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運)과 노력: 퀀텀인욕과 퀀텀자비: 중도인과
운(運)과 노력: 퀀텀인욕과 퀀텀자비: 중도인과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4.08.18 10:23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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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12

이 세상에 인과(因果)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운(우연, 행운, 불운)도 존재한다.

지금부터 예를 들어 보이겠다.

두 사람이 복권을 산 것은 노력이요, 둘 중에 한 사람만 당첨된 것은 운이다.
주사위가 우주의 업력(業力)을 받아서 1, 2, 3, 4, 5, 6 중의 특정한 숫자를 들어낼 리는 만무하므로 운이다: 그런 일은 뉴톤의 운동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층빌딩 100층에서 실족했는데, 초당 1mm의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추락하는 것이 (그래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일 역시 불가능하다.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복권을 죽을 때까지 매주 열장씩 30년 동안이나 산 것은 노력이요, 오히려 평생 한 장만 산 사람이 덜컥 일등에 당첨된 것은 운이다. 그렇게 열심히 산 당신이 당첨이 안 된 것은 정말 불운(不運 나쁜 운)이다. 복권당첨번호를 결정하는 추첨기계는 물리학의 역학에 의해서 작동하므로 우주의 업력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복권을 아예 한 장도 안 사면 절대 당첨될 일이 없으므로, 그 점에서 당첨은 ‘인과는 인과다’. 그러므로 복권당첨은 인과와 운의 오묘한 결합이다.

어떤 여인이 이상형의 남자를 소개받은 자리에서 기어코 나오려는 방구를 용을 써가며 참는 것은 노력이요, 하필이면,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가 아니라, 식사 중에 방구가 터진 것은 운이다. 특히 냄새가 지독하다면 더욱 운이다. 그것도 화장실에 가서 처리하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드는 순간에 터진다면, 정말 운이다. 절묘한 타이밍의 악운(惡運)이다. 남자가 호감을 표하는 중에 터졌다면 그리고 끔찍한 냄새가 반경 수 미터를 포위했다면, 정말 비운(悲運)이다. 이런 여인을 비운(悲運)의 여인이라 부른다.

평소 다이어트, 요가, 산보, 등산, 골프에다가 독서로 다지고 쌓은 건강과 교양은, 종종 방구터짐 같은 ‘순수한’ 운 (純運)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나(날씬하고 교양 있는 여자)는 상대방이 너무 맘에 드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뚱보와 속된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런 웃기는 상황은 분명 운(戱運)이다.

지인이, 무인속도측정기가 없던 시절,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경찰에게 속도위반으로 잡혔다. 앞뒤로 쌩쌩 달리는 차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심하고 과속하다 벌어진 일이다. 묻혀 달리면 안 잡힐까 싶어, 빠르게 달리되 다른 차들에 묻혀 달린 것은 노력이요, 하필이면 자기만 잡히는 것은 운이다. 다른 차들은 놔두고 왜 자기만 잡느냐는 항의에 교통경찰이 하는 말, “세렝게티 초원에서 사자가, 죽어라고 도망가는 물소를 몇 마리나 잡습니까? 그중 딱 한 마리만 잡지요.” 살아오면서 경찰에게서 들은 가장 지혜로운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필이면 잡힌 물소가 자기라니 그게 바로 운(苦運)이다. 

그런데 지인의 항변이다. “속도위반딱지를 떼이는 것을 꼭 운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분이 20여 년 전에 포항에서 울진으로 가는 국도에서 교통경찰에게 속도위반으로 걸렸다. 선처해달라고 애원하자, 멋진 흰색 할리데이비슨을 탄 검은색 선글라스의 경찰이 하는 말, “안됩니다. 한사람 잡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당신을 5시간이나 기다렸어요. 요즘 운전자들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에요. 어떨 때는 하루 종일 기다려도 한 사람도 못 잡아요. 그러니 그냥 보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고비(?)로 경찰조직에 5천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그런데 그건 교통경찰의 입장에서 볼 때나 노력이지, 지인의 입장에서는 운이 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가?

한 사람은 양산 만드는 기술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막신 만드는 기술을 익힌 것은 노력이나, 그 후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나막신바치가 망한 것은 운(乾運)이다. 운이 말라버린 것이다.

