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4.06.16 13:3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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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3. 종교는 행복위한 방편일뿐

종교인들은 ‘내세가 없다면 지금 제멋대로 살다가 가면 될 것’이라며 ‘내세가 없다는 주장’을 공격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적인 주장이다. 그리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리 할 일이다.

내세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지금 그리하고 사는가? 함부로 살고 있는가?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 수천 년 동안 끔찍한 전쟁을 벌여온 이유는 무엇인가? 각자 서로 다른 내세를 믿어서 상대방의 내세를 믿지 않기 때문인가?

세상의 범죄를 억제하는 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현세의 법률 관습 문화 양심(良心 착한 마음 good heart)이다. 세상의 전쟁을 억제하는 것은 힘의 우열과 손익계산과 보복의 위험이다. 내세는 죽은 다음에 올 일이요 신의 응징은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이니, 둘 다 더디고 기약없는 일이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스스로 응징하고자 전쟁을 일으킨다. 응징이나 보복이외에 종교인이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현세의 국제정치적인 구도나 개인의 세속적인 철학과 이익추구 때문이었으며, 내세에 대한 믿음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인들이 전쟁을 더 즐겼다는 증거도 있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였다. 유럽기독교인들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남북(南北)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들은 이들의 창조는 하나님의 실수라고까지 믿었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탐욕 앞에서는, 특히 집단적인 탐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지금 유럽이 역사상 최장기간인 근 70년의 평화를 누리는 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 덕이 아니다. 유럽공동체(EU)라는, 종교가 멸시해온 ‘돈’이 엮은 ‘경제적 결속’이 낳은 평화이다. 결코 내세에 대한 믿음이 낳은 평화가 아니다. 현재 유럽인 중 무신론자 비율은 역사상 최고수준이다. 역사적으로, 종교인구수와 평화는 반비례한다. 

내세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이천년 동안 자기들끼리 수없이 전쟁을 벌여온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교에 뿌리를 둔 같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회교, 유대교가 서로 죽이겠다고 지상을 전쟁으로 어지럽혔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중세유럽 기독교가 회교를 상대로 벌인 200년에 걸친 8차례의 십자군 전쟁과, 20세기에 회교와 유대인들이 벌인 4차례 중동전쟁이다.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을 응징하기 위해서 중동 산유국들이 일으킨 오일파동으로, 수천 년 묵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허리띠 조여매고 일하던 대한민국은 하마터면 부도가 날 뻔했다.

같은 알라를 믿는 회교국가인 이란과 이라크는 8년 동안 화학무기까지 동원하여 형제 모슬렘들을 살육하며 죽기살기로 전쟁을 벌였다. 같은 회교이지만, 한쪽은 수니파이고 다른 쪽은 시아파이다. 지난 70년간 가장 전쟁을 많이 벌인 국가는 전세계에서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다. 베트남전과 두 차례의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내세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과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다.

우리가 지금 약자를 돕고 약탈자를 응징하고 살인자 강도 도둑을 벌주는 것은, ‘내세가 있다고 믿어서 하는 일이고 내세가 없다고 믿으면 안 할 일’인가? 내세라는 개념조차 없는 코끼리와 침팬지와 물소도 나름대로 정의란 무엇인지 안다. 사육사들이 침팬지가 내놓는 돌멩이 개수만큼 바나나를 받게 침팬지들을 훈련시켰다. 어느 날 자기는 돌멩이 하나에 바나나를 한 개 받았는데 동료가 돌멩이 하나에 바나나를 여러 개 받는 것을 목격하고는 분개해서 자기 바나나를 땅에 내동댕이친 침팬지의 사례가 있다.

몽구스는 내세에 대한 신앙이나 종교가 없어도, 단결된 사회를 이루고 상부상조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만든다. 몽구스를 독수리나 맹수로부터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의 단결과 조직의 힘이며, 몽구스들이 다른 몽구스를 죽이고 강탈하지 않는 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현세(유지)에 대한 믿음이다.

