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의 공유경제 기반한 공동체 구성 운동해야”
“화쟁의 공유경제 기반한 공동체 구성 운동해야”
  • 이도흠 한양대 교수
  • 승인 2015.10.0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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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학교] 디지털시대의 공유경제에 불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눈부처학교 3기 6강
디지털시대의 공유경제에 불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것인가

이도흠(한양대 교수)

1. 디지털사회의 빛과 그늘

1.1. 정치영역: 텔레데모크라시인가, 새로운 전체주의인가?

정보화사회는 지식과 권력의 원천인 정보를 공유하고 분점한다. 자연히 권력의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탈중심화한다. 누구든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를 하고 곧 바로 답을 확인하며 되먹임[feedback]을 할 수 있다. 디지털 상에 가상의 아고라를 만들어 어떤 정책마다 이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묻고 이를 계량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직접 민주정치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는 텔레데모크라시를 실현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고양하고 다양한 의사와 견해를 수렴할 수 있다.
파워엘리트층은 정보와 채널을 독점하고 몰래 카메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듯 개인을 통제하고 있다. 텔레데모크라시는 꿈일 뿐,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NSA가 매일 50억 개에 이르는 개인 휴대전화의 위치를 추적함.
디지털 격차(digital devide)는 계층별, 소득별, 직업별, 연령별, 장애별로 나타나고 있다.

1.2. 경제영역: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착취한다

정보화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소비한다. 한국의 사무실에서 나스닥에 상장된 증권에 투자할 수 있다. 아마존에서 책이나 옷을 신청하면 며칠 안에 주문자의 집에 당도한다. 정보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유통과 전자, 통신 위주로 재편되고 공장자동화(FA), 사무자동화(OA), 가정자동화(HA)가 단행되었다.
빛의 속도로 거래한다는 것은 빛의 속도로 착취하고 수탈할 수 있음을 뜻한다.
정보화사회는 계획수립으로부터 작업의 감시,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노동의 공정을 기술적으로 통제하여 노동의 강도를 높인다.
자동화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여 실업자를 양산한다. 자동화가 지금의 추세로 진행될 경우 20%만이 노동을 하고 80%가 실업의 소외와 좌절감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할 ‘2 대 8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정보화사회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핵전쟁과 같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사회다.

1.3. 사회문화영역: 다중은 쌍방향 소통을 하는 능동적 주체인가, 고독한 조난자인가?

정보화사회에서 대중은 하이퍼텍스트를 만들면서, 쌍방향의 미디어를 활용하면서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하고 미디어 텍스트를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인터넷은 네트워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중개 없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사회적 조건이다.”(Serhat Koloğlugil, “Digitizing Karl Marx: The New Political Economy of General Intellect and Immaterial Labor, 2015)”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고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위키피디아에서 보듯 협력을 통하여 업그레이드하며 무료로, 공개적으로 상호 발전을 도모한다.
사이버 공간은 익명성과 쌍방향소통으로 인하여 현실 공간에서 작용하던 가부장적 권력이 무너지는 장이기도 하다.
반면에 정보홍수는 개인을 무력화하고 소외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1.4. 세계체제: 정보고속도로는 바리케이드 없는 식민고속도로

정보화사회는 지구촌(Global Village)을 단번에 만들었다. 우리는 SNS를 통하여 전세계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정보화사회는 세계체제와 관련해서도 역기능이 있다. 정보화사회의 최대 적은 제국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점유율은 전 세계에 걸쳐 거의 80%에 이르러 컴퓨터를 사용을 하든 사용을 하지 않든 그럴 때마다 엄청난 로열티를 미국에 지불한다. 인터넷은 이에 필요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를 관장하는 호스트 또한 거의 80% 이상을 미국이 점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 IBM, 엑슨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컴퓨터, 옥상의 위성통신 수신기, 케이블 등을 통하여 제3세계의 기업과 정부를 자기네가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경우 요원만 3만 8000여 명이며, 2012년의 예산은 105억 달러(11조 원)에 달한다. 안보국의 주된 업무는 전세계에 걸쳐 거의 모든 통신망을 도, 감청하여 국가간, 기업간 그리고 표적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감시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이를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판독이 불가능한 암호를 개발하는 것이다. NSA는 위성통신 감청망인 에셜론(ECHELON)을 이용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화통화, 팩스, 이메일을 시간당 수십 억 건씩 도청하였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문화적 동시화”, “미국 문화의 동시화”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현재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대신 제3세계의 독창적 문화와 사회적 창의성은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차츰 파괴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정보고속도로는 ‘식민고속도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식민고속도로의 속도는 거의 무한대이다. 무역보호정책, 관세정책 등 제한속도가 있던 산업사회에서는 그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거부하면 그 국가는, 산업사회에서 포장도로가 깔리지 않은 곳이 오지로 남은 것처럼, 낙후지역으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브레이크를 걸거나 적절한 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인데 거의 무한대의 속도가 용인되는 곳에서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2. 아날로그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차이와 소통

