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가
쓸쓸한가
  • 현각 스님
  • 승인 2013.09.26 10: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15
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을 터앝이라 한다. 그 공간에 토란, 고추, 아욱, 푸성귀 용도로 심은 무와 배추가 제법 성장하였다. 무잎은 쑥쑥 자라 족히 한 뼘에 이른다. 이들의 성장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토란 잎에는 물것이 붙지 않는다. 역시 아욱 잎에도 물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유독 무, 배추 잎에만 벌레가 꼬여 성장을 더디게 하고 있다. 농약을 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 무농약 재배법이다.

어제는 무 이파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선정에 든 방아깨비의 자태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보호색을 하고 있어 썩 눈에 띄지 않는데도 말이다. 벗을 만난 듯 반가웠다. 두 손으로 한 줌 물을 움켜쥐듯 숨을 죽이고 덥썩 안았다. 손 안에 들어온 녀석의 앞날개는 배보다 길며, 뒷다리가 크고 길어 잡으면 방아찧듯 몸을 상하로 놀리는 모양이 장관이다. 다른 이름으로 용서라고도 한다. 찧을 용(舂)에 기장 서(黍)이다. 그래서 이 녀석에게 쌀밥 줄께, 보리밥 줄께 방아를 찧으라고 종용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는 논둑이나 밭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한참동안 방아를 찧게 하다가 이도 시들해지면 허공에 던진다. 아이구! 인간 같으면 척추가 나갔든지 뇌진탕을 일으킬 일이다. 그러나 긴 앞날개를 펴 허공을 배회하다가 주변에 앉곤 했다. 그날의 반려자를 터앝에서 볼 수 있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다. 자연은 순환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정진터에 오르는 길은 일정구간은 암반이다. 무게로 헤아려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별로 요란스러울 리 없다. 그저 바람에 자신을 떨구는 가랑잎 정도 쯤일 것 같다. 그런데 가을의 전령들에게는 함포소리로 들리는지 그들의 밀어의 속삭임을 멈추고 만다. 내딛는 발길에 매미의 허물이 보인다. 그저 허물일까 아니면 성스러운 영혼의 잔영이 아닐까 한다.

반성해 본다. 몸에 살기가 얼마나 남아 있기에 미물이 알아채고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그 현란한 연주를 멈춘단 말일까. 한 번 내딛는 발걸음이 공포로 느꼈다면 걸음마다 공포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정진터에서 철저하게 뭔가를 비워야 하겠다. 그러려면 철저하게 쓸쓸해야 한다. 이는 절기와는 무관한 일이다. 사람들은 가을이라 쓸쓸하다고도 한다. 절기 탓이 아니라 내 몸 안의 탁기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다. 주변에 누군가 떠났다거나 소중하게 지녔던 것을 잃어버린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탁한 기운이 소멸되면 맑은 영혼을 지니게 된다. 그러면 자연과 쉽게 동화가 될 수 있은 일이다.

수년 전 일이다. 요즘 같은 절기로 생각된다. 고추잠자리 떼들이 모여 들어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고 있던 나의 전신을 에워싸며 군무하던 일은 오랫동안 남는 경이로움이었다. 순간 경이를 넘어 작은 공포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허나 자연과 동화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금새 상쾌해졌다. 산행에서 산새들이 동행해 줄 때는 숨도 가쁘지 않고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고추잠자리나 산새에게 인연이란 묘약으로 붙들어 놓기도 한다. 비단 금생의 인연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생 아니 전전생의 시간까지 끌어들여 보면 그 친숙함은 쉽게 다가온다.

우리는 철저하게 쓸쓸해야 한다. 여기서 쓸쓸하다는 것은 스스로 비워간다는 뜻이지 상실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운다는 말을 하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채우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오뉴월 햇볕을 가려도 섭섭하다느니, 주머니에 먼지를 털어내도 섭섭하다는 말은 실로 소유물을 놓지 않고자 하는 인간 심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손바닥은 뒤집기 쉬워도 한 번 익은 숙업이란 떨치기가 퍽 어려운 일이다. 거듭된 반복만이 본래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환원되는 지름길이 된다.

조락해가는 담쟁이 잎을 보고 쓸쓸하다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쓸쓸함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하여 잎을 떨구고 있다. 우리는 사무치도록 쓸쓸한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공부 점검은 스승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예지가 있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최현각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