부지런한 종갓집 며느리가 수십 명 분 대가족 김장을 때맞추어 마친 것은 노력이요, 이상 기후로 그해 겨울이 유난히 따뜻해서 김치가 죄다 일찍 쉬어버린 것은 운(氣運)이다. 기후예측용 인공위성이 없던 조선시대에 특히 그러하다. 운은 과학의 발달에 따라 점점 더 먼 변경으로 쫓겨난다.

열심히 운동하고 소식하며 육식을 줄인 것은 노력이나, 하필이면 캐나다 여행 중에 별미라고 해서 모처럼 먹은 소고기 스테이크로 광우병에 걸려 요절한 것은 운(狂運)이다. 그날따라 입맛이 당겨서 먹은 오리고기로 조류독감에 걸려 죽는 것도 운이되, 비운(飛運)이다. 다 같이 먹었는데 자기만 걸렸다면 더욱 고약한 운이다. 물론, 고기를 먹은 것은 인(因)이나, 먹은 후에 자기만 탈이 난 것은 운이다. 세상은 인과가 운을 이끌며 추는 탱고이다. 운은 가끔 미쳐(狂) 날(飛)뛴다. 그러니, 그런 운은 광비운(狂飛運)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겨냥은 인과요 바람은 운이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왜 하필이면 그때 그 순간 그 방향으로 부는지도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활을 쏘아 과녁에 맞히는 것은 인과가 우연과 추는 왈츠이다. 

보시(布施) 등 육바라밀을 닦으며 사는 것은 노력이요, 그렇게 열심히 살던 사람이 길을 가다 보도로 돌진한 벤츠에 치여 죽은 것은 운이다. 잘 차려입은 운전사도 죽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무보험에다가 빚만 잔뜩 있는 사람이었다면, 피해자는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유족은 지독히 운이 없는 것이다. 이런 운은 벽운(霹運)이라 불린다.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노력이요, 그 돈으로 모처럼 쇼핑하러 간 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운이다. 백화점주인 입장에서는 붕운(崩運)이요, 손님입장에서는 압운(押運)이다. 

두 사람이 밭에 나갔다. 밭에서 일하던 중에 한 사람은 수박만한 운석이 자기 발밑에 떨어지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머리위에 떨어졌다. 두 사람이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한 것은 노력이고, 발밑에 떨어진 운석으로 횡재(橫材)를 하는 것과 머리위에 떨어진 운석으로 횡사(橫死)를 하는 것은, 둘 다 ‘횡(橫 뜻밖)’으로 평등한 운(橫運)이다.

나무가 햇빛받기 경쟁을 하며 열심히 자란 것은 노력이요, 씨앗시절에 울진 대왕소나무 옆으로 날려 온 것은 운이다. 유명 소나무사진작가 장국현이 대왕소나무의 멋들어진 풍채를 가린다고 주변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장국현의 사주(使嗾)를 받은 시골사람들에 의해 톱질을 당한, 그런 운 없는 소나무가 10그루를 넘었다. 그가 그런 짓을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도 모를진대 하물며 소나무래야. 그러므로 순(純) 운이다. 이 진짜 운 없는 나무들은 풍운(風運)의 소나무들이다.

이것저것 열심히 준비해서 해외유학을 간 것은 노력이나, 결국 학업을 중단시킨 IMF가 터진 것은 운(洶運)이다.

서봉수가 조훈현이 태어날 무렵에 같이 태어난 것은 상서(詳徐)롭지 못한 운이지만,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아나는 잡초처럼, 좌절하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세 판에 한 판정도로 판맛을 본 것은 노력이다. (2010년 현재 조서 승률은 246:120이다. 많이도 싸웠다!)

만약 조훈현이 없었다면 국내 타이틀은 모두 서봉수 차지였겠지만, 세계최고 국제기전 응씨배우승은 불가능했으리라. 서가 조에게 얻어맞아가며 배운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쌍(不詳)한 서봉수가 조훈현을 만난 것은 신운(辛運)이다.

그(녀)를 만난 것은 운이요, 서로 증오하게 된 것은 인과이다. 얼마나 서로 상대방 마음을 후벼 파는 말들을 해댔겠는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난 것은 운이지만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은 인과다. 서로 위해주는 마음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전쟁’은 ‘인과와 운의 놀이터’이다.