보초서는 이타적인 몽구스가 독수리의 내습을 경고하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독수리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 몽구스가 내세를 믿어서 그리 하는 것은 아니다. 몽구스에게는 천국행은 물론이거니와 부활이라는 축복도 없다! 하나님은 몽구스를 배려한 적이 결코 없다. 하나님이 소 양 염소 돼지가 심지어 인간을 보호하고 충성을 바치는 개까지 인간에게 잡아먹히게 장려하거나 방치함을 보면, 하나님이 들판의 보잘 것 없는 몽구스를 배려할 이유는 나변에도 없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예수가 ‘공중의 새가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살고, 들판의 백합이 길쌈하지 않고도 옷을 입는다’고 말한 것은 궤변이거나 무식의 발로이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누 얼룩말 물소가 사자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장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발언이다(현명한 랍비 예수가 그리 말했을 리 만무하다. 아마 제자들이 슬쩍 자기생각을 적어놓은 것이리라). 당시에 ‘동물의 왕국’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이 없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진돗개 한 마리만 키워 봐도, 새가 개에게 얼마나 자주 사냥 당하는지 목격할 수 있다. 새는 살쾡이, 고양이, 뱀에게도 사냥 당한다. 같은 조류인 매에게도 사냥을 당한다. 알이 먹히는 것은 부지기수이다. 석가는 오히려 공중의 새가 매에게 잡아먹히는 참극을 목격하고 삶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동물들)이 아니라 같은 종(種)인 왕과 귀족들이라는 지배자들이다. (예수님 말씀에 고무되어 새나 백합처럼 들판에서 홀로 하나님의 보살핌아래 조용히 살려고 해도, 지배자들은 득달같이 좇아와서 세금이란 명목으로 빼앗아간다.) 현대적으로는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금융권력자들과 부패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다.

그리고 발이 달린 것도 아니라 도망갈 수 없는 야생백합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소, 양, 염소, 말, 토끼에게 뜯어 먹힌다. 해마다 한반도에 날아오는 황사는 중국북부 초원의 풀을 가축들이 다 뜯어먹어서 벌어진 사막화의 산물이다. 거기 풀은 다 살해당했다. 식물에게 의식이 없는 것은 축복이다. 만약 의식이 있다면, 식물은 토끼, 양, 염소, 말, 그리고 소가 다가오는 것을 보거나 느끼면, 혹은 멀리서 그들 초식동물의 그림자만 보아도,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그러면 식물이 파란 것은 항상 파랗게 질려있기 때문이라는 동화 같은 설명이 갑자기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리되면, 정신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식물의 의식은 설사 있다 해도 없애야할 판이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를 편애하거나 돌보는 분이 아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삶과 인간계와 자연계와 우주를 보는 우리의 시각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다. 잡아먹는 놈이건 잡아먹히는 놈이건 공히 노동을 해야 한다. 수고해야만 먹고사는 세렝게티의 사자와 누는 죽어라고 달려야 한다. 사자는 행여 굶어죽을세라 좇아가는 달리기를, 누는 잡아먹힐세라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달리기를 해야 한다. 거기 더해서, 누는 싱싱한 풀을 찾아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대장정(大長程)을 해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농경을 발명한 이래로 지난 일 만 년 동안 농사짓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이것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정의감을 발달시켰으며, 이런 과정은 내세와 전혀 관계가 없다. 진화의 과정을 거쳐 생성되고 발달한 습성과 정보가 물질적(생체) 유전자와 정신적(문화) 유전자에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이 발휘되면, 즉 물질적·정신적 유전자들의 합동작전이 펼쳐지면, 인류의 문화가 흐드러지게 꽃피게 되는 것이다.

