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1367-1422)이라고 하면 막힘없이 돌진하는 산돼지 같은 인상을 갖게 한다. 그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이다. 형제서열로는 왕이 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조선 건국에 지대한 활약과 집념으로 자기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왕권을 쥐기 위해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이복동생 둘을 죽이고, 형은 무력화 시켜 전주에 가두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아버지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권력의 무정함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그는 왕이 된 것에만 정신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왕권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풍수적 해코지를 자행한다. 풍수적 수단을 악용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이성계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고향에 살고 있었던 본처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이다. 고향에 사는 부인을 향처라고도 불렀다. 반면에 도읍지에 사는 둘째부인은 경처라고 했다. 강씨 부인은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명문가로 영리했다. 그들은 새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서 조선건국의 동지였다. 신덕왕후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고 싶은 욕심을 내세우는 바람에 그 밀월의 관계는 깨어졌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죽자 신덕왕후의 잔재를 매우 잔인하고도 확고한 방법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1396년에 한성부 서부 취현방에 신덕왕후의 정릉을 조성한다. 이곳이 지금의 영국공사관 자리라고 추정한다. 1408년 이성계가 죽고, 1409년에 정릉을 개장하여 지금의 정릉동으로 묘지를 이장시킨다. 명목적인 이유는 한양사대문 안에 묘지를 만들 수 없다는 원칙이었으나, 그 보다도 신덕왕후의 배신감에 대한 복수였다. 즉 풍수적으로 열악한 곳으로 이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정릉에 사용된 호석들을 광통교에 부재로 사용해 버린다. 광교에 가면 600년 전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1364∼1420)은 태조 이성계의 4남이다. 왕자의 난에서 실패하여 전주에 유배되어 살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태종 이방원은 풍수사를 보내어 길지에 묻어주라고 이른다. 풍수사가 도착한 것은 이방간은 이미 무학대사가 잡아준 길지에 묻힌 후였다.
지금의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법사산 자락이다. 풍수사들이 태종에게 대대군왕지지代代君王之地라고 보고하자 불안 초조해 하던 태종은 풍수적 해코지를 지시한다.
먼저 땅의 기운을 받지 못하게 용맥 끊는 것이다. 무덤 뒤로 연결되는 산의 능성을 파내고 왕겨를 넣어서 불을 지른다. 이것은 땅에 뜸을 뜨는 방법이다.
둘째, 묘지 뒤의 내룡처 부근을 매년 봄가을로 불을 지르게 했다. 무학대사가 묘지부근에 나무가 무성하면 자손이 흥한다고 한 이유에 대한 방지책이다. 지금은 이방간의 후손에 의해 잣나무가 심어져 있어 무성하다.
셋째 용맥에 구덩이를 파서 분뇨를 부어놓는다. 오염된 땅에서 좋은 기운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넷째 고양이 석상을 세웠다. 이곳은 쥐가 먹이를 찾으러 밭으로 내려오는 형상의 명당이라는 판단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고양이가 쥐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묘지 앞 600미터 지점 비닐하우스 사이에 고양이 바위가 있다.
한가지의 방책만으로 불안했던지 이중삼중으로 풍수적 해코지를 하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은 일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자신의 분신이 영원히 조선을 통치하게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풍수적 방법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한 인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풍수라고 여겼다. 역풍수로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한 태종 이방원의 선택은 조선역사가 역풍수로 몸살을 앓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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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솔방울이 그대로 주렁주렁 매달려있는것은~
풍수적 관점으로는 어떻게 보는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