얼굴도 모르는 처녀(총각)에게 장가들라는 부모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노력이나, 첫날밤 어여쁜 색시(잘생긴 신랑)의 얼굴을 확인한 것은 운이다, 절대로 복(福)이 아니다. 반대의 (밉고 못생긴) 경우도 평등하게 같은 횟수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듯한 용모와 제정신에다) 성품까지 좋다면 대운(大運)이며, 반대의 경우는 대단한 불운(大凶)이다. 이 점에서 모자란 부인을 얻은 퇴계선생은 불운했다. 하지만 드높은 도(道)로 운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유지했다. 그래서 도를 닦아야 한다. 불운소화제로는 도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걸 도운(道運)이라고 한다.

비행기시간에 늦게 일어났지만 부랴부랴 준비해서 열심히 공항으로 나간 것은 노력이요, 그날따라 비행기가 연착을 해서 비행기를 놓치지 않은 것은 행운(幸運)이다. 행운(幸運)에서 대들보(-)를 하나 빼면 간당간당 위태로운 신운(辛運)이다. 탑승 전 심한 배탈로 화장실에 가서 한참 차례를 기다린 끝에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기고 겨우 변기에 엉덩이를 올렸으나,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그만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이륙 후 추락했다면 신운(辛運)이다; 신승(辛乘 변기를 어렵게 탐)이자 신운(辛運)이다. 배탈이 아니라, 그 전날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현몽하셔서 탑승을 막았다면 신운(神運)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6월 5일 밤에 미군 공수부대가 노르망디로 뛰어내린 것은 노력이었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불이 난 농가가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서 독일군에게 조준살해당한 것은 악천운(惡天運)이다. 그런데 교회첨탑에 걸려 살아난 존 스틸 이등병은 천운(天運)이다.

K2 암벽등반 중 설사가 터지면,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바지를 벗고 개미가 개미굴 침입자에게 강산성(强酸性)액체를 발사하듯이 급히 발사해야 한다. 등반장비와 줄로 얽힌 등산복을 낑낑대며 벗는 것은 노력이요, 그런 사람 바로 밑에 자리잡고 줄에 매달린 채로 똥벼락을 맞는 것은 운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8,000미터 이상의 14좌 완등(完登)에 빛나는 세계적인 등반가 엄홍길에게 일어났다고 한다. 뒤집어쓴 인분이 살을 에는 추위에 얼어붙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불운이다. 바람이 돌연 진로를 변경하고, 그 바람에 낙하하던 물똥이 얼굴을 향해 돌진하면 대단한 불운이다. 그런 불운은 사바세계 최고의 불운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본 등산가가 여성이었다면 등반사고로 동료들이 다 죽지 않는 한 절대 시집을 못가리라. 그 복수(複數)의 간지러운 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불운이랴. 이런 운은 온 세상(世)에 고약한 액체(氵)를 뿌리는 세운(泄運)이라 불리어야 합당하다.

그럼 인과론은 엉터리인가? 그렇지 않다. 확률론적으로 보면 된다. 우리 삶에는 무수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 중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보다 인과관계로 일어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특히 다단계의 인과적 고리로 연결된 복합사건은 우연으로 이루어질 확률이 지극히 작다. 전체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개별사건이 일어날 확률들의 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철저해야 한다. 곱의 확률에서는, 하나라도 확률이 작으면 나머지에 즉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하나가 영이면, 전체도 영이다. 어떤 수에도 영을 곱하면 영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곱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이렇듯, 여러 운의 합동으로 일어나기에, 몹시 일어나기 힘든 운이 발생하는 것을 ‘승운(乘運)을 입는다’ 한다. 물론, 부정적으로는 ‘승운을 못 입는다’고 표현한다. 참고로, 승(乘)은 곱할 승자이다.

기가(棋家)에서 말하기를, ‘대마가 죽는 것은 기적’이라고 한다. 살길이 무수했으나, 즉 한 번만이라도 살길을 택했으면 되는데, 수십 번의 살길을 놓치고 수십 번을 모두 죽을 길로 갔으니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는 말이다. ‘확률의 곱의 법칙’ 측면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 아마추어 가릴 것 없이 수없이 죽어본 사람들의 자조적인 한탄이다. 바둑이건 인생이건 수없이 생사를 거듭해보면, 즉 수없이 윤회를 해보면 지혜가 생기는 법이다.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바둑기사 본인방(本人坊) 도사쿠(道策, 1677~1702년)가 죽음에 임박해 뱉은 명언이 있다. “이게 바둑이라면 패라도 걸어볼 텐데...”

