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매주의
몽매주의
  • 강병균 교수(포항공대)
  • 승인 2014.09.05 09:58
  • 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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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4

일찍이 니체는 서양 몽매주의(蒙昧主義 obscurantism)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몽매주의라는 흑마술(black art)의 정수는 개인의 이해를 어둡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을 칠흑처럼 깜깜하게 만들고 우리의 존재관을 어둡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원시인이 문명인보다 더 잘 알 이유는 나변에도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고대인들처럼 샤머니즘적으로 큰 돌, 큰 나무, 큰 강, 큰 바다에 영혼이 있고 이들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길흉화복과 생사에 영향을 끼친다는 미신을 믿어야한다. 지금도 석기시대에 사는 아마존 원시인 야노마미족들은 그리 믿고 산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경천동지하게 지금도 선진국모임인 OECD의 회원국 대한민국에 존재한다. 인가를 받은 대종사 중에도 그런 분이 있다.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의심하는 이들을 꾸짖으며 가르친다. 그리 신심이 없이 의심하면 안 된다고. 물, 눈, 비, 우박, 구름, 천둥, 번개를 주관하는 용도 믿어야한다. 이런 사람들은 베다교도들처럼 이들을 신격화해서 섬기며 고대인들처럼 황홀경에 빠져사는 게 합당하다. 그런 황홀경은 ‘망상성황홀증후군(妄想性恍惚症候群 delusional trance syndrome)’이라 한다.

인류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장 고등종교인 불교의 최고경전으로 숭앙받는 화엄경에도 이런 물신, 불신, 바람신들이 무리지어 등장한다. 용신(龍神 naga)도 등장한다. 그 때문인지, 어처구니없게도 그래서 슬프게도, 불교계에는 아직도 이런 신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화엄경 등의 종교경전은 키로 까불러 미신은 날려 보내고 위대한 사상만 취할 일이다. 여기서 '키'는 ‘관찰과 사유思惟’, ‘지관(止觀 잡념과 잘못된 선입관이 없는 깨어있는 마음)’, ‘과학적 탐구심’, ‘심사(尋伺 넓고 깊은 지식과 사유에 기초한 직관과 통찰)’ 등 일체의 지성적인 힘이다.

부처는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을 부정했는데, 어찌 관세음보살에게 복을 비는 것이 가당한가? 관세음은 신설 길흉화복(吉凶禍福)부 종신직 장관이란 말인가? 우리가 관세음보살에게 비는 동안에는 절대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사티수행이나 화두수행이나 비파사나수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자기마음을 지켜봐야하거늘, 소원으로 가득 찬 마음이 무슨 수로 자기를 바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 마두상 성운. 사진 중앙의 말머리 모양이 마두상 성운이다.마두상 성운은 지구에서 1,500광년 거리이다.
위대한 우주학자 칼 세이건의 책제목 ‘악령이 출몰하는 세계(The Demon-Haunted World)’처럼 현대에도 여전히 악령은 출몰한다. 교묘하게 고등종교의 탈을 쓰고서. 그렇게 믿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뇌 깊은 곳에 심어진 고대의 미개한 문화라는 문화바이러스(문화유전자 밈)가 바로 악령이다.

종교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지성과 영혼을 생매장시키거나 팔아먹는 행위이다. 종교경전을 우상화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베다교를 포함한 어느 경전에서도 답을 찾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이나 팔리경전 등 특정 경전에서 모든 답을 찾으려하는 것은 광신이다. 뿐만 아니라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 근본가르침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가 부처님의 친설(親說)인지 알 길이 없다. 만인이 동의하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불성(佛性)이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려)는, 의지와 지성이다. 이것이 법등(法燈)이자 자등(自燈)이며, 이런 법등과 자등을 지니는 한 누구나 부처님제자이다. 이 부처님제자들이 이룩한 것이 위대한 인류과학·문명이다. 과학과 문명은 결코 일개인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언어, 천문학, 종교, 도시문명을 개척한 선대 인도인들의 업적의 기초위에 이루어진 일이다. 멀게는 45억년 진화 위에 세워진 위업이다. 침팬지나 고릴라가 고도의 지성을 갖춘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과거의 미개한 사고와 인습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여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는 것이고, 그런 능력인 불성(佛性)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인류 최초로 밝히셨다는 점이다. 번뇌의 해결이 인간(몸과 마음)과 세상(사회와 기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불성은 (일체의) 진리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진리가 먼저지 부처가 먼저가 아니기에, 부처라도 들이받을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부처는 자신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맹신과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쳤기 때문이며,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법등명자등명(法燈明自燈明)이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다. 이런 정신이 선불교적으로 부활한 것이 ‘봉불살불 봉조살조(逢佛殺佛 逢祖殺祖)’라는 선언이다. 이런 사람은 그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이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계형·직업형 종교인들의 직업병적인 선동일 뿐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이 모든 혼란의 와중에도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독립적인 지성을 말한다. 그렇지 않고, 이 말이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불생불멸의 실체적인 ‘참나’나 ‘진아(眞我)’를 상징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무명중생(無明衆生)은 한 방에 때려죽일 일이다. 필자의 말이 아니라 운문선사의 말이다.

