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식설(心識說)의 요체
심식설(心識說)의 요체
  • 하도겸 칼럼니스트
  • 승인 2014.10.0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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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18

오식(五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전5식(前五識)으로 심리상태에 있어서 정신활동의 전위부대에 해당한다. 감각작용은 경계로 볼 때는 성경(性境)으로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는 것과 같이 어떠한 분별이 조금도 없다. 수정체 안구에 무엇인가가 비치는 그 찰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춰진 대상에 대해서 검다, 푸르다, 좋다, 나쁘다 등의 분별을 하지만 이 분별은 이미 제6식인 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현량(現量)’이란 사물을 지각하는 방법의 하나로, 비판이나 분별을 떠나서 외계의 대상을 그대로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전5식은 외계의 사물을 직접 지각할 뿐이다.

제6식은 의식(意識)을 말하는데, 삼경(三境)인 주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세계인 성경(性鏡), 주관의 영향하에 나타나는 망상적 경계인 독영경(獨影境), 본질은 있으나 본질 그대로는 나타나지 않는 경계인 대질경(帶質境)에 통한다. 중생이 여러가지 업을 지어 그 과보를 자초하여 이리저리 끄달리면서 삼계와 육도를 윤회하는데, 그 윤회의 주체인 제8식을 이끄는 힘은 제6식이 제일 크다. 제6식은 무루지(無漏智)가 발생하는 초지 환희지에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여 아(我)와 법(法)에 대한 분별혹(分別惑)은 그치게 된다. 그러나 구생혹(俱生惑)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구생혹이란 선천적으로 익혀 온 번뇌이다. 그러므로 환희지에서는 의식작용 중 분별혹은 멈추지만 구생혹인 전(纏)과 면(眠)은 아직 남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纏)은 현행(現行)을 말하고 면(眠)은 종자(種子)를 말하므로 초지에서는 구생혹의 현행과 종자는 활동하는 것이다.

원행지인 7지에서 보살이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가면 의식의 여러작용이 완전히 그쳐서 분별혹은 물론 구생혹까지 없어져서 의식작용이 순수한 묘관찰지로 바뀌어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게 된다. 일체의 의식이 사라진 무상천(無想天)과 제7지의 무상정(無想定)과 제8지 이후의 멸진정(滅盡定), 그리고 수면과 민절에서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다. 무심(無心)이기는 하지만 계속적인 정진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제8지 이후인 색자재(色自在)의 멸진정에 들면 색에 자재해서 노력이 필요치 않는 무공용(無功用)이 된다. 그러므로 보통은 제7지를 모두 성인(聖人)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제7지 무상정까지는 의식적으로 수행한다는 노력[功力]이 필요하며, 제8지 멸진정 이상은 이런 노력이 필요없는 성위(聖位)에 든다고 한다. 제7식은 인연을 따라 자아를 집착하는데 이것은 비량에 속한다. 비량은 안개를 연기로 잘못 보듯이 제7식이 제8아뢰야식을 자아로 잘못 보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환희지인 초지에서는 제7식이 전환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지만, 제8지의 멸진정에 가서야 자아[我]라는 분별집착이 완전히 없어진다. 불과위(佛果位) 중에서는 여래가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십지 보살도 여기에서 그 가피를 받아 전체가 다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타수용신은 초지(初地) 이상의 성인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불신(佛身)이다. 제6식의 사량은 완전히 드러나게 이것 저것을 의식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제7식의 사량은 잠재적으로 분별하는 사량이다. 제7식에는 네 가지의 근본번뇌, 즉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와 촉(觸) 등이 수반되어 덮여 있다. 제7식은 삼계(三界)의 아홉지위[九地:지옥․아귀․축생․아라한․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에 따라서 생하며 거기에 계박되지만 즉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다. 7지 이상의 성인을 출세도(出世道)라고 한다.

