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 스님] 붓다의 가없는 눈물이여
[현진 스님] 붓다의 가없는 눈물이여
  • 현진 스님/여의도포교원장
  • 승인 2015.11.23 15: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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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멀리 동구 밖까지 나와 자리를 펴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누가 오기에 이렇게 직접 마중하실까” 하고 묻는 제자들에 훗날 부처님께서는 “법과 승단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제자를 맞이함에 소홀 할 수 없다.”며 조용히 이르신다.

한참을 기다림에 나타난 한 나그네가 다가오자 붓다는 일어나서 “나의 제자여 참 잘 오셨소, 나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하시며 자리를 마련하고 옆에 앉게 하였다.

그가 마하가섭이다. 붓다의 예언대로 그는 두타제일 수행인이 되어 훗날 승단을 이끌며 경전을 결집하고 불법을 전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항상 대중의 말미에 앉고, 무덤이나 숲속에서 잠을 자며, 겸손과 낮춤으로 자유를 얻고, 욕심의 억제로 투쟁을 쉬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버린 ‘두타의 제일’ 수행자가 되었다.

오늘 나는 바보처럼 그런 수행자를 한강물 유유한 달빛 속에서 찾고 있는 멍텅구리가 되어 있다.

“무엇을 먹고 입을까 무엇을 가질 것인가를 근심하지 말고 법에 의해 걸식함이 해탈을 구하는 길이나니,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청정을 구하라. 그것이 해탈이나니 버림의 밥을 먹는 자에게만 오느니라”

나는 그런 가섭의 물속 그림자에 깜짝 놀라며 승가의 그림자를 밟는다.

작금의 우리승가, 승가의 본분사를 짊어지고 붓다의 소명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솔직하게 말하여 참으로 참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으며 하늘을 향하여 부끄럽고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오늘의 우리승가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쿠살라(akusala, 해롭다, 유익하지 않다) 같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끌어 주어야할 제가불자를 향하여, 공경해야할 승가를 향하여 부끄러운 치부를 알몸으로 드러내며 한 치도 물러남이 없이 훼종(毁宗)을 주고받는다. 비승가적 잘못을 비판하며 진실을 규명하려는 언론에는 훼불(毁佛)이라는 재갈을 물린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독재의 북한, 김정은의 나라가 아니다. 국민이 주인으로 언로가 열린 민주시민의 나라다.

언론이 누가 재갈을 물린다하여 재갈을 물고 있는 바보언론이 있는가? 허물을 드러내고 국민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시대이다. 그리할 때 오히려 존경과 신뢰 믿음을 얻는 소통의 시대이다.

승가와 재가가 붓다의 한 수레를 타고 소통 없이 발톱을 숨기며 으르렁 법정고소를 이루니, 이는 우리 승단의 참괴의 정점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아니한가? 인도의 불교 멸망이 타종교의 침략이 아닌 승·속의 소통 부재였음을 승단은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의 행동과 말 한마디는 수많은 군중을 웃고 울리는 감동이 있다고 하였다.

밥 한술 뜰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스티븐 호킹이 외모가 출중하여 지구촌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는가! 그가 보인 한마디 말, “이보다 더한 것을 어찌 더 바라리오” 라는 한마디가 지구촌을 울렸다. 불행하게도 우리 조계승단에는 어른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격조 있게 고준함으로 대중을 인도하며 잘못을 꾸짖고 바로잡는 눈 푸른 사자의 참 선지식이 없음에 자괴감이 든다.

나는 나의 일생에서 오늘을 잊지 못하리라. 범계니 절도니 하며 승가의 비중 있는 사건들을 일 년여가 지나도록 집행부는 갈마하지 못하고 방치하며 이전투구로 학교는 학교대로 절집은 절집대로 학생들은 학생대로 아픔과 원망과 고통이 흐르는 비승가적 강물에 비판을 가했다하여 훼종으로 진정 당했다.

종법을 지켜야 하기에 비구수계 46년의 한 길 걸음 속에 호법부 등원 요구에 진정조사를 받았다. 무겁게 걸어 나오면서 “나는 바보야”라는 김수환 추기경과 버림의 수행자 마하가섭의 얼굴이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는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나의 힘없고 연약함의 고통스런 연민의 눈물이다. 오만과 독선의 날개를 푸닥거리는 승가 일면의 어두운 눈물 이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비승가에 대한 분심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누구의 눈물도 아닌 내 존엄의 사랑 붓다의 동정심의 눈물이었다.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 종교는 생명력을 잃는다. 과연 우리 승가는 작금 우리 사회에 감동을 주고 대중을 울리는 생명력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불교사회 연구소의 발표대로 백분의 십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우리 승가는 역할을 잃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고준한 주장자 법장을 들어 외쳐도 감동의 울림보다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우리 승가에 반드시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이다.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나 진실하지 못한 말은 아름답다”고 노자는 말한다.

때때로 설법단상을 보라. “욕심을 끊어라” “해탈을 구하는데 진력하라”고 아름답게 소리친다. “불사의 보시는 극락의 지름길”이라고 진실 없는 말에 목줄을 세운다. 그런 그들이 단상을 내려오면 세속의 권력보다 더한 권력을 탐하고 속진의 욕심보다 더한 욕심을 탐닉하는 굶주린 ㅇㅇ의 모습이다. 그것이 일부의 모습일지라도 그러한 승가에 누가 믿음으로 따르며 신뢰하고 감동을 먹겠는가?

지금의 우리승가 1700년 유산의 유·무형의 귀중한 붓다의 자산을 불태우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붓다께서 물려준 자산을 우리가 거두고, 다시 씨를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붓다로 하여 살아야하는 우리 승가-붓다의 알곡을 거두기 위해 뼈를 깍는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붓다가 내려주신 성찬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승가는 어떤 경우라도 상처나고 힘들고 아픔의 중생을 품어 씻겨야 하는 샘물이 되어야 한다.

“중생의 아픔이 없다면 붓다의 대비도 없다”.
“중생이 없다면 위없는 보살도 깨달음도 없다”고 보현행원품은 가르치고 있다.
붓다의 본원력은 중생과의 시비가 아닌 다함없는 섬김이요 품어 안는 진솔한 서비스다.

내 상처를 어루만지기도 힘든 그릇 이지만 손 모아 빌어본다.
“붓다여 우리의 상가를 굽어 살피소서”
“두타의 마하가섭, 똥을 치우는 나이다이를 비추어 권력과 명예의 지옥 줄을 내려서 버리게 하소서.”

이제라도 사람들을 찾아서 무아의 자비방사를 내품는 지순한 순백의 상가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때에 우리 승가는 대중의 환희의 부름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때에 붓다의 눈물은 중생의 가없는 기쁨의 눈물이 되리라.

※ 저를 안아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저는 두타행이 편하고 즐거울 뿐입니다.
저는 분소의 누더기를 입어도
까칠한 하루 한끼의 밥을 먹어도
무덤 같은 척박한 곳의 잠자리도
부족이 없이 행복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대로가 저의 깨달음입니다.  / (마하가섭의 수행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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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 2015-11-23 15:32:28
죄송합니다
스님
내일엔 그래도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까요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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