크로마뇽인이 현대인보다 자연과 생명과 우주에 대해서 더 잘 알았을 리도 만무하다.
인간의 사고란 개념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추상적인 개념은 언어의 등장·발달과 함께 등장·발달하였으며, 이 추상개념의 등장·발달은 뇌의 신피질 등장·발달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옛날 사람들의 사고를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이다. 특히 기독교적 근본주의와 회교적 근본주의는 악명이 높다. 이 두 근본주의가 충돌한 것이 고대의 십자군전쟁이요, 현대의 9.11 테러와 미국의 대(對) 이라크·아프칸 전쟁이다.

불교는 과학과 무관하고 초월적인 마음을 다룬다는 주장 역시 깊은 사유가 결핍된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렁이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 초월적인 마음이 있다고 믿을까? 지렁이와 사람이 죽은 후, 즉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이 두 초월적인 마음은 서로 대화가 가능할까? 만약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서로 분절·격리된 마음이다. 그런 위대한 초월적인 마음이 어쩌다 육체에 감금당하고 윤회를 하는 것일까? 당신에게는 이것이 진정한 이원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추락할지도 모를 비행기는 왜 타며, 폭발할지도 모르는 도시가스는 왜 이용하며, 무너질지도 모르는 현대공법을 사용한 고층아파트에는 왜 사는가?

이런 사람들은 일종의 분열증에 걸려서 산다. 마음은 종교로 가는데, 손은 과학으로 스마트폰으로 뻗는다. 그리고 눈은 할로겐 등(燈) 불빛으로 향한다.

옛 불교는 마음으로 마음을 탐구하였고, 현대과학은 ‘물질(실험도구 화학물질)과(의 도움을 받아) 마음으로’ 마음을 탐구한다. 물질로 마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 바로 마음과 물질은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기적으로 상호반응을 한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Arp273으로 명명된 은하의 모습
부처님이 지금 환생하신다면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과학을 배우실 것이다. 달라이라마가 그 증거이다. 달라이라마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배우고자 하는 솔직함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사실, 현대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현대학문에 대해서) 많이 알 리는 만무하다. 많은 사람들이 믿듯이 달라이라마가 초자연적인 신통력인 육신통(六神通)이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그가 고백하였듯이, 만약 그랬다면 티베트가 속수무책으로 중국에 병탄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6신통이 아니라 5신통만 있었어도, 타심통으로 티베트를 집어삼키려는 모택동의 흑심을 읽고, 천안통으로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낸 다음, 신족통으로 포탈라 궁을 빠져나와 휜 시공간을 통과하여 그의 방에 은밀히 찾아가 놀래주면 될 일이었다. 숙명통으로 모택동이 과거에 불교승려였다는 것을 알려주면 효과는 즉각적일 것이다. 만약 모택동이 전생에 티베트 승려였다면 그 효과는 말할 나위도 없다. 모택동의 모친이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모택동 자신도 불교경전(육조단경)을 옆에 두고 즐겨 읽었다고 하니 그 방법이 통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티베트에 침략하는 대신, 오히려 달라이라마를 주석사(主席師 王師)로 모시고 티베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것이다.

불경의 초세간적(超世間的)인 지식이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일의 성패에 초연한 마음을 줄지는 몰라도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힘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속지혜의 관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치료법은 불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연구가 가능하도록 세속정부를 설득하는 것과 연구비를 모으는 것과 고루한 윤리관을 극복하는 것은 종교적인 지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줄기세포연구 그 자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불교도들이 보기에 삿되고 해괴한 교리를 지닌 서양외도들이 과학발전을 다 이루어냈다는 점을 살펴보라.

