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불교를 준비하자는 처절한 몸부림”
“미래불교를 준비하자는 처절한 몸부림”
  • 여실지견
  • 승인 2014.02.10 17: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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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타운미팅] 불교개혁을 위한 타운미팅에 다녀와서/여실지견

불교개혁을 위한 타운미팅이 시작됐다. 지난 6일 불교여성개발원 교육관에서 진행된 1차 타운미팅은 ‘이 시대를 불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열렸다. 타운미팅 준비위원회는 2개월여 동안 주제선정과 마운미팅 진행을 위한 기획 회의를 가진 끝에 6일 첫 타운미팅을 가졌다. 타운미팅은 사전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획팀의 준비 부족도 있었지만, 누구나 자발적 참여가 원칙인 탓도 컸다.
첫 타운미팅 참가자는 모두 22명이었다. 그들은 타운미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보았을까. 첫 타운미팅은 2개조로 나뉘어 진행됐다. 주제도 스스로 정하고, 진행자와 서기도 스스로 뽑았다. 타운미팅 1조와 2조에 참여한 재가자 2명에게 소감문을 요청했다. 현직을 감안해 ‘익명’으로 소감문을 받았다. 또 타운미팅 준비위에서 일한 강성식 씨의 소감도 물었다. 소감문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늦은 시간 조계사 인근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불교개혁을 위한 타운홀 미팅의 자리는 늦은 밤, 빛을 밝히고자 서원하는 불자들로 가득했다.

다소 서먹했던 타운홀 미팅은 자유로움이라는 형식적 틀을 통해 저마다의 생각을 펼치고 더하기 시작했다.
사찰을 건립하는 불사에 우리 절이라는 순수한 생각으로 동참하고 환희심 넘치는 신행을 이어왔으나, 어느 날 주지스님이 바뀌면서 건립불사에 동참했던 이들이 떠나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 한다. 사찰의 주인은 누구이고, 불사에 동참하고 스님을 믿고 따르던 우리는 떠나야 하는 객(客)인가? 우리의 불교가 재가자를 분별로 나누고 이 절 저 절로 떠돌게 만든다면 재가는 주머니 돈먼 내어주는 객이 되고 말 것이라는 반성이다.

나아가 현재의 재가불자의 모습은 지혜롭고 참다운 것인가? 라는 동참자의 질문에 승가와 재가로 나누는 이분법적 불교의 모순에 나이 드신 분들의 염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간의 말 못할 시달림을 미래 불교에 남기고 싶지 않다는 참회와 함께 말이다.

‘출가승에 의지하지 않는 재가의 자주적 불교를 세우고 키워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재가의 자주적 불교는 미래불교를 위한 발전적 틀이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미팅의 시작은 현실을 암울한 불교를 이야기 했으나 저마다의 의견을 더하며 대안이라는 공감(共感)에 도달하고 있었다.

사부대중이라는 구분은 불교의 구성과 역할의 문제이지 분별을 통한 계급의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출가자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모두가 수행자이기에 ‘대중’이지 공양을 받는 자와 공양을 하는 자라는 다소 수직적인 구분은 불교발전을 저해하는 그릇된 의식이라는 꾸짖음과 함께 우리의 불교 속에서 공양 받는 자가 된 승가의 현실에 대해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책임의식도 흘러 나왔다.

그리고 삼귀의와 삼보호지(三寶護持)속에서 모든 승가를 공경하여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단지 출가자만으로 삼보의 하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함께 재가에서 바라보는 바람직하고 참다운 승가상을 제시하자는 적극적 의견도 더해졌다. 그리고 출가와 재가를 떠나 모든 수행자는 주인이다. 수행자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 올바른 불교의 미래를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하며 바른 길을 걸아가야 한다는 한 보살님의 말은 누구도 더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았다. 다만 뜨거워지는 두 눈으로 서로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수행은 한집단의 전유물이 되어 ‘한 소식’을 한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데 잿빛 옷을 걸치고 안거를 하는 승가만의 수행이 되었고 이미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야 불교가 성장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다. 불교의 지속 가능한 사회적 확장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수행이다. 우리사회 속에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모습도 수행에서 찾고 키워야 한다.

하지만 수행은 사찰안의 권위적 공동체의식이 되어 수행문화의 최상층을 선방수좌가 점하고 있으며, 궁극에 이르러 접근불가의 절대적 영역으로 키워졌다. 그리고 관념적으로 아는 사람만이 아는, 이해 못할 경계를 가지고 있다는 반성도 있었다. 이러한 수행문화의 어두움 속에서 재가자들은 수행문화의 사회적 확장이라는 고민은 시작되었다.

먼저 사찰공간의 안과 밖이라는 수행의 범위를 허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재가출가를 구분하지 말고 수행자라면 사찰 안에서 부처님을 믿고 따르는 불자의 모습을 사찰 밖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처럼 살자’는 것이다. 그러면 주지가 바뀌어도 신도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주지가 바뀌면 신도회가 바뀐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찰 안에 일반사회의 자기중심적이며 편리한 습성이 이미 자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 1994년 정화개혁이후 20년 뒤가 2014년이라면 20년 후의 미래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의견을 던졌다.

우리가 한국불교의 참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승가와 재가로 구분되어 승가중심의 의사결정구조가 고착화된다면 미래의 불교는 서구로부터 유입되어 1700년 전통불교 보다 넓은 영역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그럴 수 있다. 서구의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 평등이라는 학문적 체계 속에 우리는 교육 받고 길들여져 왔다. 이러한 교육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 불교는 상당한 거리를 둔 종교가 되어있다. 청소년, 청년 불교의 나약한 현실이 이를 증명하듯이 말이다. 미래불교에 희망을 새로운 불교 유입이라는 대안에 맡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말없던 한 동참자의 말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20년 후 불교는 없다는 처절함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불교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승가에 의존하는 구조를 깨고, 기복의 문화와 공양의 복덕이라는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 승가의 변화를 시작에 두는 불교는 그리 밝은 미래불교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의식으로 다시 재가의 신행 속에서 불교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승가와 재가의 구분을 떠나 수행자라는 하나된 의식이 불교의 문화와 생명을 만들 수 있다는 공감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승가는 스스로 자립이라는 승가공동체의 틀을 다시금 제고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처절함이 없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범계(犯戒)의 행위마저 부처님의 자비로 키워왔는지 모른다. 부처님의 약이 독이 되었는지 모른다. 부처님의 약이 불교라는 집단의식속에서 한 집단만을 키우는 어리석은 독이 되었는지 모른다.

모르고 짓는 죄보다 알고 짓는 죄가 가볍다고 했다. 불교를 걱정하고 대안을 마련하며 함께 하고자하는 타운미팅의 자리는 알고 짓는 죄를 보다 명확히 하고 이를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단지 무기력과 패배감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고자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세찬 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찬 칼바람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뭉치지 못하도록 겉에서부터 도려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는 없다’라는 미래불교의 처절함이 변화의 공감이 된다면 불자는 참회로부터 자신을 바꾸고, 서원과 수행정진으로 ‘불교는 없다’는 비어있는 미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여실지견/ 불교개혁을 위한 1차 타운미팅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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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포살2014 2014-03-17 12:09:38
여실지견님,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20년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앞으로 20년후의 불교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4월4일. 공동체를 주제로한 3번째 타운미팅에 참석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