<표1> 구술시대와 활자시대, 영상시대의 차이

구술시대

활자시대

영상시대

산문과 소설

하이퍼텍스트

청중

개인

다중

소리와 음악

문자

문자, 소리, 이미지 통합

정형구 있음

정형구 없음

정형구 있음

참여

소외

참여

비위계적

위계적

비위계적

言靈 존재함

言靈 사라짐

言靈의 부활

구술시대에선 시인이 음률에 맞추어 시를 읊었다. 청중들은 그 자리에 모여 함께 울고 웃었으며 “향가가 천지귀신도 감동시켰다.”라고 할 정도로 말의 생명력이 있었고 그에 영까지 깃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기억을 위해, 음률에 맞추기 위해 정형구가 활용되었고 소리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활자시대가 되면서 개인이 창작을 하고 그가 쓴 글은 그로부터도 소외되었고 독자들 또한 홀로 소설을 읽으며 감동하였고 거기서 메시지를 받기는 하였지만 활자 사이의 꽃은 시들어버렸다. 텍스트에서 음악은 사라졌고 문자로 시간을 붙들어 맸기에 정형구 또한 필요하지 않았으며 글과 글 사이에 위계가 있어 독자들은 처음부터, 1장부터, 1쪽부터 작가가 정해준 위계에 지배되었다.
영상시대에 접어들자 구술성이 여러 차원에서 회복되었다. 산문과 소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타고 무수한 하이퍼텍스트를 만들고 다중이나 네티즌들이 프로슈머(prosumer)로서 동시에 참여한다. 네티즌들은 하이퍼텍스트에 음악과 소리와 이미지를 담는다. 정형구도 부활한다. 검색 기능에서 보듯 위계질서는 무너졌다. 네티즌 각자가 자신의 의도와 취향대로 순서와 차례, 중요도나 서열을 무시하고 텍스트를 읽고 퍼서 나르고 변형을 가한다. 언령(言靈)이 다시 부활하여 네티즌들은 글의 생명력과 힘을 믿고 댓글을 올리고 접속빈도에 환호한다.

<표2> 아날로그형 인간과 디지털형 인간의 비교

아날로그형 인간

집단과 조직

명령과 위계질서

자기지키기

여닫이문

욕구추구

부정의 언명

붙박이형

디지털형 인간

개인과 자아

게릴라

다중인격성, 타자지향성

회전문

욕망추구

긍정적 언명

장돌뱅이형/리좀형

전 시대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은 지사형의 인물이었다. 윤봉길, 안중근 의사처럼 그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이 신념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바탕이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신념, 또는 집단의 가치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처럼 아날로그형 인간이 집단과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개인과 자아의 즐거움과 충족감에 몰두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명령과 위계질서를 따르고 복종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이를 깨고 게릴라처럼 활동하기를 좋아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동일성에 포획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이에 부합하게 행동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다중인격을 형성하거나 타자에 맞추어 그때, 그때 자신, 아바타를 형성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여닫이 문처럼, 안과 밖, 나와 남, 우리와 타자, 문화와 야만을 구분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회전문처럼 그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본능이 요구하는 욕구를 충족하려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욕망을 꿈꾼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욕구를 충족하면 만족감을 얻어 중지하지만, 디지털형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하지 마라”라는 부정적 언명을 좋아하고 그에 대한 죄와 벌, 두려움, 책임으로 인하여 이에 복종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긍정적 언명을 좋아하고 자신이 내켜서 이를 수행한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다양한 범주로 영토를 만들고 이에 얽매여 이 울타리 안에서 생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인간은 이에서 벗어나 유목민으로 떠돌고자 한다. 반면에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네티즌이 상대방에 따라 자신을 여러 유형으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미국 미네소타대 심리학과 마크 스나이더 교수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사이버 시대의 인간형을 다양한 블록으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레고와 비유해󰡐레고적 인간형󰡑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일정한 공간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끊임없이 유랑하는 노마드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말하여 리좀(rhizome)적이다. 이들은 ‘땅속줄기’처럼 역동적이며, 이종성(異種性)을 지향하고, 무한한 연결망을 가지며, 위계가 없고, 절대 파열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으며, 안과 밖이 없이, 거의 무한대의 출구를 갖는다.