뿐만 아니라 운은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으나 인과는 그렇지 않다. 인과는 법칙이므로 스위치를 올리고내리는 것과 같다. 스위치를 올리고 내림에 따라 어김없이 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인과도 그러하다. 사람과 달리 인과는 배신이 없다. 그리고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는 것은 우리 의지이다.

무명은 운이요, 해탈은 노력이다. 오해가 없게 자세히 표현하면 이렇다: 초기치(initial value 최초의 상태)로서의 무명(無明 번뇌를 일으키는 어리석음, 연기와 인과에 어두운 것)은 운이요, 최종(final output)값으로서의 해탈(解脫 번뇌로부터 벗어남, 연기와 인과에 밝은 것)은 노력이다. 해탈한 중생이 퇴락해서 무명중생이 되었을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므로, 중생은 무명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명명백백하다; 따라서 주어진 초기치로서의 무명은 운이다. 출생 시 머리가 안 좋게 태어난 것은 운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번뇌를 해탈한 것은 노력이다. 그러므로 ‘무명’의 풀이는 다음과 같이 바꿈직도 하다: 무명은 연기와 인과와 그리고 ‘운’에 어두운 것이다. 가끔, 운에 절망한 나머지 인과마저 버리는 일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머리가 나쁘기로 유명한 주리반특을 보라. 주리반특은 한 문장도 외우지 못할 정도로 우둔했으나, 열심히 노력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아둔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불자들이 귀감(龜鑑)으로 삼아야할 사람은 용수보살이나 성철스님이 아니라 주리반특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째지는 법이다. 불상을 만들어 세울 바에야, 절마다 주리반특 상을 세우고 롤모델(role model)로 삼아야한다.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성문聲聞 주리반특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보다 훨씬 총명하므로 깨달음이 보장되어있다. 그러니 열심히 정진하라.” 어찌 고맙고 따사로운 우직한 격려가 아닐소냐!) 그런데 주리반특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남자)의 적은 여자(남자)라더니, 우둔한 중생의 적은 우둔한 중생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제자로서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일도 그렇고 영적수행도 그렇고 모두 노력이다. 그러고도 안 되면 ‘이번에는 운이 없는가 보다’, 혹은 ‘지독히도 운이 없구나’ 하고 다시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언제까지 해야 할까? 정답은, ‘운이 찾아올 때까지’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윤회론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시간이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된다, 언젠가!

‘운을 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道)이다. 도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道無不平 不運不關 常維持捨 卽平常心 或陽或陰 都無相關 向上一路 是爲精進). 노력이 부족하거나 단지 운이 없기 때문이다. 해탈은 노력으로 오지만, 노력에 결과가 안 따라주어도, ‘운이 없는 것이려니’ 하면서, 초연하게 다음 노력을 하는 것이 도(道)이다. 세상사도 마찬가지이다.

카인이나 아벨이나 둘 다 열심히 농사짓고 목축을 한 것은 노력이나, 야훼 하나님이 카인의 곡물을 거절하고 아벨의 고기를 받은 것은 카인입장에서는 운이다. 야훼가 고기(태우는 냄새 燔祭)를 좋아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야훼가 잡식성이었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다. 이 경우 카인과 아벨은 사이좋게 합동으로 야훼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상은 좌곡우육左穀右肉으로 차리면 된다. 아니면 양머리국밥으로 통일하든지. 차라리 양날고기 비빔밥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메뉴를 주문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뿐인 형이 바로 밑 동생을 죽이다니 도가 낮아도 한참 낮다. 도가 중간 정도만 되어도, ‘에이, 운이 없네’ 하고 말 일이었다.