제8식에는 작용이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며,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부(無覆)라고 하는 것이다. 대원경지에서 진여본성을 증득하고서 보면 무부가 아니라 유부(有覆)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부라고 한 것은 작용이 너무나 미세하고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8식은 삼계구지(三界九地)에서 각기 다른 업력에 따라서 생한다. 사람이 죽을 때는 의식이 전부 그치고 제7식은 작용을 못하지만 제8아뢰야식만은 생명을 마칠 때까지 남아 있다가 생명이 끊어질 때, 즉 윤회할 때 최후까지 남아서 따라간다. 또 사람이 다시 몸을 바꾸어 환생할 때에 제6의식이나 제7식은 작용하지 않지만 제8아뢰야식은 제일 먼저 와서 그 중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숙식이란 선악의 업(業)으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과보로서 이 이숙식이란 명칭은 범부로부터 금강도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며, 오직 불과(佛果)인 묘각(妙覺)에서만 그 명칭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대원경지에 이르러서야 제8아뢰야식의 근본이 완전히 공해진다는 말이 된다.

의식이 그대로 있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식이 완전히 끊어져 제7지 보살의 경지인 무상정(無想定)이 될 때에도 제7말나식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한 색자재(色自在)의 멸진정은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몽중일여(夢中一如)로 꿈속에서는 일여(一如)하지만 오매일여(寤寐一如)는 되지 않다. 제7말나식의 근본이 완전히 빠져버리게 되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에는 숙면에서도 일여가 되어 오매일여가 되는 것이다. 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무심에 머무르고 있다. 자재보살로서 색자재(色自在)하고 심자재(心自在)하고 법자재(法自在)하지만 제8지․제9지․제10지․등각보살들도 공에 빠지고 적멸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沈空滯寂] 아직 아뢰야 마계에 있는 것이 되므로 자성을 바로 본 것이 아니다. 물론 장식(藏識)이라는 이름은 버렸지만 아직도 이숙식(異熟識)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색자재 이상에 가서 이숙식이 완전히 공한 대원경지를 증득해야만 공부를 바로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교가(敎家)에서는 ‘식을 전환하여 지를 이룬다[轉識成智]’고 말하는데, 여덟 개의 모든 식[諸八識]을 전환하여 네 가지 지혜[四智]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이는 유식학이 표방하는 기본도리이다. 8식이라는 것은 중생생활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중생이 성불하여 구경각을 성취하면 네 가지 보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육조스님은 여덟 식을 전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여덟 식의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을 바로 깨달으면 여덟 식 그대로가 네 지혜[四智]라고 한다.

나가(那伽)라는 말은 용(龍)을 뜻하는데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자유자재하심이 마치 용이 허공이나 바다에서 자유자재하게 노니는 것과 같음을 비유하여 나가정(那伽定)이라고 한 것이다. 누구나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자성이 청정함을 바로 자각하면 그대로 나가정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식을 끊고 전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hadogyeom.kr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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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 2014-10-12 14:47:32
사람이 죽고 나서도,
아뢰야식은 남아 있다가 다시 환생한다는,
성철의 글을 보면 황당할 뿐이다.

성철은 생시에 이에 그치지않고 티벳과 동서양의 온갖 실례들을,
동원하여 이를 합리화하기 바빳다.
이것을 보면...성철은 무엇을 깨달았으며,그 깨달음이 구경각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이 글들만으로 본다면 그는 깨달음은 커녕 구경각의 근처도 가지 않았다.

기신론에서 원효가,
지식론평석에서 다르마끼르티가 항상하는 강조하는 말이 심상속이다.
일체의 실상은 찰나찰나이기에 인간의 마음도 찰나찰나 상속하는 심상속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찰나의 마음,심상속의 세계에는,
고정되어 항상하는 그 무었이 전혀 없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아뢰야식 역시 찰나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잘못 이해한 호법과 계현에게서 배운 현장은,
아무런 비판없이 그것을 중국에 전하였다.
그것이 화엄에,선종에 그 또한 비판없이 전염된바,
오늘의 성철과 같은 어이없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심상속 하지 윤회하지않음을,
우리는 그 심상속의 주체인 기억의 발생처인 두뇌의 뇌에서 확인할만큼,
우리는 밝은 지혜로서의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

그외,
도처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은 일일이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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