아날로그형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디지털형 인간은 “건방지고 무례하며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인 문제아”다. 디지털형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날로그 형 인간은 “언제나 시대나 유행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하며 권위적인 꼰대’들이다. 물론, 21세기사회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뒤섞여 있듯, 대중 또한 아날로그형 인간과 디지털형 인간이 혼합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4, 50대는 전자가 더 많고 2, 30대는 후자가 많다. 디지털 시대는 상황과 맥락이 다양하기에 어떤 인간형이 좋은 인간형이라 규정할 수 없다. 다만, 리좀적 인간이 되어 언제나 자유롭고 역동적이고 파열되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부조리에 맞서서 저항하는 주체성을 단단히 구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3. 디지털사회경제학

인터넷이 국가와 문명 간의 대화를 늘리고 정보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메일을 통하여 상대방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그의 눈물이 마르도록 따뜻하게 포옹해 줄 수도 없다.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노동자들은, 정의를 외치려는 자들은 어디에서 모여 외침을 전할까? “말이 권력이다.”라는 마르코스의 말처럼, 혹자는 마르코스가 성공한 예를 들어 인터넷 시대엔 게시판이 광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를 향하여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싸늘한 정보를 볼뿐이지 뜨거운 피와 불거진 목젖을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미래에 인류는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족처럼 따스한 피가 흐르지 않는 창조일 뿐이다. 정보화사회에서도 물질성을 확보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발을 디디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보화사회에 대해 마르크스적 사유가 필요한 이유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면 산업사회와 디지털 사회는 여러 면에서 대립적이다. “산업사회에서 상품의 소유권은 특정 계급의 특권인 반면에 디지털사회에서 개인컴퓨터와 인터넷의 접근이 증대함에 따라 생산수단의 소유권 구조는 점점 민주화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과학기술적 지식은 고정 자본에 물화(객관화)한 반면에, 디지털 사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 연결된 개인들의 ‘집단 지성’은, 무료 공개 소프트웨어(FOSS) 프로젝트나 위키피디아의 작성자들의 협력적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어떤 형태의 독점적 통제에 대해서든 저항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소유자가 상품을 독점적으로 소비한다는 특성을 갖지만, 디지털 사회에서 다양한 디지털 양식들은 비경쟁적이며, 때로는 반경쟁적이기도 하다. 산업사회에서 생산과 상품의 요소들이 시장 메커니즘 속에 배치되는 반면에 디지털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디지털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기여하며, 사람들은 공유의 문화 속에서 무료로 이에 접근한다.”(Serhat Koloğlugil)

정보화혁명 자체는 중립적이다. 정보혁명은 자본의 편도, 노동자의 편도 아니다. 자본가는 정보혁명을 노동을 통제하고 자본의 축적을 강화하기 위하여 이용하려 하고 노동자는 정보혁명을 광장으로 끌어내려 이런 자본의 의도를 해체하려 한다. 자본은 정보혁명을 이용하여 착취와 수탈, 배제를 강화하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서 정보재의 상품화와 독점에 저항한다. 인터넷은 소통과 참여, 다양성, 개방성, 투명성, 자유와 공유를 지향한다. 인터넷은 광장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시장에서 사적 소유물을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서 자유롭게 교환하지만, 광장에서는 무소유물 내지 공유물을 선물교환의 원칙에 따라서 자유롭게 교환한다. 인터넷은 TCP/IP규약에 의하여 연결된 컴퓨터들의 지구적 네트워크로 정의된다. 정의에서 핵심인 통신 규약은 통신에 관한 약속을 의미한다. 이 통신규약에서는 인터넷이 링크의 길이가 길어지더라도 하나의 (메인)컴퓨터가 두 개 이상의 링크를 가지는 중심이 없는 구조를 가지도록 만들었고, 자료를 패킷 단위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경로로 전달되는 패킷 스위칭(packet switching) 방법이 선택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적이고 분산적인 구조로 말미암아, 자본에 의하여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중심이 없고 분산된 네트워크일수록 초과이윤을 획득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와이드웹을 사적 소유물로 삼지 않고 인류 공통의 재산으로 기부한 것처럼 인터넷의 발명자들은 인터넷을 공공의 영역에 기부했고 공유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강남훈,「정보혁명과 자본주의」, 2010)

“정보재를 상품화하는 경향도 강하지만 이에 맞선 저항도 강하게 전개되고 있다. 사용자들은 유료상품과 무료상품이 있을 때 무료상품을 사용한다. 월드와이드웹이나 리눅스처럼, 인터넷, 운영체제, 응용프로그램의 설계자들은 자기의 발명품이나 작품을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공공의 영역으로 귀속시켜 버렸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염기서열을 상품화하는 것을 금지한 것처럼, 국가는 지식과 정보의 상품화를 장려하기도 하지만 제한하기도 한다. Netscape사가 브라우저로 크게 성공하자 MS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공짜로 제공하여 브라우저 상품화를 좌절시킨 것처럼, 다른 자본이 지식과 정보의 상품화를 방해한다.”

