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급요정이 위치합니다.
1507년(중종 2)에 대비(문정왕후)의 전교로 다시 사찰로 전환하려 하자 조신(朝臣)들의 맹렬한 반대 운동으로 좌절됩니다.
건물은 1514년(중종 9)까지도 상당히 잔존했었는데 1519년(중종 14) 혹은 1554년(명종 9) 대화재(大火災)와 1514년(중종 9) 폐사의 재목을 궁중 공용건물 영선(營繕)에 사용함으로써 1519년(중종 14)에는 건물의 태반이 없어집니다.
보신각종이라 불리는 원각사 대종(보물 2호)은 1536년 남대문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 직후 1597년 종각이 불타고 걸려 있던 종이 훼손되자 현재의 종각을 다시 짓고 지금의 명칭인 보신각으로 이름하고 남대문에 걸려 있던 원각사 대종을 보신각으로 옮겨와 근래까지 재야의 종으로 사용됩니다.
1897년(광무 1) 고종의 명에 의해 영국인 고문 J.M.브라운이 설계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꾸며져 파고다공원(The Pagoda park)으로 개장합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됩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2호)·대원각사비(보물 3호)·앙부일구(仰釜日晷:해시계) 받침돌(臺石) 등의 문화재와, 1980년에 제작 ·건립한 3·1운동기념탑·3·1운동벽화·의암(義庵) 손병희 동상(孫秉熙銅像:1966년 건립)·한용운(韓龍雲) 기념비(1967년 건립) 등이 있습니다. 1992년 지금의 탑골공원으로 개명됩니다.
이렇듯 원각사지는 종교가 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국가권력이 흥망의 칼자루를 쥐고 흔들어 그 자취를 말살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1913년 11월 2일 매일신문의 기사를 보면 탑골공원 주변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탑골공원에서 시곡 기생의 가무야 말고 참 잘 들고 하옵디다. 어찌하여 맵시들도 그렇게 얌전하고 재주들도 그렇게 잘 배웠는지 그 중에 조 아무개는 더 능란하고 잘 하던걸. 우리가 소년시절에는 화류계로 돌아다녔지만 그렇게 일일이 재주를 잘 배운 기생들은 참 처음 보았어.(노풍류량)” 현재도 탑골공원은 가난한 노인들이 성매매 대상을 찾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이 매주 목요일 양심수석방 촉구집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2) 18세기 불교운동과 동학농민정쟁
18세기 상품화폐시장의 발전과 함께 봉건적 착취도 극에 달하자 민중들과 불교가 결합한 새로운 혁명운동이 조선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납니다. 1811년 관서지방농민전쟁(홍경래의 난), 1813년 백동원·이회식·백태진의 무장봉기, 제주도 양제해의 무장봉기, 1819년 박형서·정채상의 무장모의, 1850년 유홍렴의 구월산봉기, 1862년 임술민난, 1867년 김수길·승려 순석의 명화적 사건, 1869년 정덕기·윤내형의 광양봉기, 1870년 지리산·영해·문경 봉기 및 김응룡·승려 성탁의 남조선왕국 모의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특히 임술민란의 경우 전국 71개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일러난 사건으로 동학혁명 이전 최대의 민중혁명운동입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봉건사회의 차별을 거부하고 사람과 사람이 평등한 이상사회로 미륵의 용화세상을 제시합니다. 18세기 민중들의 저항과 평등한 세상을 구현하려는 운동은 종교적으로는 동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종교운동과 더불어 동학농민전쟁이란 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건국운동으로 나타납니다.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해 3개월 만에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에서 관군의 반격을 받아 500여 명의 전사자를 냅니다. 동학농민군에 당황한 고종과 명성황후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자 일본도 군을 조선에 파견하고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을 벌인다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동학농민군은 12개 조항의 정치개혁안을 조선정부에 제시합니다. 청군과 일본군의 대치 속에 내전 종식을 원한 조선정부도 이를 수용해 동학농민군과 휴전에 들어갑니다.
당시 동학농민군과 조선정부가 합의한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숙원을 없애고 공동으로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 처리할 것,
③ 횡포한 부호를 엄중히 처벌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게 한 평양립(平壤笠)을 폐지할 것,
⑦ 청상과부의 재혼을 허가할 것,
⑧ 무명의 잡부금을 일절 폐지할 것,
⑨ 관리 채용에 있어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⑩ 일본과 상통하는 자를 엄벌할 것,
⑪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면제할 것,
⑫ 토지는 균등하게 분작(分作)하게 할 것 등입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군과 동시에 폐정개혁안을 시행을 위해 전라도 53개 군에 집강소(執綱所)라는 민정기관을 설치합니다. 조선정부도 폐정개혁안의 시행을 위해 군국기무처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약 208건의 법령을 의결·공포합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국 대사가 본국에 보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교보고서’에는 군국기무처가 즉시 실시해야 하는 주요 개선사항으로 18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14번째에 승니(僧尼)의 도성출입금지에 대한 해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불교신문 2338호, 김경집)
동학농민전쟁은 근대화 시기 민중 스스로 평등 사회를 건설하려는 건국운동이었고 여기에 불교도와 승려들이 적극 참여하게 됩니다.
동학은 3개의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① 남접(전라남북도 중심,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이 최고지도자), ② 북접(충북 보은 중심, 법보 또는 좌포로 불림. 교주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손천민이 최고 지도자), ③ 호서남접(청주와 충남 중심, 서포로 불림,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입니다. 이 중 서포의 지도자 서장옥(서인주)은 승려로 교주 최제우 사후 온건파인 최시형과 달리 동학의 2인자로 교주신원운동인 1892년 11월 삼례집회를 주도하며 한양으로 진격해 간당숙청과 정부개혁을 주장하고, 한양에 있는 미국선교사, 일본상인들에게 ‘1893년 3월 7일까지 떠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계시합니다. 그는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김덕명을 제자로 둡니다.
임혜봉이 쓴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장면』에는 동학에 가담한 승려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893년 2월의 집회 때 남접은 북접이 주최하는 보은 집회의 동정을 살피려고 긍엽(亘葉)이라는 승려를 파견하였고, 원평의 남접과 서포의 연합 집회에는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 호남 지방 승려들이 참가합니다. 그밖에 충청남도 사찰의 승려들도 서포에 가담해 동학을 이끌게 됩니다.(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동학농민전쟁 패전으로 18세기 불교는 혁신 지도층의 상실로 인한 퇴보와 혁명에서 신앙에 국한한 활동으로 이어져 이후 출현하는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집안은 현대사에 3명의 대통령을 배출합니다.
1894년 토포사인 윤영열(안성군수,육군참장)은 별군관으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전한다. 윤영열의 아들 윤치소(중추원 참의)도 천안지역에서 300명의 동학농민군 토벌의병을 조직해 활동했고 이후 대지주 및 사업가로 변신한다. 윤치소는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아버지다.
윤웅열(남작, 군무·법무대신)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의 아들 윤치호는(중추원고문)은 개신교의 거두로 일제 강점기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고 해방 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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