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94년 불교개혁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전문] 94년 불교개혁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 서현욱 기자
  • 승인 2015.07.16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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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불교개혁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

김경호/ 지지협동조합 이사장

개혁회의 5대 지표
- 정법종단의 구현
- 불교자주화실현
- 종단운영의 민주화
- 청정교단의 구현
-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
3대 개혁과제
- 불교자주화
- 제도개혁
- 인적청산

○ 1994년 종단 개혁은 종회나 제도권이 아닌 제도권 밖의 학인, 재가자 등 사부대중이 모여 이뤄냈다. 스님들이 시작했으나 전 종도, 모든 불교도의 문제로 확산되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변화의 열망에 원로스님, 뜻있는 종회의원 스님들까지 함께 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1994년 종단 개혁 당시 우리 불자들은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어떤 아쉬움이 있을까?
종단개혁은 불교와 한국사회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94년의 정신으로 오늘의 불교를 되돌아본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종단개혁이 제기했던 불교와 사회의 문제들은 해결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한국불교가 직면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은 과연 무엇인지 전향적 고민을 하여도 모자랄 이 시점에, 서황룡 사면이라는 역사 퇴행적 행태가 불교 발전을 가로막는다.

더욱 슬픈 일은 과연 종단 개혁 이후 개혁과제가 성실하게 수행해왔을지 누구도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잘 해왔는데 2015년 6월에 이르러 일부 재심호계위원의 개혁정신 일탈 때문에 서황룡의 사면 복권이 일어났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는 일이다. 조짐은 이미 오래전서부터 있었다. 뿌리를 찾자면 94년 개혁까지도 되짚어 올라갈 수 있다.

○ 5대과제는 1994년의 한시적 목표가 아니라
근현대 한국불교의 총체적, 집단적 꿈과 의지를 담은 것.
청정승가 구현 - 범계, 자정, 종권, 폭력, 도박, 은처, 정재 망실
민주화 - 사부대중 참여, 민주적 종단운영,
자주화 - 정권예속 탈피, 친정권 들러리, 지원금 의존,
불교발전 - 포교, 교육, 역경, 문화, 재정 과제,

○ 비자주적 불교현실, 왜곡되고 부패한 종단문제는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의 정권의존 현실에서 잉태
필자는 불교평론 2호에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라는 제하의 글을 실은 적이 있어 이에 일부 인용한다.

조계종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전개되어 비구측의 대처승 측 사찰 접수로 진행되었다.(때문에 불교정화라는 용어보다는 사찰정화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또 이때 밀려난 대처측에서는 이것을 ‘법난(法難)’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의 정화 유시도 모 사찰을 방문하던 중 절 경내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내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불교정화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구 대처 분규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과의 밀착, 삼보정재 탕진, 무자격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는 등 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불교 정화의 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년여를 두고 끌어오던 「정화분쟁」 동안에 대처 비구 양측이 탕진해버린 방대한 불교재산은 현재 고갈상태에 있다....한때는 득의양양했던 「비구승」들도 「승리의 기쁨」을 거품과 같이 날려보내고 지금은 「암중모색」의 고배를 들이키고 있는 것이다.
비구측이나 대처측 모두 정화과정은 처절한 생존권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을 등에 업은 비구측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통사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러나듯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조계종은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성립한 것이다.
조계종이 명실상부하게 한국불교의 대표권을 확보한 것은 박정희정권 때이다. 4.19 혁명 후 이승만정권 하에서 억압당했던(?) 대처측의 반격으로 불교 분규가 심각하게 재연되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불교 정화로 야기된 분규를 수습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를 위해 1962년 1월 18일 비구측과 대처측은 문교부에서 만나 ‘불교재건위원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이어 62.3.22 문교부 주선으로 재건비상종회(대처측 불참)에서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조계종 종헌을 3. 25 공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으나 제11회 정기중앙종회의 결의문에서는 조계종의 발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대한불교조계종 현 종단은 1962년 4월 13일 비구.대처 양측 회합하여 통합종단을 합법적으로 창설한 것임
2. 1962년 4월 14일 문교부장관과 각계 인사의 입회하에 비구.대처 양측의 종단을 해체하고 일체 종단서류와 그 권리를 인계한 사실임. (비구와 대처간의 대립은 1970년 대처측이 분종을 선언하면서 종단 외적인 공방으로 바뀌고 조계종은 비구측이 온전히 장악한 채 내부 권력분쟁으로 양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 정부에 기대는 의존형 종단운영
비구측이 주도하는 통합종단을 출범시켰으나 여전히 종단권력은 취약했다. 기댈 곳은 정부밖에 없었다. 1대 종회만 살펴보더라도 정부 측을 향해 여러 번 정책요청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다.(쿠데타정부가 내건 재건국민운동 촉진의 건을 결의한 것을 보면, 어떻게든 정부의 눈에 들려는 안간힘이 보인다.)