‘내세가 없으면 지금 당장 자살하면 될 일’이라는 주장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지금 중국(47%)이나 일본인구(30%)의 수십 프로를 차지하는 무신론자들이 이 주장처럼 자살을 하는가? 오히려, 내세가 있다고 믿는 종교인이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한민국이 전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자살자 중 노년층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노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의 부실에 기인할 가능성이 있다. 자식에게 투자하느라 남은 재산이 없지만 자식으로부터 그만큼 보답을 받지 못하며, 그렇다고 달리 보상받을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내세와 전혀 관계가 없는 국가적인 경제력과 제도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국가적인 부와 공정한 분배제도이며 그 다음이 종교이다. 기본적인 부가 없으면 생계는 물론이거니와 의료보험과 국민연금 등이 유지되지 못한다. 북한주민들이 모두 유일신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그 처참한 삶의 질에는 변함이 없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백종교(百宗敎)가 무효다.

이슬람 자살폭탄 테러범들처럼 빨리 내세의 행복을 누리려고 자살하는 것이라면, 내세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내세를 믿는 (사이비)종교인들의 집단자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인민사원, 와코(Waco)의 다윗지파, 일본의 옴진리교, 우리나라의 오대양사건 등이 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벌인 집단자살의 사례가 있는가? 오히려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생각이 자살을 억제할 수 있다. 이것은 ‘단 하나뿐인 과자’나 ‘단 한 벌뿐인 외출복’이나 ‘단 한 켤레인 운동화’를 아껴먹고 아껴입고 아껴신는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단 하나뿐이라고(즉, 내세가 없다고) 절대로 함부로 먹거나 입지(즉, 자살하지) 않는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현세의 삶을 몹시 더 괴롭게 만들고 품위있는 임종을 막기도 한다.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에게 벌을 받아 지옥에 갈지 모른다는 공포로, 생명을 이어가는 불치병에 걸린 말기환자들은, 특히 회복력이 없는 노년층 암환자들은, 고문실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죄수와 같다. 이런 환자들에 대한 안락사허용에 대한 논의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중환자(重患者)들에 대한 아편이나 모르핀 등의 진통제투여와 같은 인도적인 맥락이다.

자살은 현세의 삶이 괴로워서 생기는 일이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동물들도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살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티니아의 통치자 니코메데스 왕이 죽자 그의 말이 먹이를 거부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개가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죽는 일은 옛부터 있어온 일이고, 지금도 종종 보도가 된다. 내세나 종교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동물이 자살을 하는 것은, 단지 현세의 삶이 참을 수 없도록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지금 당장 자살하면 될 일’이라는 주장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주장이다. (자살이 그리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오히려 계속 사는 것이 차라리 더 쉬운 일일 수 있다.) 이는 35억년 생물계의 존속이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생명체의 삶은 관성이다! 

종교는 참이 아니라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인간이 더 평화롭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위한 방편일 뿐이다. (유일신교적 종교들이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과연 전체적으로 인류에게 득이 되었는지는 대단한 의심거리이자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인류집단의식이 발명한 발명품일 뿐이다. 종교가 무너지고 무신론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시대는, 인간이 다음단계의 진화로 넘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발명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를 구원(救援)하는 것은 신이나 내세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깨인 마음(지성)과 의지와 행(行)이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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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 2018-05-07 17:50:52
님의 내세에 대한 믿음이 행복을 증진하는가? 잘 읽어 봄
언뜻보면 님의 말도 타당성이 있는것처럼 보이나
유일신교가 인간에게 끼친해악의 문제를 불교에게 뒤집어 씌우는것은
지성인으로서 무책임한 일이라고 봄
물론 불교도 스리랑카에서의 종교전쟁을 보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할순 없지만
그래도 기독교나 이슬람교 유태교 천주교에 비하면 평화를 내세우고 살생을 금기시하는
종교에 불교만한 종교가 또 있을까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는사람은 그에 대한 믿음이 있는사람보다
지성,의지, 진리의 실천의 문제에 대해 좀더 깨어 있고 책임감 있어요

종교인 2018-05-07 17:40:37
몽구스가 보초서는것 이타적이라서 아니라 본능으로서 자기종족 보호하기위한 수단( 사자 호랑이같은 무리들은 먹이사냥 외엔 각자 따로 지내지만 약한 짐승들은 생존을 위해 무리지어살듯이)

중세유럽의 기독교 십자군전쟁 이야기는 영화로도 재밌게 많이 나오죠
아주 흥미롭게 보곤 하며
그 십자군 전쟁도 종교를 내세운 각국가의 경제적인 이권다툼이라고 봐야죠.