네트워크의 장에서 정보재는 지대의 성격을 띤다. 정보재를 지대로 본 것은 강남훈 교수의 탁월한 인식이다. “지대의 경우에는 초과이윤이 발생하는 원인이 자본이나 자본이 고용한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등한 교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강남훈) 얼핏 보면 정보재는 자본과 노동과 관계없이 현실공간이나 가상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이게 됨에 따라 초과이윤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구글처럼 검색만 할 경우와 포탈의 경우 미세한 차이가 있다. 1차적으로 보면, 구글에서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으며, 수백 억 달러에 이르는 구글의 이윤은 구글에서 검색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처럼 다른 분야에서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가 이전된 것이다. 그러기에 구글이 더 많은 광고료를 벌어들일수록 언론사 등 구글에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한 자본의 이윤은 줄어든다.

하지만, 구글의 막대한 광고료는 다른 자본이 착취한 잉여가치가 이전된 것뿐 아니라 네티즌들이 구글에 접속하여 검색하는 노동을 하며 생산한 잉여가치도 있다. 구글은 하루에도 수 억 명이 접속하여 검색하는 것을 빅데이터로 만들어 광고사에 팔아먹으며, 정부에 제공하기도 한다. 네티즌들은 무료로 구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보와 취향, 가치관과 지향성,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구글에 제공하는 것이고 구글사는 이를 빅데이터로 취합하여 광고사나 정부에 언제든 팔아먹을 수 있다.

포탈의 경우에는 더 직접적으로 잉여가치가 발생한다. 네티즌이 전혀 임금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포탈에 접속하면서 서로 소통한다. 이 때문에 올린 글이나 콘텐츠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공유물이며, 상품교환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선물교환의 법칙을 따르므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는 강남훈 교수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자기 기쁨을 위해서, 혹은 남을 위해서 콘텐츠를 생산하고 접속자들이 능력에 따라 콘텐츠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것 또한 상당 부분 공감이 간다. 하지만, 접속자들이 자기 기쁨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것 같지만, 이는 표층적인 면일 뿐이다. 접속자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어 과잉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그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라는 기계, 그 기계 안에 담긴 프로그램들에 포섭되어 과잉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는 노동자들이다.

양상은 차이가 있지만,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기계에 포섭되어 과잉 노동을 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잉여가치란 기계에 포섭된 노동자가 노동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기존의 가치보다 더 증가된 가치를 뜻한다. 포탈사는 자본을 투여하여 포탈을 만들고 네티즌은 이 기계와 프로그램에 포섭되어 기존의 것보다 가치가 증대된 콘텐츠나 빅데이터를 생산하고 이 가치는 고스란히 광고비로 전환되어 포탈사가 차지한다. 네티즌이 자발적으로 창조한 잉여가치를 생산과정에서 고스란히 자본가가 착취한 것이며, 이에 대해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는다. 곧, 네티즌의 참여와 소통은 무불노동이다.

4. 사물인터넷을 매개로 한 한계비용제로사회와 공유 경제론, 그 타당성과 비판

“사물인터넷(The Internet of Things, IoT)은 이미 여러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성을 증대해 한계비용을 제로에 가깝게, 해당 재화와 서비스를 사실상 무료로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이윤은 고갈되기 시작했으며 재산권은 약화되어 가고 희소성에 기초한 경제는 서서히 풍요의 경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사물인터넷은 통합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사물을 모든 사람과 연결할 것이다. 사람과 기계, 천연자원, 물류 네트워크, 소비 습관, 재활용 흐름 등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의 사실상 거의 모든 측면이 센서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사물인터넷에 연결돼, 기업체와 가정, 운송 수단 등 모든 노드(node)에 시시각각 실시간으로 빅데이터를 공급할 것이다. 이후 고급분석을 거쳐 예측 알고리즘으로 전환된 빅데이터는 다시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화 시스템에 입력되어 열역학 효율성을 증진하고 극적으로 생산성을 향상하는 동시에 경제 전반에 걸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 유통 모든 영역에서 한계비용을 제로에 가깝게 떨어뜨릴 것이다.”(제러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사회-사물인터넷과 공유경제의 부상』, 2014)