제2회 중앙종회 안건 중 - 재건국민운동 촉진의 건(1962년 12월 27일 통과)
본건에 대하여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혁명정부의 시책에 부응하고 이 운동에 관한 구체적이고 사무적인 것은 행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한다 p115
4회 종회 – 문교부장관의 대처종단 인정발언에 대한 건의문 채택
5회 종회 – 분종획책에 대한 결의문 채택
6회 종회 – 정부 정책에 대한 건의문 작성5인 선출
8회 종회 – 문교부에 제출할 결의문 채택의 건(65.1.27)
1. 불교재산관리법의 철저한 운용과 감독으로서 전국 미등록 사찰의 조속한 등록 조치를 강구하여줄 것
2. 1964년 4월 30일 자 문교부의 생목재산 처분 허가 중지 조치를 즉각 해제하여 줄 것
3. 1965년 1월 16일 자 문교부에서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서 지시한 사찰재산 처분에 따른 감독 강화 조치로 발송한 공문을 즉시 철회할 것.
9회 종회 – 종단 반동에 대한 대비책 결의문 채택
(제1대 중앙종회 회의록 1999년 발간)

○ 정부인사의 종회 발언
제8회 정기 중앙종회 회의록(1965년)을 보면, 문교부 당국자가 종회에 참석하여 ‘지시사항’을 하달하는 경우까지 있다.
특리 사찰림 남벌을 금지한 정부정책에 대해 해제해 달라는 청원을 종회 이름으로 결의하였다.
p299 개회후 삼귀의례/ 의원점명(재적 50명, 출석 40명)/ 종정교시/ 경과보고/ 전회의록 낭독(회의록 배부로 대신)
이행원의원; 긴급동의입니다. 문교부 당국에서 본회의에 임석하였은 즉, 인사와 아울러 지시사항을 듣도록 하자.
의장 : 긴급동의에 이의 없습니까?
(전원 무이)
문교부 사회교육과장(육진성): 정부 3대 정사로서 정치, 건설, 수출의 3부문에 걸쳐 일하는 해로서 국민 전체가 의욕적인 취업으로 배가 노력해야 겠다.
첫째, 생산적이 못되고, 소비적인 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소비를 감소하는 방향
둘째, 경제적 고찰로서 사찰림의 벌채가 끝나면 여하한 대책으로 사원경제를 보전할 것인가
셋째, 경영면, 행정면의 연구로서 강력한 종무행정을 실시할 것이며, 실질적인 3대사업을 실천해야겠음에 의원 여러분의 건투를 빈다.
문교부 이사무관: 종단의 모체 중심으로 명령계통을 확립하고 3부가 유대를 강화해서 상호협조, 사찰재산의 공정처분 및 운영의 합리화를 기하고 문서관리의 철저와 보고제도를 확립해야겠다.
의장 : 이상 경과보고에 대한 발의를 말씀하시오.
오녹원 의원: 문교당국의 지적과 같이 사찰재산 처분에 관심이 크다. 사찰 입목처분의 수입과 미수가 있다고 본다. 총무원에서 직권을 넘쳐 말썽이 있다. 지방에서는 원의 입회 여부로 물의가 있으니 시정해야겠다.
의장 : 입회란 감독이고 원에서 업자를 압력으로 누를 수 없으며, 그런 처사란 없었다.
오녹원의원: 황룡사 건과 명봉사 건 등 말썽이 있으니 기필 시정할 것이다.
....................
나아가 사찰접수에 정부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줄 것을 기대고 있다. 하지만 문교부 당국자는 조계종으로 등록해주어도 입주조차 못한다며 문교부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차라리 문교부 사회교육과 이사무관의 견해가 정직하다. ‘불교 분규는 재산분규’라는 입장은 정부에서 불교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9회 중앙종회 회의록 p327 1965년3월
의장 : 문교부에서 나온 직원이 발언권을 요청하는데 허락함이 여하.
(전원 찬성)
문교부 사회교육과장 : 시기적으로 중요함으로 얘기하겠다. 오늘 국공위에서 불교문제를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다. 문교부에서는 불교 분규라는 말은 이제 쓰고 싶지 않다. 분규는 62년도에 이미 끝났다. 불교로서 대표적인 기관은 대한불교조계종이다. 항간에 유포된 이야기는 일소에 붙이고 있다. 분종 문제와 통일종단 반대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불교재산관리법에 대한 논의는 스님들께 맡기고 62년 이후 반종단 문제는 판단을 해야겠다. 등록문제는 강력히 시행을 못했다는 것을 시인한다. 지는 3월 17일 그들도 종단으로 귀의하겠다고 왔는데 통일종단으로 귀의하는 자에게 길을 열어줌이 가하다고 봤고, 종단에서 반종 극소수자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요청되고, 몇 개 남지 않은 미등록사찰은 다시 강구하겠다. 여러 의원께 이상 문교정책에 대한 방향을 알려드린다.

