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 가면 갑자기, 인간이 강장동물이라는 사실이 상기된다. 입에서 항문까지 구멍이 뚫린 생물! 뷔페식당에 가면 더 잘 알게 된다. (산더미같이 음식을 쌓아놓고 어느 놈을 먼저 처치할까 노려본다. 그러다 필이 꽂히면 그놈에게 금속막대기를 들이댄다.)
입으로 어마어마하게 외계물질이 들어간다. 저 물질들이 모두 몸 안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어마어마한 물질이 몸을 떠날 것이다. 자연과 환경을 오염시키면서. 여기에는 남녀노소 미추(美醜)의 구별이 없다.
특히 미인이 자기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음식을 구겨 넣고 하얀색의 고른 치아로 박살낸 다음 매끈하게 빠진 목을 통해 배로 내려 보내는 광경을 보면, 갑자기 미(美)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거대한 분쇄기를 보는 느낌이다. 입과 이빨과 입술과 혀의 본래기능 즉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상기하고 깨닫게 된다. 먹이를 입술로 붙잡고 이빨로 부수어 혀로 위장에 밀어 넣어 소화시킨 다음 배설하는 게, 먹는다는 행위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이다. 뷔페식당은 생체분쇄기 집합소이다.
입구에 위아래 각각 3열로 이빨을 갖춘 생물도 있다. 펭귄 입속을 들여다보면 무시무시하다. 입천장에 빽빽이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있다. 저기를 통과하는 물고기는 도산지옥(刀山地獄)을 지나는 느낌이리라. 거기를 지나면 염산불구덩이 화탕지옥(火湯地獄)이 (갈가리 찢긴 몸을) 기다린다. ‘고통이 이것으로 끝이 아닐지 모른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따라온다. 시간이라는 고통도 추가된다. 그리고 그 지옥 펭귄은 물개의 먹이가 되고, 물개는 범고래의 먹이가 된다. 부처님 말씀마따나 삶은 고이다.
곤충·어류·조류·포유류·영장류는 모두 입구에 파쇄기를 설치한 강장동물이다. 35억년 인류 진화의 역사는 파쇄기의 역사이다.
(먹는 건 폭력이요, 배출은 평화이다. 도망가는 걸 강제로 잡아 해체하는 작업이 먹는 것인 반면에, 부푼 배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퇴장객(退場客)들에게 출구를 열어 순응하는 게 배출이다. 들어오게 하려면 나가게 해야 한다. 또 배출은 유기물을 공급하여 땅과 물을 비옥하게 하고, 다른 생물의 먹이를 제공하여 생명을 키운다. 예를 들어 하마와 고래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설은 수중생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배출은 생육(生育)이요, 먹는 건 살해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 달리, 칼과 톱과 송곳과 도끼와 갈고리라는 무시무시한 파쇄기를 몸 밖에도 설치했다. 그 덕에 생물체의 대량살해와 대량해체가 가능하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는 동네 보리밥 뷔페집이 제격이다. 손님들이, 호텔 뷔페식당에서처럼 무거운 실내장식과 품위있는 실내음악과 엄숙한 식기와 예법을 통달한 제관격인 종업원들의 말끔한 복장과 단정한 행동에 주눅이 들지 않고, 마음껏 입을 벌리고 턱과 관자놀이를 놀리며 소리 내어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를 낼 수 있다. 식도와 기도 사이에서 숨이 와류(渦流)를 만들며 거칠게 섞여도 무방(無妨)하다. 허름한 옷차림은 고체음식과 액체음식 뭐가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아서 좋다.
(당신이 살해당해야 한다면, 하지만 피(被)살해 장소를 지정할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어떤 곳을 택하시겠는가? 은은한 고전음악이 흐르는 깨끗한 성당 같은 곳과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대중음악이 악다구니처럼 울리는 더러운 시장바닥 같은 곳, 둘 중 어느 곳을 택하시겠는가? 만약 이미 살해당한 뒤라면, 위 두 곳 중 어느 곳에 시신이 안치되기를 바라시는가?)
음식을 먹는 데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에너지섭취요 다른 하나는 맛이다. 맛의 기능은 건강에 좋은 음식을 가까이하게 하고 나쁜 음식은 멀리하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감각을 경계하라 하셨다. 에너지섭취와 영양섭취가 아닌, 맛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다. 좋은 맛·향기·모습·소리·감촉·생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다. 소위 말하는 주객전도현상이다: 사는 건 맛난 걸 먹기 위해서라는 주장 말이다. 맛이, 에너지섭취와 영양섭취라는 음식의 본래기능을 무시하고, 주인이 되어 힘을 휘두르는 'wag-the-dog‘ 현상이다.
먹는다는 건 장소이동이다. (장소이동에 불과한 이 일에 왜 그리 기쁨을 느낄까?) 몸 밖에 있던 걸 몸 안으로 옮긴다. 배변도 장소이동이다. 몸 안에 있는 걸 몸 밖으로 옮긴다. (장소이동에 불과한 이 일에 왜 그리 기쁨을 느낄까?) 밖에 있는 걸 안으로, 안에 있는 걸 밖으로 옮기는 작용을 생명현상이라 한다. 이동대상에는 정보와 사상도 해당한다. 생각과 사유는 정보와 사상을 소화하는 작용이다. 이 작용이 부실하면 수능시험과 입사·승진시험을 망치고 사기를 당하며, 오작동하면 사이비종교에 빠진다. 말과 글과 예술은 정보와 사상의 배설작용이다. 소화불량이 일어나면 형이상학적인 방귀와 설사로 세상을 오염시킨다. 그중 제일 심각한 것이 초월적인 방귀와 설사인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적, 그리고 광신적인) 종교이다.
저기 상 위에 음식이 있다. 그리고 사방에 정보가 있다. 왜, 밖에 있는 저것들을 우리 몸과 마음(뇌) 안으로 옮겨야 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고 느끼는 희열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를 구속하는가? 인간은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강장동물이다. 태어나 살다 죽는 게 장소이동이라면 인간은 그 과정일 뿐이다. 무수한 물질과 정보가 스쳐 지나가는 과정! 물질과 정보는 수없이 장소를 이동하더라도 아주 없어지는 게 아니라 어디엔가 있다. 단지 그 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래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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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배부르면 딴 생각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