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무 이파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선정에 든 방아깨비의 자태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보호색을 하고 있어 썩 눈에 띄지 않는데도 말이다. 벗을 만난 듯 반가웠다. 두 손으로 한 줌 물을 움켜쥐듯 숨을 죽이고 덥썩 안았다. 손 안에 들어온 녀석의 앞날개는 배보다 길며, 뒷다리가 크고 길어 잡으면 방아찧듯 몸을 상하로 놀리는 모양이 장관이다. 다른 이름으로 용서라고도 한다. 찧을 용(舂)에 기장 서(黍)이다. 그래서 이 녀석에게 쌀밥 줄께, 보리밥 줄께 방아를 찧으라고 종용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는 논둑이나 밭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한참동안 방아를 찧게 하다가 이도 시들해지면 허공에 던진다. 아이구! 인간 같으면 척추가 나갔든지 뇌진탕을 일으킬 일이다. 그러나 긴 앞날개를 펴 허공을 배회하다가 주변에 앉곤 했다. 그날의 반려자를 터앝에서 볼 수 있다니 여간 반가운 일이다. 자연은 순환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정진터에 오르는 길은 일정구간은 암반이다. 무게로 헤아려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별로 요란스러울 리 없다. 그저 바람에 자신을 떨구는 가랑잎 정도 쯤일 것 같다. 그런데 가을의 전령들에게는 함포소리로 들리는지 그들의 밀어의 속삭임을 멈추고 만다. 내딛는 발길에 매미의 허물이 보인다. 그저 허물일까 아니면 성스러운 영혼의 잔영이 아닐까 한다.
반성해 본다. 몸에 살기가 얼마나 남아 있기에 미물이 알아채고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그 현란한 연주를 멈춘단 말일까. 한 번 내딛는 발걸음이 공포로 느꼈다면 걸음마다 공포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정진터에서 철저하게 뭔가를 비워야 하겠다. 그러려면 철저하게 쓸쓸해야 한다. 이는 절기와는 무관한 일이다. 사람들은 가을이라 쓸쓸하다고도 한다. 절기 탓이 아니라 내 몸 안의 탁기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다. 주변에 누군가 떠났다거나 소중하게 지녔던 것을 잃어버린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탁한 기운이 소멸되면 맑은 영혼을 지니게 된다. 그러면 자연과 쉽게 동화가 될 수 있은 일이다.
수년 전 일이다. 요즘 같은 절기로 생각된다. 고추잠자리 떼들이 모여 들어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고 있던 나의 전신을 에워싸며 군무하던 일은 오랫동안 남는 경이로움이었다. 순간 경이를 넘어 작은 공포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허나 자연과 동화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금새 상쾌해졌다. 산행에서 산새들이 동행해 줄 때는 숨도 가쁘지 않고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고추잠자리나 산새에게 인연이란 묘약으로 붙들어 놓기도 한다. 비단 금생의 인연이 아니라 하더라도 전생 아니 전전생의 시간까지 끌어들여 보면 그 친숙함은 쉽게 다가온다.
우리는 철저하게 쓸쓸해야 한다. 여기서 쓸쓸하다는 것은 스스로 비워간다는 뜻이지 상실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운다는 말을 하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채우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오뉴월 햇볕을 가려도 섭섭하다느니, 주머니에 먼지를 털어내도 섭섭하다는 말은 실로 소유물을 놓지 않고자 하는 인간 심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손바닥은 뒤집기 쉬워도 한 번 익은 숙업이란 떨치기가 퍽 어려운 일이다. 거듭된 반복만이 본래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환원되는 지름길이 된다.
조락해가는 담쟁이 잎을 보고 쓸쓸하다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쓸쓸함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하여 잎을 떨구고 있다. 우리는 사무치도록 쓸쓸한가 반문해 보아야 한다. 공부 점검은 스승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예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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