지금 불교가 부처님이 척결한 고대의 베다교신세가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중생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미신, 귀신학, 그리고 쓸데없이 난해한 초월적인 형이상학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어떤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배를 타고가다 난파해 표류하다 무인도에 올랐다. 열심히 기도했건만 하나님의 손길을 없었다. 결국 굶어죽은 그가 하나님과 대면했다. 섭섭하다는 그의 항의에, 하나님은 ‘내가 너를 구하려고 두 번이나 손을 내밀었다’고 대답했다. 한 번은 헬리콥터로, 한 번은 여객선으로. 그는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멋진 구원만 꿈꾸며, 지나가는 헬리콥터와 여객선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기도만 하다 결국 굶어죽은 것이다. 불교인들도 초월적인 마음의 구원만 꿈꾸다 헬리콥터와 여객선을 거부하는 망상을 피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한다. 천국(불국토 佛國土)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천국(불국토 佛國土)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한반도를 불국사(佛國寺)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사회, 나라, 지구를 만드는 것은 세세생생으로 무한한 중생들에게 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잔인하고 미개한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문명을 발달시키고 세계사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신에 대한 끝없는 재해석’을 통해 미개성을 제거하고 동시에 과학을 통해서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뉴톤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가 고백하였듯이, 그의 진정한 열정은 과학이 아니라 신학에 있었다. 그는 은퇴 후 신학연구에 전념했다. 그러므로 ‘이 땅이 버려야할 고통의 땅’이라는 철학은 우리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 마음이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사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처럼, 지금 이 물질계에 연기하지 않는 마음은 무용지물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물질과 마음이 상호 의존하며 공(共)진화한다’는 것이 진정한 연기법이다.

위장이라는 물질에 밥이라는 물질이 안 들어가면 당신은 정신적인 고통을 느낀다. 바이러스라는 물질이 물질인 몸에 침투하면 극심한 물질적인 고통을 유발하고, 그 물질적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정신적으로 자살을 의도·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최고경지에 이른 아라한들도 그러했다. 목숨을 끊는 데, 날카로운 칼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공복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밥을 구하러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며 전쟁에 빠진다.

마음이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지렁이의 마음도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작동하는가? 개미는 어떠하며 세균이나 박테리아는 또 어떠한가?

수계산능력은 마음이 아닌가? 그런데 컴퓨터는 더 잘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마음의 능력을 하나씩 제거하고 나면, 과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힌두교식의 ‘주시하는 마음’인가? (한국불교계에는, 이 ‘주시하는 마음’을 주인공 또는 불성으로 숭상하는 이들이 숱하게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혜민스님이다. 이분이 몹시 호소력 있는 글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불생불멸의 실체적인 ‘주시하는 놈’을 내세운 것도 사실이다.) 그 주시하는 마음만으로는 무슨 쓸모가 있으며, 계산, 예술활동, 탐구, 사랑 등의 일체 다른 마음이 없이 그런 주시하는 마음으로만 살기를 원하시는가? 그 경우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주시하는가? 자신에게 일체 마음의 활동이 없는 그때,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주시하시려는가?
게다가 멸진정(滅盡定. 모든 감각과 의식이 사라지는 삼매. 멸수상정 滅受想定)에 들면 그 주시하는 마음조차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주시하는 마음은 불생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그저 연기緣起하는 여러 마음 중 하나일 뿐이다. 여러 인연이 맞으면 나타나는 마음. 그러나 하도, 주시하는 마음을 불생불멸의 참나, 진아, 주인공, 본래면목 등으로 어처구니없게도 몹시 집착하는 이들이 있기에,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논증해 보이겠다.