문교부 사회교육과 이사무관 : 불교분규는 엄격히 말해서 내가 생각하기로는 불교 재산 분규라고 본다. 재산권 주도권 문제인데 이는 일단락되었다고 본다. 서대문 측에서는 분종과 관리법 폐지운동 및 분신 자살설, 선거 반대설로 떠들고 있으나 분종하려면 중앙종회의 결의를 거쳐 분종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헌법의 신교자유의 원칙을 들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국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문교부에서는 사찰등록을 강행치 않는다고 스님들께서 이야기하는데 등록을 해주어도 입주치 못하고 있다. 그의 입주치 못하는 책임은 문교부에 있지 않다. 그간 문교부로서는 가급적인 이탈인사들이 종단에 귀의하기를 종용해 왔고 그렇기 때문에 법의 강력한 시행을 하지 않고 있는 점도 있었다. 통일종단은 문호를 넓게 개방하여 넓은 아량으로 오는 이를 맞이하여 받아드려야 할 것으로 안다.
의장 : 정부의 소신을 피력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
박벽안의원 : 사찰경내지 정화문제가 침체되고 있다. 그 후의 당국은 하등의 조치가 없었다. 행정조치로서 전국 사찰에 일시에 정화되도록 당국에 요망한다.
.........................

그렇지만 정부입장에서는 가끔 당근을 줄 필요도 있었다. ‘공동번영을 위한 동지적 입장’이라는 립서비스는 얼마나 달콤한가?

제 11회 정기중앙종회 회의록
.................
문교부 사회교육과장: 귀 종단의 영예와 발전이 있기를 축복한다. 사찰등록사무 중 22개 본사의 등록이 완료되고, 앞으로 미등록 사찰을 전부 등록할 방침이다. 각 군에 지시해서 이미 조사중에 있다. 재산 처분 승인을 요하는 사항은 기본 방침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며, 공동 번영을 위하여 동지적 입장에서 노력하고 있으며, 오직 종단의 항구적 재정 방침을 확립하여 본직의 소관에 미치는 전반적인 업무와 방안을 제시하면 전적으로 협조하여 드릴 것을 확약하는 바이다.

○ 비자주적 불교는 정부 입맛에 맞도록 관리하려는 정부 측 의도와 정부의 지원금과 권력에 기대어 내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불교정치승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강화되어왔다.
대표적인 사항을 예로 들자면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황진경스님(이후 80년대 초반 총무원장이 되었으나 신흥사 살인사건으로 퇴진, 이후 멸빈당함)은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으로서 신문지상을 통해 아래와 같은 어용적 발언을 쏟아냈다. (선학원 소속 황진경스님이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으로 선출된 것은 1972년 4월 중앙종회에서였다.)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10월 유신은 과단성 있는 조치이다. 새국가 건설로 민족통일의 숙원을 이룩해야겠다.” “모든 부정을 근절하는 새사회 건설로 국민이 믿고 자랑하는 나라 건설에 종부는 앞장서야 하겠다. 국민 각자는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성실한 마음가짐을 이룩해야하겠다.”<경향신문 1972년 11월 4일>
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대한 발언은 아래와 같다.
“조용한 출마와 난잡하지 않은 선거분위기를 해방후 처음으로 느낀다.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표(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을 수 있는 민주화의 선거이다.” “타락한 선거운동에 대한 관의 철저한 제재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유권자들의 강력한 감시와 고발정신이 앞선다면 앞으로 어떠한 선거라도 민주화될 것이라 본다.”<경향신문 1972년 12월 8일>

