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중에 꽃
꽃중에 꽃
  • 현각 스님
  • 승인 2014.10.0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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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67.

이맘때가 되면 화훼단지를 찾게 된다. 국화를 구입하기 위해서이다. 도심을 벗어나니 코스모스가 시선을 끈다. 하늘거리고 있는 모습이 여유롭다. 마치 자기 존재를 나타내는 몸짓 같기도 하고, 잊혀진 추억을 일깨우고자 하는 각성의 표현 같기도 하다. 아니면 각수장이의 손에 들린 끌이나 정이 되어 거푸거푸 허공을 마구 조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추억은 뇌리에서만 누리는 성찬은 아닌 듯하다. 절기가 주는 추억도 있고, 사물이 주는 추억도 있다. 특히 사람을 맞이했을 때 야기되는 추억은 진한 향수를 자아낸다.

누군가가 말했다. 신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든 꽃이 코스모스이고, 최후로 완성한 작품은 국화라고 했다. 하여간 코스모스의 꽃말은 순정이다. 순정의 속성은 꾸밈이 없다. 그리고 가식 없는 순수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스어 kosmos는 ‘정연한 질서’를 의미한다. 화장품을 cosmetic이라고 하는데 코스모스에서 파생된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서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질서를 지키기 위한 선행조건이라고 하면 무리가 아니다. 화장품을 쓰는 것은 흐트러진 머릿결을 빗질하여 다듬고 푸석한 피부에 수분을 발라 부드럽게 하기 위함이다. 즉 무질서의 정돈인 것이다. 옷매무새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손길이 미치기도 한다.

사회생활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지루하고 따분한 듯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듬살이에서 질서란 필수요건이 된다. 나  하나 편하자고 질서를 무시한다면 당장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공중도덕을 배우고 익혀가는 것이다. 질서는 만인에게 필요한 규약이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쑥색 바지에 상의는 흰색 교복이 주류였던 시절이 있다. 등굣길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삼삼오오 떼를 지어 걷는다. 개중에 짓궂은 친구는 붉은 코스모스 꽃을 따 손가락사이에 끼고 앞에 가는 친구의 등짝에 덥석 친다. 흰 바탕에 붉은 꽃이란 선연하기가 이를 데 없다. 둘 사이에는 감정이 오고 간다.

수선을 떨고 차가 지나간다. 비포장도로라서 먼지가 푸석푸석 날리는 모양이 가관이다. 구름이 계곡에 그림자를 드리우듯 주변의 모든 사물을 뽀얗게 감싸 안는다. 숨을 멈춘다. 먼지를 마시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질식할 것 같아 이내 ‘푸’하고 멈췄던 숨을 길게 폭발한다. 먼지가 쉽게 가시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요즘이야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영조 임금이 후궁을 간택하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비단옷으로 곱게 치장한 재상급 따님들이 모였다. 즐비하게 놓인 방석 위에 앉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간택이 시작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앉아있는 여러 처녀 가운데 어찌된 일인지 한 처녀만이 앉지 않고 서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영조는,
“저 처녀는 뉘 집 딸인데 저렇게 서 있는고?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지 물어 보아라.”
나인들이 다가가서 서있는 규수의 귀에다 대고 다그쳤다.
“임금께서 친히 간택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서있는 법이 아니오. 좌정하시오.”
이러한 독촉에도 여전히 서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긴 영조는 직접 하문하였다.
“그대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여 앉지를 못하는 고.”
이렇게 임금의 하문이 있은 연후에야 그 규수는 나인에게 가만히 귓속말을 하였다.
“아무리 간택하는 자리라고 하지만, 방석 위에 어버이의 성함을 써 놓았으니 그것을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사오리까?”
나인이 방석을 내려다보니, 과연 규수들의 아버지 이름을 써 놓았던 것이다. 누구의 딸인가를 임금이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니 영조가 크게 깨달아,
“그렇겠다. 아무리 방석이라 하더라도 부모의 이름을 감히 어떻게 깔고 앉을 수가 있겠느냐? 뉘 집 규수인지 모르겠으나 과연 영리한지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법도에 따라 사찬(賜饌)이 내리어 음식들이 들어왔다. 이어서 영조는 규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물었다.
“무슨 음식이 가장 맛있느냐?”
이런 하문에 “떡이올시다”, “국수라고 아뢰오”, “식혜올시다.” 이렇게 식성대로 아뢰었는데 유독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은,
“소금인 줄로 아뢰오.”
하는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어서 임금은
“그대들은 무슨 꽃을 제일 좋다고 생각하느냐?”
하니 다른 처녀들은 매화니, 국화니, 연꽃이니, 모란이니 하여 각기 자기네가 좋아하는 꽃을 말했으나 김한구의 딸만은,
“사람의 의복을 만드는 면화(棉花)가 으뜸이로소이다.” 라고 하였다. 이 현명하고 마음 깊은 규수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이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 몸을 송그리고 있는 푸새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련한 추억의 터널을 지났다. 목화나무에 달린 달달한 다래 맛에 끌려 서리를 즐겼던 지난날이 새롭다. 열다섯 살의 꽃다운 나이로 궁에 들어 온 정순왕후를 생각하면 허탈함이 밀려온다. 그럴 것 없지. 이제 하늘마음을 펼치자. 하늘처럼 맑고 밝고 넓고 고요한 마음은 비교를 허용하지 않을 터이니까. 비교는 스스로 열등을 자초하는 꼴이다.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 수행정진했고, 동국대학교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미국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장, 정각원장, 한국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겸 동국역경원장으로 불교학계 발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학의 이해』, 『선어록 산책』, 『선문선답』, 『선문보장록』, 『선 사상론』, 『선 수행론』, 『한국선론』, 『벽암록의 세계』, 『한국을 빛 낸 선사들』, 『선심으로 보는 세상』 연보로 구성된 『최현각 선학전집』(전11권), 『내 사유의 속살들』, 『현각스님의 마음 두드림』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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