‘주시하는 마음’이 ‘참나’나 ‘진아’라면, 그리고 참나나 진아(眞我)가 불성(佛性)이라면, 불경에 의하면 일체생명체는 불성이 있으므로, 지렁이나 박테리아도 '주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시하는 마음은 인간의 주시하는 마음과 (그 기능과 질에 있어서) 차별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인간같이 반성, 사유, 지능, 추리, 시간관념, 자아개념, 정체성개념이 있는 생물체의 주시하는 마음이, 지렁이나 박테리아 같은 하등동물의 주시하는 마음과(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만약 있다면) 같을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만약 같다면 그 주시하는 마음은, 하등동물이냐 고등동물이냐에 따라 불평등하게 차이가 나는 지성, 즉 반성 사유 지능 추리 시간관념 자아개념 정체성개념이 일체 없는 중성적인 것이 되어야한다. 그럼 그 주시하는 마음은 바로, 일체 감정과 지성이 없는, 물질적인 존재이다. 유리로 만든 거울이다. 일체 감성과 이성의 작용이 없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비추기만 하는 거울! 우주에 어떤 참혹한 재난이 일어나도,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600만 명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잔인하게 도살당해도, 또는 평화를 사랑하는 1,000억 명의 고등생물이 인간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마두상은하(馬頭狀銀河)의 마두행성에 갑자기 거대한 떠돌이별이 뜬금없이 충돌하여 하루아침에 멸망해도, 그냥 비추기만 하는 거울!

당신은 이런 거울이 되고자 하시는가? 되고 싶으신가? 설사 우주 크기의 거울이라 할지라도 이런 거울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거울은 생명이 없는 무정물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거울이 되자는 주장은, ‘사람은 죽으면 그냥 무로 사라진다’는 말과 동일하다. ‘무정물이 되는 것’이나 ‘무로 사라지는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시체는 물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시하는 자'라는 용어는 아주 멋있게 들릴지 몰라도 실은 소위, 유심론자들이나 마음탈연기주의자(心脫緣起主義者)들이나 마음독존주의자(心獨存主義者)들이 비판하는, 유물론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유심론자들이나 마음탈연기주의자(心脫緣起主義者)들이나 마음독존주의자(心獨存主義者)들은 왜 부처님이, 지구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탄생할 때 첫 번째 생명체인 단세포동물로 나타나지 않고, 그 후, 일 겁에 가까운 장장 35억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타나셨는지 깊이 사유해보아야 할 것이다. 100해(=1 뒤에 0이 22개 있는 수) 개의 별들이 빛나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 크기의 망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부처님이 베다교와 당시의 삿된 외도 사상가들의 몽매주의를 척결하였듯이, 현대의 부처님제자들은 부처님이 무기(無記)로 일관한 일에 대해서 일부 승려들이 과거에 뱉어낸 그리고 지금도 뱉어내고 있는 (불설로 가탁하고 위장한) 무수한 망상에 대해서 봉기를 일으켜야한다. 이들이 대중을 몽매주의로 미혹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과학문명의 밝은 불빛을 거부하고 스스로 크로마뇽인의 어두운 (무명 無明)동굴로 다시 기어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쳐서 이제는 실리콘시대에 산다. 그러나 누구나 모두 21세기 실리콘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아마존·뉴기니 열대우림과 아프리카 사바나에는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고 있다. 선진국 대도시에 산다고 예외는 아니다. 과거의 미신을 숭상하고,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개발하여 물려준 지성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면 여전히 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중세 1,000년 내내, 갈릴레오를 협박하고 조르다노 부르노를 화형시키고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사냥으로 수십만 명을 고문하고 화형시킨 그리고 면죄부를 팔아먹은, 서양인들에 의한 노예제도와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에서의 제국주의적 식민지수탈정책과 2차세계대전 중의 나치에 의한 600만 유대인 탄압과 대학살을 승인하고 묵인하고 방관한, 그리고 신자들에게 성경을 차단한, 몽매주의의 온상(溫床)이던 가톨릭은 종교개혁 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마침내 프란체스코 교황 같은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성직자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는데, 대한민국의 불교는 왜 끝없이 퇴화하고 있는가? 성철스님 재세 시에 조계종 고위승려들이 도박과 음주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도대체, 일부승려들은 과학문명기기인 비행기를 타고 어디로 무엇을 하러, 그리고 무슨 마음으로, 남의 머리칼(가발)과 속복(俗服)과 남의 돈(시줏돈)을 들고서 남섬부주 수미산과 (네바다) 사막과 바다 위를 함부로 날아다니시는가?

교보문교 영풍문고 등의 대형서점에 가보라. 불교 신간서적들은 기독교의 사분의 일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초라하기가 마치 구멍가게 같다. 이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왜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가? 불교인들의 사유활동이 빈약해서 저술활동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별대우 같은 불의에 항거할 용기가 없기 때문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대자대비하기 때문인가?