부도덕한 정치권력이 바라는 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양 충성경쟁을 하는 종단 지도부의 행태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를 계속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서의현 총무원장은 “고뇌에 찬 충정의 구국의지‘라며 지지를 밝혔다.
이 밖에도 1969년 7월 31일 대한불교조계종 장로원장 청담스님,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선언을 책임있는 결단이라며 지지 성명발표, 1976년 7월22일 조계종 전국신도회 11대 회장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선출 등 권력과 불교의 밀월은 서로를 위해 보탬이 되는 한 쉽게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밀월이 깨지면 후폭풍은 거셌다. 군사정권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계종에 대해 1980년 10월27일 계엄사령부는 조계종 총무원(원장 월주스님) 및 전국 주요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스님과 재가자 153명 연행하고 11월15일 국가에 의해 조계종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킨 10.27법난은 아직도 불교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정치권력과 종단이 밀착하면 비자주적 예속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의 뒷배를 발판으로 공적 자원을 사유화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아도 견제 세력이 없다. 사소한 범계가 일상화되다보면 범계의 수위가 자꾸만 높아진다. 그래도 제동을 걸 사람이 없다. 진정과 투서가 들어가도 권력기관에서 덮어버린다. 그러다가 저들이 확보한 종단 지도부의 범계와 약점은 유사시 종단을 길들이고 움직이는 미끼가 된다.
그러므로 비자주는 비민주와 부정부패, 범계의 공모자가 된다.

○ 개혁과제는 근대불교의 총체적 과제
장황한 이야기를 반복한 것은, 94년 당시의 5대지표가 평지돌출의 일회성 슬로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성립이 이미 왜색불교, 대처불교를 척결하여 청정교단의 구현, 정법종단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으며, 종단 성립 이후의 여러 충돌들도 결국 종단운영의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색불교를 몰아내자는 정화운동은 결국 한국불교의 청정승가 전통을 되살리자는 운동일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의 원칙에 어긋나는 범계승들을 자체적으로 정리해내는 일은 종단기구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94년 개혁은 이들 과제를 기본으로 하여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부패한 종단권력을 혁파하자는 대중적 열망이 불교 자주화로 나타났으며, 사회적역할 확대라는 대승불교정신의 복원을 꾀한 것이다.
불교는 국가 사회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과 활동영역을 넓혀왔다. 개인과 가정의 복만을 빌어주던 협소한 기복신앙에서 진일보한 것은 고무적이다. 또 사회복지영역의 진출은 괄목할만하다. 어찌보면 94년 개혁의 5대 과제 중에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만은 그나마 성공적이라고 자평해도 될 듯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혁이 배반당한 현실을 슬퍼하며 이 자리에 모였다.

○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종단이 출범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불교계는 상전벽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재산관리법 시절에는 임명장을 받은 주지가 관공서를 찾아가 신고하여야 했다. 분규사찰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재산관리인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종단과 스님들의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특히 94년 개혁 이후 확연하게 달라졌다. 서의현총무원장 시절에는 종로서를 비롯한 정보기관원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며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94년 이후에는 감히 과거와 같은 행태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총무원장실에는 장관과 국무총리가 인사를 온다. 대통령선거 즈음에는 유력후보들이 와서 허리를 조아린다. 지방 본사 주지는 물론 수말사 주지만 되어도 기관장들이 찾아온다. 검찰과 경찰에서 찾아와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며 친근한 척을 한다. 종교지도자로서 지역사회에서 예우받는다. 이 대접에 도취된 것은 아닌가?
근대 불교의 생활상은 넉넉하지 못했다. 스님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60-70년대에는 하루 3끼를 온전히 먹을 수 있는 절이 많지 않았으며, 대웅전이 기울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도 사찰재정으로는 보수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스님들은 쇠락한 사찰 공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을 나서거나 대처의 신도집을 순방하여 불사를 위한 보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기록을 본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전통사찰의 경우 비록 절차상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정부 지원금으로 보수공사를 할 수 있다. 60-70여개소에 달하는 관람료 사찰들은 입장료 수입이 제법 풍요롭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지원금과 관람료에 기대는 사찰을 확보하기 위한 종단정치는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13,000여명의 비구 비구니가 원하는 풍요로운 사찰은 얼마나 될까? 전통사찰 800여개를 비롯 종단 소속 모든 사찰의 수는 2,500여개에 불과하다.(선학원 사찰 570여개가 법인법 파동으로 빠져나갔다.) 한정된 목표를 놓고 생존을 건 무한경쟁이 지속된다.
소수 기득권의 경제상황은 풍요를 넘어 종교재벌이라고 할만하지만 대다수는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정속에 빠져있다. 소문중중심의 배타적 사찰권역이 종단에 고착화되면서 기댈 반연이 없으면 해제철이 되어도 바랑을 풀 곳을 찾지 못한다.
종단이 공동체성을 상실하여 구성원들이 각자도생해야 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을 외면한 채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는 처분을 반복하면서 대중의 신뢰는 상실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자신들을 ‘불교자본가’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이름 없는 아무개의 망발이 아니라 교육원장이라는 고위직 승려가 한 말이다.