필자는 잘 찍지 못하지만 야외로 가면 사진을 찍어 같이 간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아날로그 사진기를 가지고 다닐 때에는 사진 값이 꽤 부담이 되었지만, 디지털 사진기를 사용하는 요즘은 수백 장을 찍어 수백 명에 주어도 전혀 부담이 없다. 아날로그 사진기로 찍을 때는 잘못 찍으면 지우고 다시 찍는 것도, 나중에 보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였고 필름 값이나 인화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디지털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는 지금은 잘못 찍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우고 다시 찍어도 필름값이 전혀 들지 않으며, 집에 와서 보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사진을 선별한 후 디지털 파일로 전환한 후 압축파일로 전환하여 메일로 보내면 추가로 지불하는 비용이 거의 없다. 굳이 계산하면 사진기와 메모리카드의 감가상각과 컴퓨터 사용하는 동안의 전기 비용 정도다. 다 합쳐보았자 1,000원 정도에 그칠 것이다. 재화와 서비스를 추가로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인 한계비용이 거의 0원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정보화사회는 무한한 욕망과 유한한 자원에 바탕을 둔 희소성의 원칙을 근본세서부터 해체한다.

사물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인터넷과 에너지 인터넷, 물류인터넷으로 구성된다. 독일의 한 가정에서 지붕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생산하여 온수와 난방, 취사 등으로 사용하고 남은 전기를 인터넷을 이용하여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되는 가칭 유럽재생에너지센터로 보내면, 거기서는 지능형네트워크체계를 결합한다. 이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가정과 회사의 빌딩엔 스마트 계량기가 설치되고, 그 안의 컴퓨터, 냉장고 등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스마트계량기와 사물인터넷 플랫폼에 연결이 된다. 이 연결망을 통하여 지능형네트워크체계는 실시간으로 빅데이터를 수집한다. 이 지능형네트워크 체계는 자동으로 필요와 만족, 수요와 공급을 조절한다. 이 체계에 따라 독일의 한 가정의 태양열 발전기에 설치된 센서가 남는 전기를 중앙의 유럽재생에너지 센터로 보내고 영국의 한 디자인회사의 컴퓨터에 설치된 센서가 일정 양의 전기를 요구했다면, 독일의 한 가정의 전기가 인터넷을 따라 지능형네트워크의 매개를 거쳐서 영국의 한 디자인 회사로 전송될 것이다. 영국의 디자인 회사는 이 재생에너지를 사용하여 자동차를 설계하고 이 파일과 소프트웨어를 그 자동차를 원하는 가정에 인터넷으로 보내거나 오픈소스로 올려놓으면, 각 가정의 3D프린터는 그 파일과 소프트웨어의 명령대로 용해된 금속과 플라스틱을 원료로 하여 3D프린터로 자동차를 만든다. 이 가정은 지역의 재생에너지협동조합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

“3D 프린팅 프로세스가 사물인터넷 인프라에 내재된다는 것은 사실상 전 세계 사람 누구나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자기 나름대로 제품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프로슈머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생산과정 자체가 전통적인 제조 방식에서 사용하는 재료의 10분의 1밖에 사용하지 않으며 인간의 노동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산에 사용되는 에너지도 제로 수준의 한계비용으로 현장이나 지역에서 수확한 재생에너지다. 마케팅 역시 제로 수준의 한계비용으로 글로벌 마케팅 웹사이트에서 실행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제로 수준의 한계비용으로 지역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로 전자 이동성 차량을 구동해 제품을 사용자에게 배송한다.”(리프킨)

에너지 또한 마찬가지다. 2030년, “이때가 오면, 석유, 천연가스, 석탄, 우라늄은 발전 및 차량연료로서의 위치를 상실할 것이다.” “2020년에 태양광은 원유에 비해 원가를 1만 2,000배 개선할 것이다. 원자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6,000배, 가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1만 884배, 석탄에 비해 상대적으로 2,700배의 원가를 개선하게 된다. 태양광은 바이오연료에 비해서도 550배까지 효율적이다. 어떤 에너지도 가격적인 측면에서 태양광과 경쟁할 수 없다. 이때가 되면 석유가 고갈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석유보다 태양광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이는 돌이 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더 나은 기술인 청동기가 개발되어 석기시대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더 나은 기술인 태양광이 자연스럽게 석유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2030년에 자율주행자동차가 대세가 되는 것은 꿈이 아니다. 전 세계 10억 대의 자동차 가운데 대부분은 90%의 시간 동안 집 앞이나 주차장에 멈춰 서 있다. 그런데 무인주행이 가능해지고 공유의 개념이 커지면, 자동차 소유자는 90%의 시간에 큰 저항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자동차를 임대해주게 될 것이다.”(토니 세바, 『에너지혁명 2030』, 2015)

