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이 다 자라서 시들면 종자만 남아 그로부터 다시 싹이 돋아나듯이, 유정(有情)이 생멸할 때에 사람의 심식도 그러해서 사람이 죽은 뒤에 일체의 종자식이 남아 윤회를 하게 된다. 일체 종자식은 두 가지 집수에 의지하여 자라난다. 하나는 유색(有色)으로 된 육근(六根)과 그 의지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모습과 이름으로 인한 언설과 희론의 습기에 대한 집착이다. 이 두 가지가 근본이 되어 우리의 종자식을 훈습하게 되며 육도윤회를 한다.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3계(三界) 가운데 유색계 중에는 생사가 있으므로 두 가지 집수를 다 구비하고, 무색계 중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이 떨어진 곳이므로 두 가지 집수를 구비하지 않는다.
‘아다나’란 번역하면 ‘집지(執持)’인데, 선업이나 악업의 세력 등 모든 종자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식은 유정의 몸에 언제든지 따라다니는데, 이것이 없어지면 종자의 근본이 없어지므로 모든 식의 뿌리가 다 빠져버린다. ‘아뢰야’는 ‘무몰(無沒)’고 없어지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자성을 바로 깨치려면 아뢰야식을 두드려 부수지 않고는 절대로 대자유한 대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 일체의 종자를 또한 심(心)이라고 하는데 이 식으로 말미암아 색성향미촉 등이 쌓이고 생장한다. 이와 같이 아다나식이 아뢰야식이고 종자식이며 심이다.
이숙(異熟)이라는 것은 ‘변해서 익는다[變而熟]’라는 뜻이다. 즉 원인은 선이나 악인데 과보는 선이나 악이 아닌 무기(無記)를 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이나 악을 지었는데 그 과보는 부귀나 빈천으로 나타나 인과가 서로 달리 연결되어 있다. 아뢰야식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세하고 난해하여 보통의 심식으로는 도저히 사량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으며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不可知]’라고 한다. 말나식이 뿌리깊은 번뇌인 아(我), 아소(我所)와 아만(我慢) 등을 집착하며 끊임없는 생각과 헤아림, 사량함은 잠재적으로 사량하는 것을 말하며, 만약 드러나게 사량한다면 제6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과거․현재․미래에 삼계에서 항상 생사유전하는 과보의 주체가 만약 선하다면 항상 즐거움만을 초래하고 만약 악하다면 항상 괴로움만을 수반하여 영원토록 반복되어 마침내 수도하여 향상하고 증오(證悟)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숙식은 그 업의 원인은 선이나 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숙식의 성질이 무기라는 것은 총체적인 면에서 하는 말이며, 선업이나 악업에 따른 과보는 개별적으로 나타나므로 선인(善因)-선과(善果), 악인(惡因)-악과(惡果)라는 불법의 진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숙에는 다르게 변해서 익는 것[變異而熟]과 때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時而熟]과 마지막으로 선악 업보의 과체 및 생사 윤회의 주체인 종류를 달리해서 익는 것[異類而熟]이 있다.
제8식 아뢰야식을 심(心)이라 하니 모든 법의 종자를 모아서 모든 법을 일으키며 그 행상이 미세하다. 항상[恒]하면서 사량[審]이 없으니 나[我]에 집착하지 않아 끊어짐이 없다. 제7식 말나식을 의(意)라 하니 장식(藏識)등을 반연하여 항상 살피고 사량하여 자아[我]등으로 삼으며 아상(我相)이 깊다. 항상하면서 또 사량하니 나를 집착하여 끊어짐이 없다. 제 6식인 식(識)은 사량하면서 항상하지 않으니 나에 집착하여 끊어짐이 있다. 붉은 것을 보면 붉은 데에 머물고, 검은 것을 보면 검은 데 머무르며, 어떤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일이 없다. 전5식은 항상하지도 않고 사량하지도 않으니 나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6식인 의식과 전5식을 식이라 이름하니 허망하게 여섯 가지 다른 경계를 취해서 망령되이 분별만 하여, 그 행상이 거칠게 겉으로 드러나고 움직여 간격이 끊어져 분별하며 유전한다. 거울에 물건이 비치듯이 눈의 수정체에 어떤 사물이 비치는 그 순간을 전5식의 작용이라 하고, 거기서 푸른 것이라든지 붉은 것이라든지 그 무엇을 인식하게 될 때는 6식인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사물이 눈에 비칠 때는 있고, 비치지 않을 때는 없어서 완전히 끊어져버린다.
우리가 보통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의식뿐이지만 그것을 내면적으로 운전하는 말나와 아뢰야도 언제든지 의식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보통 때는 이와 같지만 발심수행하여 제8지 보살의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면 의식이 완전히 떨어지고 말나도 거의 떨어져서 제8아뢰야만 혼자 남게 된다.
부처님은 “중도, 연기, 진여법계 등을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심의식의 근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눈을 가려서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도와 진여 이것을 바로 깨치려면 심의식의 근본무명인 아뢰야식을 해결해야지 그 이전에는 참으로 중도나 연기․불성을 깨칠 수 없다”고 하였다. ‘심의 의식(意識)의 자체경계’는 자기 마음의 진여본성 즉 불성으로 선지식의 지도에 의지하여 이것을 깨치면 심의식의 근본 자체를 볼 수 있다. 그러면 환상같이 공허한 육신이 곧 법신이며, 번뇌에 덮인 심의식의 본성이 바로 진여자성이라는 말을 자연히 알게 된다.
선종에서는 지극히 미세한 제8아뢰야를 제8마계(第八魔界)라 규정한다. 누구든지 공부를 아무리 잘하여 완전히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었다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마계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데, 제8식은 그만두고 제6의식의 사량분별 속에서 경계가 조금 바뀌고 어떠한 지견이 생겼다고 이것을 견성이라 알면 자기만 망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가르치게 되어 자타가 모두 망하게 된다.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不疑言句 是爲大病]’인 것이다. 부처님은 구경각을 견성이라 하고 육식은 물론 제8아뢰야의 경계까지도 견성이 아니라 했는데, 의식분별이나 객진번뇌를 가지고 견성이라 주장하면 부처님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비법(非法)이다.
* 이 글은 미래에 만들어질 새로운 대장경에 들어갈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 1992)의 뜻을 간추리면서 몇가지 수정하기도 하였다. / 하도겸 칼럼니스트(hadogyeom.kr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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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로 무아를 입증하면... 무아는 입증이 되것지...
그런데 입증은 또 무엇인가???? 무엇이 입증을 한단 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