대한민국 불교는 왜 침체상태에 빠져있나? 어찌하여 사람들은 한반도를 뒤로하고 다람살라로 또는 남방으로 몰려가는가? 신비주의 때문인가, 아니면 몽매주의(蒙昧主義) 때문인가? 아니면 고위성직자들의 파렴치한 행위, 부패, 비리 때문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부는 바람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되는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전(全) 세계에서 오로지 대한민국에만 남아있는 위대한 선불교의 전통은 정녕 죽고 만 것인가? 중국의 선장(禪匠)들이 중국대륙에 불교혁명을 일으켰듯이, 이 땅에 새로운 불교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진실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마지막으로, 눈부신 현대과학적 발견들을 기를 쓰고 거부하는 고집쟁이 몽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아래 인용하는 칼 세이건의 발언은 부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일치하지 않는가?

“나에게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망상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불안감을 해소해줄지라도, 망상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과학은 어둠속의 촛불이다.” <<칼 세이건>>
   
“For me, it is far better to grasp the Universe as it really is than to persist in delusion, however satisfying and reassuring.”  ― Carl Sagan, The Demon-Haunted World: Science as a Candle in the Dark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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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4-09-13 13:52:41
<이 댓글은 작성자가 삭제했습니다>라는 글이 없다는 것은 내가 지운게 아니고
게시판 관리자가 임의로 삭제했다는 얘기다.
난 욕설을 쓰지 않았고, 상업광고성 글, 불필요한 링크를 걸지 않았다.

불교는 무아와 윤회라는 양날개로 가르침을 펼친다.
불교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치고 무아와 윤회를 쉽게 설명하고
두 사상이 퍼펙트하게 양립한다고 말한다.
반면 어설프게 공부한 사람들은
무아이므로 윤회할 것도 무엇도 없다, 부처님은 무아라는 가르침으로 윤회를 부정한 것이다,라는
불교교학 내용을 전면부정하기 까지 한다.

윤회의 실상(고)을 제시하고 그 원인(집)을 밝히고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곳(멸)을 제시하고
그 방법(도)을 가르쳐준게 석가모니의 초기불교다.
초기불교 도처에 무아,윤회 두가지 모두 설법하신다.

그런데 강병균은 무아만 옳다고 주장(뇌신경학,유전학을 동원)하면서 식(識)을 부정한다.
지렁이와 인간의 식이 같냐 블라블라 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다. 만일 환생(재생)이니 중음신이니 이런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과학적인 미신을 믿으면 무지몽매한 것이라고 단언까지 한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 불교 경전(근본교학)에도 식의 존재를 말한다.
현생이 마감하는 순간 식이 떠나 다음생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대승의 용수보살도 다양한 비유를 통해 같은 말을 했다. 다만 동북아시아 권에선 죽는 순간 식이 바로 다음생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라 중심신으로 49일동안 머무르는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어쨌든 초기불교나 대승 밀교까지 윤회를 전제하고 다양한 가르침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강병균교수는 오로지 무아만 남겨놓고 나머지 교학은 다 날려버린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달리하는 불자들에겐 무지몽매라는 굴레를 씌워 비난한다. 굉장히 폭력적이다.

난 강병균교수에게 윤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달라고 했다.
아마 그는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윤회할 무엇이 있다면 이는 영혼이나 아트만일 것이고 이는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니까.
내가 무지몽매한 자라면 강병균교수는 윤회를 부정하고 윤회를 전제로 가르침을 펼친 석가모니 붓다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까지 반대하는 전지전능한 현자쯤 되지 않을까.

아마도 강교수님은 2014-09-12 09:55:39
질문-님 댓글 = 나의 비판이 잘못됐다면 강병균교수는 무아와 윤회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초기경 도처에 나온 부처님이 인정한 윤회는 비과학적 미신이라서 틀렸다는 것인지?

경전에 분명하게 나오는 “윤회”의 언명을 고대인을 위한 동화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경전 상의 “초월성 담론들”을 근대적 사유의 기준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대철학 담론들의 사유로만 보더라도 당연히 그런 엉성한 근대적 기준은 쉽게 무화 됩니다만.)

그래서 질문-님의 질문을 읽다 보니 갈대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위관규천을 뛰어 넘는 사유의 역사들이 떠오르네요.

