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에 나온 중도
경전에 나온 중도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0.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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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20

열반경에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한다. 우선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며, 단절된 것[斷]도 아니고 항상한 것[常]도 아니기에 중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도의 내용을 보다 깊이 파헤치면 그것은 곧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12연기(十二緣起)의 진리임을 알 것이며, 이것이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난 중도라는 것이다.

불성이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함에서 먼저 불성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는 여러 가지 이유중의 하나를 들어보면, 불성이란 그릇에 물건이 담기듯이 중생의 육신중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는 마치 허공처럼 육신을 여윈 것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란 뜻은 일체가 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있는 것이지만, 현재 일체가 진실한 불성의 본성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불성이란 안과 밖, 있음과 없음의 어느 한 쪽에 머무름이 없으므로 중도라 이름한 것이다.

불성은 원래 일체중생이 다 갖추고 있지만 모든 중생이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에 덮여 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부터 연기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뢰야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이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서 십이인연의 깊은 강을 건너지 못함은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함과 같으며, 십이인연의 깊은 이치를 모르는 까닭은 불성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문․연각의 이승(二乘)들조차도 비록 인연을 보긴 보지마는 아직 불성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이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고,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이다. 그것은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다. 이 십이인연을 바르게 깨치려면 성문과 연각의 경지로도 부족하며, 오직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 즉, 확철대오해야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본래 명칭은 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으로 반야경 계통의 경전이지만 여타의 반야경과는 다소 상이하며 많은 반야경 중 최후에 설해진 경이라고 여겨진다. 신라나 고려에서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위하여 자주 개최되던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의 사상적 근거가 된 경전이다.

‘보살이 제일의 가운데서 항상 이제를 비추어 중생을 교화한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내버리고 쌍조(雙照)에 입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제(二諦)란 제일의제(第一義諦)와 세제(世諦) 두 가지 진리를 말한다. 제일의제는 진제(眞諦)․승의제(勝義諦)라고도 하는데, 이는 진공이나 중도, 실상 등 성인이 보는 깊고 묘한 진리를 뜻한다. 세제는 속제(俗諦)․세속제(世俗諦)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반 세간에 드러난 상식으로 범부가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을 모두 버리는 것을 쌍차라 하고, 그 둘을 모두 관조하는 것을 쌍조라고 한다.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이 말은 십이인연과 중도를 바로 깨쳐서 실제로 쌍차쌍조된 사람은, 그 사람을 보살이라 하든지 중생이라 하든지 부처라 하든지 마구니라 하든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 이제를 쌍조하는 데에 중점이 놓여 있지 그 명칭은 무어라 해도 관계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살이 본다는 것과 불지(佛地)에 들어 가야만 십이인연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다. 원시경전의 초전법륜에서는 아라한이 여섯이 있다고 설하여 법을 바로 깨친 사람을 아라한(阿羅漢)이라 표현했다. 여기서 아라한이란 말은 중도를 깨친 사람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일체가 공함을 깨쳐서 쌍차가 되면 그곳이 곧 쌍조이니, 이것은 진공(眞空)이면 묘유(妙有)요 묘유이면 진공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쌍차라 하든지 쌍조라 하든지 그 내용은 결국 똑같은 것이며, 쌍차쌍조하여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면 거기서 여래의 5안(五眼) 즉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의 다섯 가지 눈[五眼]을 원만하게 구족하여 일체법에 걸림이 없이 자재하게 된다. 중도의 근본내용이 쌍차(雙遮)와 쌍조(雙照)임을 자주 주장하게 되는데 대승경전 중에서 그 쌍차와 쌍조의 개념을 구사하여 중도를 설명하는 경전으로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이 있다.

이제관이라 한 것은 가(假)에서 공(空)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며, 평등관이라고 한 것은 공에서 가로 들어가는 것은 이제의 차별을 말하지 않고 공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두 관법은 방편도(方便道)인데 이것을 인하여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에 들어간다. 바로 여기에서 이제를 쌍으로 비추는 것[雙照二諦]이 되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쌍차는 자연히 쌍조가 되는데 쌍차에 집착하면 완전한 쌍차가 되지 못하는 동시에 또한 완전한 쌍조가 되지 못한다. 이 병폐를 지적하여 방편도라 한 것이다.

누구든지 완전한 쌍차를 이루고 또 쌍조가 되면 그것이 곧 이제관 안의 중도인 중도이제관(中道二諦觀)이며 쌍조이제(雙照二諦)로서 마음 마음이 적멸(心心寂滅)하게 된다. 그 의미는 항상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하다는 뜻이다.

임제스님은 먼저 심청정(心淸淨)이라 하여 마음이 청정해서 일체가 다 끊어진 것을 부처[佛]라 하고, 또 심광명(心光明)이라 하여 일체 광명이 시방세계, 법계를 다 비추는 것을 법(法)이라 했다. 그래서 청정하고 밝아 거리낌 없는 것[淨光無碍]을 승(僧)이라 하였는데 그 의미는 광명과 청정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청정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하다는 것으로 이것도 역시 차와 조가 동시임은 물론이다.

생멸이 없는 것 같지만, 부처님이 볼 때에는 아뢰야식의 생멸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 분만이 중도 제일법성(中道第一法性)의 땅, 즉 정토에 머무른다는 말이 되는데, 그러면 이것은 석가의 특권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할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누구든지 중도만 바로 깨치면 남자고 여자고 할것없이 누구나 다 부처이다. 그러므로 석가 한 분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중도를 바로 깨치면 누구든지 법성 정토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전에는 십지․등각이라도 절대로 정토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hadogyeom.kr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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