모든 대중이 거의 무료에 가까운 재생에너지를 서로 주고받고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게 자동차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공유한다면 기존의 자동차시장은 무너진다. 나아가 상품판매도, 그로 인한 이윤획득도 할 수 없는 자동차회사 또한 파산선고를 할 것이다. 이렇게 디지털화와 생산성의 극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혁신으로 한계비용이 거의 0원에 근접하여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추가 생산비용이 무료가 되면, 이윤은 사라지고 상품을 교환하는 시장은 해체되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처럼 “수평적으로 규모를 확대한 대륙 및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대중들이 제로 수준의 한계비용으로 협업에 나서면 어떤 독점체제든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 분산된 재생에너지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제로 수준 한계비용으로 충분히 이용할 만한 규모의 경제를 갖추려면, 그것이 공동체와 지역 전반에 걸쳐 협력적으로 조직되어야 하고 피어투피어(peer-to-peer) 방식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결국 분산형이자 협력형이며 피어투피어 기술 플랫폼인 사물인터넷이 (유사하게 구성되고 조직되는) 재생에너지를 충분히 민첩하게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메커니즘인 셈이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협력적 소비는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의 (소유권을 능가하는) 막대한 혜택을 일깨우는 동시에 돈, 공간, 시간을 절약하게 해 준다. … 이런 시스템은 사용 효율성을 증진하고, 폐기물을 감소하며, 보다 나은 제품을 개발하려는 동기를 부여하고, 과잉생산 및 과잉소비에 따른 잉여물을 추방하는 등 의미심장한 환경적 혜택을 제공한다.”

아직 미약하지만, 서서히 공감과 협력에 바탕을 둔 공유경제가 부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유에서 접근으로, 독점에서 공유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디지털사진을 이메일로 보내고 인터넷에서 무료 파일이나 프로그램을 서로 올려놓고 내려받는 것에서 보듯, 네티즌들은 이를 선호한다. 이에 “시장의 공유가치는 갈수록 협력적 공유사회의 ‘공유가치’로 대체되고 있다. 비영리 공유사회의 운영비용이 2조 2000억 달러에 이르며,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호주, 체코, 벨기에, 뉴질랜드 등 여덟 개국만 놓고 보면 비영리 부문이 평균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의 5퍼센트를 차지한다.”

리프킨의 공유경제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상부구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토대에 관한 것이다. 토대의 변화는 상부구조의 변동을 야기한다. 리프킨의 주장대로, 인류 문명이 기술혁신과 새로운 에너지 체계의 발견과 이와 결합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창출에 의해 대전환을 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디지털의 맥락과 환경, 메커니즘 자체가 소유권보다 접근권을 우선하도록 이끌고 수직적 중앙집권형을 무너트리고 수평적 분산형의 사회로 전환을 유도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존립 근거인 이윤 자체를 소멸시키고 희소성을 풍요, 다시 말해 필요에 따른 소비로 전환하는 것이기에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으로 파괴적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분석할 지점도 많다. 우선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인간을 타자와 경쟁하여 소유욕을 충족하는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였다면, 리프킨은 타자와 공감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이타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인간은 선과 악, 이기심과 이타심, 배제와 공감이 공존하는 복합적 존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변혁의 주체가 노동자 민중이 아니고 기술혁신이라면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변화가 과연 노동자와 인간을 위한 것일지 의문이다.

현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자본-국가의 카르텔이 너무도 공고해졌다는 점이다. 학교와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든, 경찰과 군인처럼 억압적 국가기구든 철저히 자본의 편에서 노동자들을 조작하고 억압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언론과 시민단체, 노동조합 또한 이들에게 포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와 에너지를 중앙의 지능시스템에 집중하는 것은 자본-국가 카르텔을 빅브라더로 만들고, 센서-사물인터넷-중앙의 지능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자체가 파놉티콘이 될 것이다.

앞 장에서 말했듯,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 이 세 가지 자유를 공히 누릴 수 있을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공유경제는 적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대신 소극적 자유를 소홀히 한다. 개인의 성적이고 정치적인 취향에서 의료정보와 DNA와 같은 유전적 정보까지 공유되는 사회에서는 사적 영역이란 없다. 사적 영역 및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개인이 주체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5. 불교적 대안

5.1. 순이불순과 퍼지식 사고

화쟁의 논리는 퍼지식의 논리로 이분법적 모순율을 거부한다. ‘A and not-A’의 논리, 곧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를 고수하지도 않으며[無二而不守一],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順而不順] 논리가 화쟁의 논리이다.