무리수 발견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부정 당하죠 ~ 그래서 대수학을 버리고 기하학으로 갑니다. 음수를 인정하는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수를 실체가 아닌 형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수학은 자유로워집니다. 허수를 발견한 후에는, 방정식-대수학의 세계도 날개를 달고 날아 보려 시도합니다. …물론 그 한계가 밝혀짐과 동시에 수학은 더욱 더 자유로워지고요. 무한을 셈한 칸토어. 그리고 수학적 실체론관의 세계를 “아작”낸 괴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수의 발견과 확장의 역사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이전에는 “완전-개무시^^”됩니다. 천문학의 역사에서도 행성 발견의 과정이 그렇습니다. 계산으로는 있는데 안 보입니다. 결국은 발견하거나, 다른 과정으로 그것을 설명해내든지요.

이성의 역사에서도 이처럼 무시당하던 것들이 언젠가는 수면으로 떠오르는 과정이 있었답니다.
하물며 비-이성 또는 초-이성의 세계는 어떠할까요?

신비주의(?) 또는 철학으로 향하는 현대 우주론과 물리학 또는 현대물리수학의 전개 과정을 보거나, 또는 근대적 사유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작금의 현대적 사유로써 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서 바라볼 수 있게 된 인간 사유의 여유로움까지 고려하면, 불교-경전의 “전-근대성”을 아마도 “포스트-현대”로 가는 “Gate”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그다지 “비-합리”의 사유는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장이 너무 기네요^^ ~ 저의 경우는 확신이며 그러한 사유 과정 자체가 “신앙”의 근거가 됩니다만.)

링스 2014-09-11 14:29:58
요즘 지식인연하는 분들의 특징이 선불교비판이죠. 뭔가 있어보이고 좋죠. ㅋㅋ

소크라테스처럼 2014-09-08 16:27:06

“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유를 하게 되는 경우 존재론적으로는 “반드시” 2가지 입장에 처합니다.
유물론 또는 유심론. (아님 무사유-무식하든지^^. 이것은 입장이 아닙니다.)
~ 사유적인 중도-무식^^을 논하고 설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수행-증득자’입니다.

사유의 역사에서 유물론은 마이너리그입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그렇고, 인도철학의 역사에서도, 동아시아철학의 역사에서도
유물론, 그들은 마이너리그입니다. 유심론 또는 정신-우선 주의가 메이저리그랍니다.
---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일차적으로는 “마음이 있네!”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유-제1원리입니다. 유물론입니까?

근대실체론-과학주의에 대한 대응의 결과 사유적 대전환을 이룬 현대철학이 유물론입디까?
--- 365일 내내 “사유의 골방”에 쳐 박혀 사시는 그 분 원불자께서 대답 한 번 해 보시죠?

소크라테스처럼 2014-09-08 16:26:09

21세기인 지금에도 정신과 물질의 통일장을 규명하지 못한(?) 관계로, 또는 동의하지 않는 관계로 세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확실하게 포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간”에서는요. ~ 과학자/의학자들은 유물론-물리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철학의 사유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유의 길을 끝까지 걷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비-전공인 관계로). 반면에 철학적 사유를 전공한 사람들 중에 또는 방법론적인 사유라는 것을 원칙대로 해 본 사람들 중에 유물론으로 귀결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디까? 극-소-수입니다. 또 하나의 힌트인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할 때, 유물론과 유심론은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우리는 양해할 수 있겠죠. 그래서 “입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 그리고, 그래서, “물리주의-유물론자들이여, 유물론의 몽매주의에서 벗어나 명석-판명하게 (일본애들의 번역어투입니다만), 당신들의 입장을 그리고 우리들의 입장을 분별하여 살펴 보라!”고 애원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거랍니다. (글을 쓰실 때 많이 배려하시라고요.) 거기는 북한이고, 여기는 남한이며, 당신은 일본인이고 나는 한국인이라네. ~ “평행선의 교차를 너무 일찍, 너무 무식하게^^ 꿈꾸지 말라!”는 뜻에서요.

불교의 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심론이 메이저이며, 물리주의-유물론적 불-교 해석은 마이너입니다.
--- “마음-우선” 몽매주의 불자 대중의 뇌를 계몽하시려고요? 깨몽! 꿈 깨십시오, 부디.

“존재론”의 유물론과 유심론, 그 “두 입장” 중에서 “어느 입장”이 불교의 “경험-인식론적 해석”에 더 적합할지를 “역지사지”의 접근으로 사유해 보세요. (이 정도면 교조주의적 또는 근본주의적인 태도는 벗어난 거죠?) ~ 심심하시지 않을 겁니다. 장^^지집니다! (저, 손가락 이제 하나 남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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