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음식
거친 음식
  • 현각 스님
  • 승인 2013.10.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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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16

지난 여름 남해에 갔다.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독 비가 오지 않아 날씨도 습하지도 않고, 지인이 그 곳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하여 나들이 겸 길을 나섰다. 고온다습한 여름 날씨는 몸과 마음을 한층 묵직하게 하기에 그러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잔잔한 남쪽 바다는 평온 그 자체였다. 집을 짓고 있는 주변은 온통 밭이었다. 가뭄을 이겨내지 못한 고구마 덩굴은 마치 나비잠을 즐기고 있는 아기 마냥 평화로웠다. 밭둑에 낯익은 풀이 쑥쑥 자랐다. 풀이라고 했지만 기실은 모시다. 자유를 구가하며 샐긋하게 배뚤어져 있는 모습은 예전 모시밭에서 자라고 있는 모시는 아니었다. 이웃과 서로 기대어 자란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 만은 않구나 라고 새삼 느꼈다. 밭둑에서 자란 모시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동행했던 보살님은 손길이 분주해졌다. 모시 잎을 열심히 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밭주인의 허락을 받고 난 뒤의 일이다. 모시잎 떡을 만든단다. 그래요, 군침이 돈다. 아, 얼마만이냐. 모시잎 떡을 먹어본 지가!

산새들 몫도 챙겨 왔다. 헌식돌 위에 올려놓았으나 감감 무소식이다. 부리로 쪼기가 힘들어서일까. 잘게 나누어 놓아도 스쳐가 버린다. 나무 위의 곡예사 다람쥐도 그렇다. 화식하는 인간의 생각으로 생식하는 저들의 먹거리 기호품을 헤아린다는 것은 언감생심인가 보다.

지금 세상에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먹고, 오래 살기 위해 먹는 웰빙 식품이, 야생의 대지에서 거칠게 자란 모시잎과 같은 먹거리다. 또 밭이랑을 덮고 있는 고구마 덩굴, 콩깍지를 밀치고 나오려는 숨 가쁜 기세를 하고 있는 통통한 콩, 모두가 현대인이 호감을 갖는 먹거리가 지천이다.

콩을 보고 있자니 문득 칠보시가 스친다. 형 조비가 아우 조식을 괴롭힌 내용이다. 형은 아우의 천재적인 재주를 샘하였던 것이다. 조조ㆍ조비ㆍ조식 삼부자는 후한시대 건안(建安)문학을 주도하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萁  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어찌 건강뿐일까. 건강 못지않게 영혼의 건강도 뒤로 할 수 없다. 맑은 영혼을 지니지 못하면 세상은 강에 탁류가 흐르는 것과 같다. 수초가 질식하고 물고기가 숨쉬기 어려워지고 물결이 빚어 놓은 조약돌도 볼 수 없으며, 발바닥을 건드리며 빠져나가는 세사(細沙)의 속삭임도 들을 수 없다. 종국에는 생태계에 교란이 오고 만다.

건전한 영혼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유지되고 사회와 국가가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도전 받는 세상이다. 정의가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권력과 금력 앞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좌절할 일은 아니다. 진실과 정의가 하늘의 뜻으로 영원한 것이고, 권력과 금력은 인간이 쫒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고 사는 한 갈증을 느낄 일 만은 아니다. 진실과 정의가 인간세상의 거친 도전을 받는다 해도 당연시해야 한다. 건강을 챙기느라 거친 음식을 먹는 현대인 마냥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길, 햇살과 갈대가 하늘거리는 올래길을 걸어야 한다. 갈대의 하늘거림은 상처 입은 진실과 정의를 치유하려고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불의와 결탁한 삶의 종말이 어떠했던가는 역사가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만족스러웠을지 몰라도 역사의 제단 앞에 한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진실을 그릇되게 호도한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 집단의 영원한 아류일 뿐이다. 역사의 근간은 되지 못한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거친 음식을 찾는다. 그러나 거친 광야를 걸으려 하지 않고 올래길을 걸어 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이권과 자리에 연연하여 양심은 매몰되고 만다.

행운유수와 같이 표표히 길을 나서는 옛 선사의 마음을 닮고 싶다. 물질의 쓰나미가 주변을 엄습해 올 때면 더욱 그렇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최현각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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