따라서 하거나 따라서 하지 않고도 말한다’는 것은, 만일 마음에 직접 따라서 설법하면 삿된 집착을 움직일 수 없으며, 또 만일 마음에 따르지 않고 오직 설법만 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얻어 본래의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려면, 혹은 따라서 설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또 만일 직접 道理만 따라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그 사람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설법한다면 어찌 올바른 이해를 낳으리요.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까닭이다.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낳으려면 혹은 따라서 하고 혹은 따르지 않으면서 설법해야 하는 것이다.(元曉, 『金剛三昧經論』)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A and not-A, 즉 동조도 하지 않는 동시에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불순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이렇듯 어떤 대립이든 이런 대립과 다툼(諍)을 아우르고(和) 궁극적 진리의 바다에 이르는 방편은 순이불순인 것이다. 그러니 화쟁은 서로 다른 것을 차이와 관계로 바라보고 뜻이 서로 통하는 것에 맞추는 회통(會通)의 논법이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되 부처의 진정한 뜻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여러 견해나 말씀의 핵심의미를 파악하여 하나, 한 맛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순이불순은 인터넷을 통하여 네티즌들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동일성의 사유를 깨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인 동시에, 이것과 저것,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르지 않고 모두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퍼지의 논리를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사유구조이다.

사이버공간은 동일성을 해체한다. 이곳에서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모든 것을 둘로 가르던 이분법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내가 타인 속의 나와 대화를 하고 타인이 내 속의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곳이다. 내가 합성하여 만든 비서가 내 문서를 작성해 주고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듯 현실이 바로 환상으로 변하고 환상인가 하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이미지를 통하여 느끼고 생각하기에 상징계를 깨고 상상계를 지향한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나가기에 모든 경계, 영토, 권위, 제도는 무너진다. 익명의 네티즌끼리 소통하면서 누구든 인종, 계급, 성, 사회적 위상, 학력을 묻지 않는다. 현실, 또는 아날로그식으로는 권력을 형성하던 요인들이 작용을 하지 않으니, 권력과 권력의 담론들은 이곳에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은 해방의 장이자 평등의 장이다.

5.2. 눈부처주체들에 의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화쟁

디지털 시대의 인간관은 실체론적 인간관에서 연기적 인간관, 구체적으로 inter-becoming의 인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주체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추구하며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눈부처주체다. 이들 눈부처주체가 중심이 되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화쟁을 해야 한다.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테크놀로지의 층위에서 보았을 때, 배터리를 연결하여 기계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아날로그다. 하지만, 스마트폰에 내장한 어플리케이션과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인터넷 서핑을 하고 길을 찾고 그림 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것은 디지털적이다. 인간의 층위에서 보면, 스마트폰의 게임과 가상성에 매료되며 노마드로 떠도는 것은 디지털적이지만, 악플에 상처받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자긍심을 지키려 인정 투쟁의 하나로 반박의 글을 올리는 것은 아날로그적이다. 사회문화의 층위에서 볼 때,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페북 등을 하며 SNS로 소통하고 인터넷과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며 가상성의 세계에 사는 것은 디지털적이지만, 게임과 어플리케이션 사용이 끝나면 현실의 장으로 돌아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지사적 인간과 노마드적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스마트폰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한데 어우러져 작업을 하고 콘텐츠를 만든다. 지사적 인간이 있어서 노마드는 유랑을 할 수 있고, 노마드적 인간이 있어서 지사적 인간은 저항을 할 수 있다. 인터넷을 유랑하다가 악플에 저항하기도 하고, 카톡과 텔레그램으로 소통하면서 한 장소에 집결하여 시위를 하고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중계도 하고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카톡이나 텔레그램에 올린 글과 투쟁장면 사진을 통해 용기를 북돋기도 하고 사기도 올리면서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한다. 그러니 둘도 아니다. 아날로그가 있어서 더욱 디지털적인 것이 드러나고, 디지털적인 것이 있어서 더욱 아날로그적인 것이 드러난다. 노마드로 말미암아 지사는 세계의 부조리에 강하게 저항하고 지사로 말미암아 노마드는 땅속줄기처럼 출구도, 입구도, 목적도 없이, 부분이 부숴지더라도 파열이 없이 향하던 방향대로 여기저기 유랑한다.