중세시대엔 먹을것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서 (전쟁 통해 남의것을 약탈해서라도)
살아남아야할 명분이 있었어요

내세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난봉꾼으로 많이 살고
주변에 숱하게봄

릴리전과 종교 ~ 2014-09-11 15:28:50
다른 글들과 달리 본 글은 유일신앙-릴리전에 대한 비판의 내용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유일신앙, 무신론, 이신론, 진짜-종교 등 모두를 구별치 않으려는 한 단어의 “종교”로 통일시켜서 사용하고 있군요. 그래서 야기되는 은밀한 혼돈들과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단의 도가니적 연관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들이 있으실 겁니다.

# 종교는 참이 아니라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인간이 더 평화롭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인류집단의식이 발명한 발명품일 뿐이다.
종교가 무너지고 무신론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시대는,
인간이 다음 단계의 진화로 넘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발명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 분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단계적 진화를 위해, 새로운 발명품을 갈구하십니다.
2500년 전 발견된 “유일한 종-교”인 불-교는 이 분에게 단지 고대 발명품들 중 하나인 듯합니다.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나 내세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깨인 마음”(지성)과 “의지”와 “행”이다.

무늬에 속지 마시고, 소리에 속지 마시고. ~ 돌다리도 두들겨 가면서 윤회합시다.
--- 마음이 뭔지, 지성이 무엇인지, 의지는 어떤 관계를 맺는지, 행은 과연 무엇인지 ~~~
--- 불교 언어의 정의들이 이 분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그러한 검증의 관건일 것입니다.
…(사실 이 분의 글에는 언어적 정의의 엄밀성, 사유-전개/종합의 체계성 ~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만)

인류교를 아시나요? 2014-09-10 18:39:53
“종교는 참이 아니라 단지 방편일 뿐이다. 인간이 더 평화롭게 그리고 더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유일신교적 종교들이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과연 전체적으로 인류에게 득이 되었는지는 대단한 의심거리이자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인류집단의식이 발명한 발명품일 뿐이다. 종교가 무너지고 무신론자들이 급속히 증가하는 현시대는, 인간이 다음단계의 진화로 넘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발명품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나 내세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우리의 깨인 마음(지성)과 의지와 행이다.”

“나에게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망상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불안감을 해소해줄지라도, 망상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과학은 어둠 속의 촛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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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진보의 단계와 과학의 위계 (위키피디아-한글 = 오귀스트 콩트)
콩트는 지식의 삼단계법칙, 과학의 위계론을 『실증철학강의』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창안한 ‘사회물리학’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로 인간의 지식이 진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단계는 사회의 진보 단계처럼 진화론적으로 진행된다. 즉, 각 단계는 뛰어넘을 수 없고, 각 단계는 다음 단계의 조건을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콩트에 따르면 사회학은 바로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의 최고 정점에 선 학문이다. 왜 그런 것 일까? 콩트는 과학의 위계론을 통해 사회학의 성격과 위치를 규정짓는다. 그는 과학에는 위계가 있으며 총체적인 성격의 과학은 하부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전한다고 말한다. 콩트의 말에 따르면 천문학이 가장 먼저 마지막 단계인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고 물리학, 화학 등이 뒤를 이으며 이어서 유기체에 관한 학문인 생물학이나 생리학이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물리학'은 생물 유기체에 관한 연구에 기반 하여 사회적 유기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므로 가장 마지막에 실증적 단계에 도달한다. 이것은 사회물리학이 모든 과학 중 가장 총체적인 학문이며 모든 과학을 통합한다는 콩트의 생각을 대변한다. 또 이러한 생각들은 과거의 사회학에 남아있던 신학적, 형이상학적 잔재를 청산하고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사회학을 창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콩트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믿음은 근대 사회학의 창시자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고 있다.

당신보다 훨씬 전에 “인류교”라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라오. 이제는 식상해진 아이디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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