○ 무엇을 할 것인가?
94년 불교개혁의 의미와 남겨진 과제라는 주제에서 너무 엇나간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94년 불교개혁의 5대 지표는 정화운동, 대한불교조계종의 성립으로 시작하여 승가와 재가들의 고민과 노력이 꽃핀 것이다. 83년 비상종단, 9.7해인사 승려대회를 비롯 과거가 쌓여 94년 승려대회가 꽃피울 수 있었고 개혁종단이 시작될 수 있었다.

먼저 개혁종단을 이은 종단권력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물론 종로구 견지동 45번지가 불교의 모든 것일 수 없다. 저 한줌밖에 안 되는 가짜중, 권승들이 우리 1700년 한국불교 역사를 대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저들이 개혁종헌을 계승하여 개혁을 실현하겠다며 대중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면 그 약속을 지키는지 눈을 뜨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저들이 잘못할 때마다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불자들의 역할이다. 결코 저들 마음대로 망치라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감시와 비판이면 다 되는 것일까? 94년 개혁에서 시도조차 못하고 좌초한 과제가 있다면 내부 민주화이다. 94년 개혁의 결실은 비구1부중이 독점해버렸다. 재가 2부중이 소외된 것은 물론 비구니조차 국외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2천오백년전 팔경계법을 들이대며 비구들이 정당하단다. 웃기는 소리다. 팔경계법을 떠들려면 2백5십계를 먼저 지켜야 한다. 자신들이 해야 할 바는 하지 않고 남에게 요구만 하는 비구독점의 왜곡된 종단권력을 혁파하여야 한다. 이 싸움은 오래갈 것이다. 대립하는 어느 한 쪽이 결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2부중은 개혁 5대지표를 생활 속에 구현해야 한다. 조직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정법으로 종단을 운영하지 않으면 참여하지 말자. 들러리 서지 말아야 한다. 민주적으로 운영하지 않는 조직이라면 거부해야 한다. 청정한 교단이 아니면 보시하지 말자. 굶겨야 한다. 입장료와 정부지원금으로만 살아보라고 해야 한다. 청정한 스님, 바르게 운영하는 사찰에만 보시해야 한다.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눈치 보는 종단, 비자주적 종단은 불교를 대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저들 가짜 중들이 1700년 불교역사의 유산을 독점하여 도박자금, 정치자금, 은처생활자금으로 낭비하지 않도록 저들의 관리권을 빼앗아야 한다. 비구승가가 바르지 않다면 저들의 지도력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저들에게 공양도, 의례도, 지도도 거부해야 한다. 재가자가 할 일은 이것뿐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쉬운 일일 수 없다. 당장 종단의 여러 활동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도 관건이다. ‘100인 대중공사 참여’는 어떤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저들 종단 권승들은 이미 재가단체를 볼 때도 손잡을 곳과 배척해야 할 곳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저들의 분리정책에 놀아날 것인가 아니면 재가들의 굳건한 연대를 만들어낼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른 불교를 위해 재가자와 재가단체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 재가의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승가의 어느 부분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인지 실질적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재가자가 미래 한국불교의 책임 있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씨앗을 지금 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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