이제 한 국가나 사회 단위만이 아니라 개인의 층위에서도 산업사회와 정보화사회는 결합되어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낮에는 기계를 움직여 기어나 축을 조립하는 일을 하고, 휴식할 때는 스마트폰으로 디비디를 보고, 집에 와서는 구글 검색을 하고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남의 글을 읽고 자신의 글도 올린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로서 그는 지사적 운동가로서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을 열심히 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연대에 헌신하는 것이 올바른 주체가 되는 길이다. 네티즌으로서 그는 자유로운 노마드가 되어 구글과 페이스북에 자유롭게 접속하여 타자들에 공감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지역과 사이버 공간에 이 체제를 무너트리는 공유경제의 진지를 건설할 수 있다. 이렇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아날로그적 인간과 디지털적 인간,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투쟁과 사물인터넷에 기반한 공유경제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면서 자본주의 해체와 노동해방을 지향할 때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좀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5.3. 화쟁의 공유경제

이런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노동해방의 관점에서 두 가지의 화쟁을 모색할 수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바깥에서 이를 해체하는 것이고, 하나는 그 안에서부터 이를 수행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전세계의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 없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집단지성은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자발적으로 협력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기에, 자본은 집단지성이 수행하는 가치의 생산과정에 개입할 수도, 간섭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통제나 관리는 더욱 어렵다. “산업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이 생산수단을 소유함으로써 사회의 총지식(general knowledge)을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사회의 총지성(the general intellect)은 자본에, 자본에만 유용하게 된다. 이는 디지털 경제의 사회과학기술적 조건과 면밀한 대조를 형성한다. 디지털 경제에서 인터넷과 개인컴퓨터의 접속의 증가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등)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촉진되며, 이는 고정자본에 객관화한 총사회지식에 대한 자본의 독점을 해체한다.”

단기적으로는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집단지성이 자발적으로 생산한 잉여가치를 수탈하여 얻어진 초과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집단지성이 이들을 넘어서는 포탈 자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국가 공유를 넘어 세계 공유를 지향해야 한다. 구글의 자동번역시스템은 각 나라 언어의 문법과 언어구조를 비교하여 번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상호 번역되어 구글에 스캐닝이 된 모든 문건들을 검색, 대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동번역은 인류 공동의 자산이어야 하며, 이에서 얻어지는 수익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토지와 자연, 모든 지식과 정보, 육아와 교육, 원전 해체와 태양광 발전 등 생태에너지에 관한 기술, 병과 유전자 정보 등은 현재의 인류만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까지 공동으로 사용하고 관리하고 처분하여야 한다. 이제 자본의 다양한 전략에 맞서서 각 네티즌들이 눈부처-주체가 되어 인류의 모든 자산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협력하여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시스템들이 곳곳에 활성화할 것이고 이것이 점점 더 자본주의 체제를 주변화하고 결국에는 해체할 것이다.

화쟁의 공유경제를 택시, 숙박, 교육, 재생에너지와 같은 분야에서 시작하여 제조업으로 확대한다면 자본주의는 서서히 해체될 것이다. 자본주의 해체와 노동해방을 지향한다는 원칙과 잉여가치와 노동소외가 없고 생산수단을 공유한다는 전제를 충족시키는 조건 아래 아날로그와 디지털, 지사와 노마드, 근대와 탈근대가 순이불순으로 어우러지는 화쟁의 공유경제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 진지를 곳곳에 세우고 실천하는 부단한 담론 투쟁과 조직화, 운동이 필요하다.

이도흠/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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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 2015-10-08 10:56:15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산업사회가 열리기 시작하자 갖가지 사회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문제.환경문제.고용문제등등 수도 없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가 처음으로 격는 것들이었다.
수천년동안 농경사회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이 거대한 변화앞에서,
어찌할지 모르고 방향감각을 상실한체 살아갔다.
산업사회란 그들에게는 완전한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때에 관성적으로 인간이 할수 있는 모범답안은,
현실을 부정하고 평안했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모범답안에 따라서 사고한 자들이,
케비안사회주의자들이며,퇴니스이며,마르크스이다.

그들에게는 목전의 산업사회는 온통 부정적이었다.
오직 목가적 전원의 농경사회뿐이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원시시대의 공동체사회였다.
그 원시시대에 소규모의 가족적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고,
그것이 연장되어 전개된 농경사회였다.

이처럼,
그들은 시대감각이 마비된 과거회귀론자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사고 근저에는 항상 원시적의 그 공동체관념뿐이었다.
또한 그들과 동류인 것이 농경사회에서 생긴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들에게는 농경사회만이 보이고 산업사회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무지하기 짝이없는 마르크스류의 사고에 젖은,
이교수의 어이없는 몽상드라마적인 글이 위의 글들이다.
따라서 이시대,나아가 미래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헛소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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