우리가 동양에 태어나 사생자부(四生慈父)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타인과 동물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사는 것은 홍복(洪福)이다. 하지만 이 일은 상당부분 운이다. 이게 운이 아니라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불경에서 말하기를 ‘불법을 만나는 것은 맹귀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별로 복을 지은 바 없는 우리가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한반도 중에서도 남쪽 반 토막인 대한민국에 태어나 불법을 만난 것이 바로 ‘맹귀우목’이다, 즉 다름 아닌 우리가 맹귀(盲龜)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만난 이런 홍복은 맹렬(盲烈)한 맹운(盲運)이다!

‘운을 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욕(忍辱)과 자비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생이나 현생에 스스로 만든 업으로 인해서 생긴 ‘마땅히 받아야할 욕됨’을 참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자역학적인 불확정성(quantum uncertainty)으로 발생한 무작위(random) 욕됨'을 참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다. 이것을 무연인욕(無緣 忍辱), 무연자비심(無緣 慈悲心)이라고 한다. 인과의 사슬을 벗어난 운(運)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함부로 양자역학 용어를 빌려와 ‘양자인욕(量子忍辱 퀀텀인욕)’ 또는 ‘양자자비심(量子慈悲心 퀀텀자비심)’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예수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운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진정한 인욕을 닦을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자비심이 가능하다. 보복과 보답이라는 인과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자 자비심이다: 소위 무위인욕과 무위자비심이다.

운이건 불운이건 간에 우리에게 던져진 그 운·불운을 바라보고 포용하는 시각과 마음은 온전히 우리 몫이다. 그래서 구도와 해탈이 가능한 것이다. 

Tao does not complain about anything whether it be inevitable or fortuitous. Unluck does not matter either. Tao always keeps equanimity. This is the so-called spiritual exercise and emancipation.

극단적인 인과론은 ‘모든 것이 인과이고, 운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 극단적인 인과론의 대척점(對蹠點 antipode)에는 극단적인 우연론이 있다. 모든 일이 우연이라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유전학과 ‘우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인 현대과학의 눈부신 성공은 극단적인 우연론을 부정한다. 이렇듯 극단적인 우연론은 명백히 거짓이므로, 그 대척점에 있는 극단적인 인과론 역시 (양자역학이 주장하고 있듯이) 거짓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흔히 자연은 쌍으로 존재하고, 쌍 사이에는 대칭성(symmetry)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형태의) ‘인과와 우연’은 하나의 쌍이기에 한쪽이 거짓이라면 다른 쪽도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즉 인과론은 극단적인 형태로서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인과와 운이 공존한다는 말이다. ‘인과가 주인이 되어 운을 이끈다’는 이론이 중도인과(中道因果)론이다.

극단적인 인과론에 빠지면, 자신의 불행을 모두 전생의 업보로 돌리는 결정론 내지는 패배주의로 흐를 수 있다. (증시에서 깡통계좌에 근접하면 만회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지듯이, 큰 악업을 쌓은 사람은 인과의 힘만으로는, 즉 자력만으로는 원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인이나 귀인을, 즉 선지식이나 부처를 조우遭遇하는 것은 급등주처럼 대단한 행운이다.) 또는 불행하고 고독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지고, 반대로 돈과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동경이 생길 수 있다.

극단적인 인과론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큰 복을 누릴 선업을 쌓은 것이 분명하고, 그렇지 못한 자기는 선업을 쌓지 못한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철학은 정치·경제·사회제도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는다. 중도인과론의 장점은 이런 결점을 완화시키며 동시에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인과론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의 멋이 있다. 그리고 운을 허용하면 우리가 흔히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현상인 ‘선인이 망하고 악인이 성공하는 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인과론이 이런 일을 설명하려고 고안된 이론이기는 하지만, 쌍대적으로 운도 이런 일을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과관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주에, 운이 좀 섞이는 것이 우주를 부드럽게 돌아가게 만든다.

중도인과론(中道因果論)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숨 좀 쉬고 삽시다’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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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태어난거 자체가 이미 2014-08-19 14:16:23
노력의 결과라고 해도
운의 결과라고 해도
그 결과(행,불행)는 무상할 뿐이고 지속되지 않는다.
숨쉬는 것과 하등 관계도 없다.
불자라면 자신에게 닥친 사태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불행은 슬기롭게 행은 아만하지 않게 나누면 된다.
노력의 결과가 안나왔다고 인과를 믿지 않거나
노력없는 뜻밖의 행운에 우쭐해할 필요도 없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 다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간이 경험했다는 모든 일들...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운과 인과, 그리고 연기법 2014-08-19 13:07:39
물질계 사건의 진행은 “확률”로 표현합니다. 희귀한 각종 확률들을 “운”이라 하고요.
= 칼로 찔렀다 + 죽었다. = 물질/운동적 확률 1%가 성취된 것입니다. 칼로 찔렀다고 다 죽지는 않으니까요. --- 운이 무척 나쁜 경우이군요.

