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 마음속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의 웃음 등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수녀가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밝힌 소감은 세상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벨상 수상직전 그녀가 자신의 영적 동료인 미하일 반 데어 페트 신부에게 보낸 고백의 편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부터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려 해도 입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자 간디에 비견되는 20세기 마지막 성인의 것 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 신앙고백은 그녀를 맹목적으로 추종해온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하지만 한 없이 위대하지만, 또 한편으론 한 없이 나약한 한 여인의 진솔한 고백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리기보다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테레사 수녀는 추후 미국의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비롯한 무신론자들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는데, 아마도 이와 같은 인간적인 고백도 빌미가 되었으리라. 이 내용은 추후 다른 글에서 따로 언급할 것이다).
덕치 실현을 위해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의 일행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다. 공자의 애제자 자로는 그런 상황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면 여태까지 스승으로부터 ‘덕으로 세상을 대하는 군자는 적이 없기에, 어려울 때 이웃이 도움을 준다’는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德不孤, 必有隣). 제자는 스승에게 대들듯 불평한다.
“군자가 이렇게 고통을 겪어도 되는 것입니까(君子亦有窮乎)?”
말없이 제자의 불평을 듣고 있던 공자가 나지막하게 고백한다.
“군자는 진실로 고통스러운 법이다(君子固窮).”
스승은 불평하는 제자를 책망하지 않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제자를 껴안는다. 그리고 인간을 품는다.
노구의 싯다르타가 잦은 병에 걸리자 스승의 임종을 염려하며 아난이 싯다르타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구한다. 스승은 제자에게 감출 비밀은 없다고 있는 그대로 답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고백하곤 했다.
"그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어떤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부디 나를 가엾게 여겨 지적해 달라."《상응부경전》
성인은 누구이며 또 붓다는 누구일까? 왜 인류는 기원전의 사람들인 그들을 아직 흠모하는 것일까? 그들이 행한 기적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며 품고자 했던 부단한 노력이 그 힘의 원천이 아닐까. 그리고 그 무량 에너지의 바탕은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에게 진솔했던 대범함일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는 이가 남을 품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국대 김건중 학생이 한 달 이상 밥을 굶고 있다. 왜 총장과 이사장은 어린 학생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가? 도대체 이 말도 되지 않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있는 것인가. 혹시 순진한 학생들도 배후가 있는 훼불 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허세의 갑옷을 입고 있으니 아이들의 아픔이 있는 그대로 보일 리가 없다. 싯다르타는 그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누가 과연 훼불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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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행복한 쪽이라면..대학총장님,이사장님...
그렇게 사십시오......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