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이 10월 2일 서울 장충동 만해NGO빌딩에서 열린 참여불교리더스포럼에서 ‘불교의 현주소와 의식개혁의 필요성’을 주제로 법문을 하셨다. 청정한 비구 수행승인 스님의 법문에서 역설적으로 불교계의 특히 조계종의 문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님은 이번 총무원장 선거에 대해서
“이번 총무원장선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규모가 너무 크다. 재가연대가 공정선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하셨다.
이는 매우 위험한 사고이시다. 이 문제로 법문장소에서 한 재가자와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매끄럽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실망스러운 논쟁이었다. 큰스님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절대진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과의 토론은 없고 일방통행식으로 보살들에게 설법하는 관행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무용지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좋은 제도 자체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왕정과 식민지밖에 겪은 적이 없었던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받아들여 자유 평등 박애에 눈이 뜬 것이다. 북한의 김씨 독재정권과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비교해 보면 그 답은 명확하다. 의식개혁이 먼저라는 주장 즉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무용지물’이라는 주장은 위험한 흑백논리이자 정신우위의 흑백논리이기도 하다. 만약 사사무애·이사무애의 화엄연기사상이 참이라면 제도적인 개혁과 물질적인 개혁 역시 중요하다.
재가자가 “제도 아닌 의식개혁만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냐?”고 질문하자 스님은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때부터 우리 사회에는 여러 사회개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지금 완벽하냐?”고 반문했다.
스님의 답은 매우 위험한 답이다. 만약 부처님이후로 의식개혁에만 매달렸다면 지금 대다수 인류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도 고려도 불교국가이었지만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의식개혁만 부르짖으면 되는 것인가? 서양은 부처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왜 더 풍요롭고 더 인권을 누리면서 사는가? 반대로 태국 미얀마 라오스 스리랑카 등의 불교국가 들은 가난과 독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가? 불교적인 가르침이 저절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가져오는가? 불경은 이상적인 국가로 전륜성왕이 다스리는 왕정만을 논한다. 설마 스님이 매일매일 사자들에게 잡아먹히는 세렝게티초원의 누들에게 사자들에 대한 용서와 너그러운 마음으로의 의식개혁을 하라고 주장하지는 않으시리라. 지배자인 왕들에게 인자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나 백성들에게 포악한 왕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이나 한계가 명확한 가르침일 뿐이다. 왕정이라는 제도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처는 의식개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의 예를 보면 명확하지 않은가? 1,000년간 불교국가로 제정일치의 사회를 만들었지만 나라를 폐쇄하고 개혁을 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중국에 병탄되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은 폐쇄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던 불교승려들의 의식 자체가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정일치의 티베트에서 나라를 운영하던 왕 이하 고관대작은 모두 승려들이였기 때문이다.
불교는 개인의 의식의 개혁을 말하나 사회나 국가는 집단이므로 동시에 ‘집단적인 의식’의 개혁이 필요하다. ‘집단의식’이란 단순히 개인의식의 합이 아니다.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우리 몸의 세포나 뇌신경세포의 개개 의식을 의식하지 못함과 같다. 이 집단의식은 교육제도 사회제도 경제제도 정치제도로 구현되며 사실은 이 제도들이 집단의식 자체이기도 하다. 스님이 마음을 중시하시지만 스님 자신이 몸에 아프면 특히 암에 걸리면 외과적인 수술을 받으시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의식개혁을 이루어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 몸의 건강을 회복함으로써 자연적인 치유력으로 암을 극복하자고는 절대 주장하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 외과적인 수술에 해당하는 것이 선진제도의 도입이다.
스님은 “해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우리 사회에는 여러 사회개혁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지금 완벽하냐”고 하셨는데,
역으로 수천 년간 우리나라와 인도는 불교에 의한 의식개혁이 있었는데 우리 사회가 지금 완벽한가?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는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내세워 반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모든 주장을 완벽하지 않다는 논리로 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엄연기사상에 의하더라도 내적인 의식개혁과 외적인 제도개혁은 같이 가야하는 것일 것이다. 사자나 호랑이나 늑대 앞에서 아무리 불교수행을 하고 마음을 닦아도 자기 가족이 이들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티베트가 바로 그런 예이다. 튼튼한 방어벽을 만들고 건장한 남자가족수를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방어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것이 자기 가족에 대한 진정한 자비행이다. 정신일도 하사불성만 외치다가는 그냥 남의 먹이가 되고 만다. 물론 먹이가 되는 순간에도 자타가 없다는 무아를 닦아 깨달은 사람(가장)이야 잡아먹히는 고통이 없을지 모르나 그렇지 않은 수많은 다른 사람(가족)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허깨비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처음부터 고통을 벗어나는 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집단의 의식은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의식만 인정한다면 이것이 바로 ‘아트만 사상’이다. 따라서 개인의 의식개혁과 정치·경제·사회·교육·복지제도 등의 집단적인 (의식)개혁은 더불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쪽의 개혁을 완벽히 이룬 다음에서야 다른 쪽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밀고 당기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중도연기일 것이다. 불교승단이 그나마 이정도로 수천 년 동안 유지된 것도 불교승단이 갖춘 훌륭한 제도덕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불교계의 타락과 혼란은 개인의식에만 치중하여 극도로 몸집이 커진 집단의식(제도)을 소홀히 대하고 방치한 책임이 크다. 변하는 세상에 맞추어 변하고 개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유아사상이다.
/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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