정신계 사건의 진행은 “인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 나쁜 말을 했다 + 나쁜 마음을 이미!~지녔던 것입니다. = 100%로요. --- 운이 무척 나쁜 건가요? 나쁜 맘을 먹었더니, 나쁜 말과 나쁜 행동이 나와버리니 말입니다. 그럴 수 있겠네요^^.

불교는 정신계 사건들의 진행에 관한 내용들이 그 주제입니다.
색의 사건들은 곁-다리랍니다. 운이 좋거나 아님 운이 나쁘거나 ~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정신계와 물질계의 분리 사유가 별로 맘에 드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는 그 이해의 능력이 없으시든지요. 아니 그 이해를 거부하는 갈애가 더 크겠지요. ~ 그러나 그것들의 분리적 사량분별의 이유가 무엇인지, 또 비-분리적 사유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으실 겁니다. 그러한 충분한 사색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정신과 물질의 교호에 대한 담론을 펼치시면 어떨까 하고 바랩니다.

<< 이 세상에 인과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운(우연, 행운, 불운)도 존재한다. >>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에는 인과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연기법입니다.
“운”은 물질의 법입니다. 운이 포함된 세상을 보기를 정말로 더 원하시나요?
그곳은 “부처님이 무기하신 세계”입니다. 우리 중생이 너무도 잘 아는 세계이기 때문에요.

전설따라 삼천리 2014-08-18 18: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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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은 운으로 받아들여라. 그것이 인욕과 자비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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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를 과보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교의 인욕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과보를 운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바로 물질-원자론적/운동-확률론적 세계관이라는 단멸적 전제의 반영 아닌가요?
…그래서 예를 든 사례들이 모두 인과와는 무관한, 가급적 무작위-확률의 경우들이고요.

과보가 과보가 아니고,
과보는 윤회-전생과 무관한 금생의 물질-운동적 확률이고 무작위의 운이다!
~ 라는 주장을 연기적 행위의 인과와 독립하여 하려는 것 아닌가요?
더불어 윤회의 사유는 전설따라 삼천리가 되고요.

과보를 과보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교의 인욕이고 그것이 전부 아닙니까?
--- 저는 예!~라고 답하렵니다.

바라밀 2014-08-18 18:13:00
초기불교 순수주의자들이 유일신교의 수장 교황을 부러워하고 중음신이 이몸저몸 14번 갈아탄 달라이라마를 초청하자고 하는 것은 모순아닌가? 오히려 불교의 '근본'도 모른다고 욕해야 되지 않나?

레고를 즐겨라! 2014-08-18 18:07:07
운을 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욕(忍辱)과 자비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생이나 현생에 스스로 만든 업으로 인해서 생긴 ‘마땅히 받아야 할 욕됨’을 참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자역학적인 불확정성(quantum uncertainty)으로 발생한 무작위(random) 욕됨'을 참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다. 이것을 무연인욕(無緣 忍辱), 무연자비심(無緣 慈悲心)이라고 한다. 인과의 사슬을 벗어난 운(運)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함부로 양자역학 용어를 빌려와 ‘양자인욕(量子忍辱 퀀텀인욕)’ 또는 ‘양자자비심(量子慈悲心 퀀텀자비심)’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운은 운으로 받아들여라.
자업자득의 욕됨의 “인과적 과보”를 참는 것보다,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으로 인한 욕됨의 “우연적 과보”을 참는 것이 진정한 인욕이다. (양자-인욕, 양자-자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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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허황한 분이시네요. 어휘들의 환망공상적 창조 능력도 대단하시고, 그리고 사유의 블록들은 이분에게 아마도 레고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 분은 도대체 불교의 가르침이나 철학의 사유들을 물질-레고의 개념과 뒤섞어 버리는 바로 그 버릇이 유물론-딱지를 자신의 이마에 낙인 한다는 것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아니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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