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로 양방향 소통하며 전법
SNS로 양방향 소통하며 전법
  • 사기순
  • 승인 2013.09.25 09:4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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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그의 삶 나의 거울 14. 개화사 송강 스님
요즘 교계 안팎의 형국이 심상치 않다. 모든 게 시절인연이라 해도 답답한 가슴은 어찌할 수 없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윗물이 문제를 만들고 있으니 파장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걱정스럽다. 사람들이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하나, 부처님 법을 좋아하면서도 사람 때문에 떠나가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믿는 구석도 있다.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대중매체의 세례를 받는 게 아니라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양방향 소통을 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특히 SNS상에서 스님들과 정겹게 소통하면서 쌓은 불심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 다행스럽다. 그래서 SNS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스님들, 불자들이 더욱 고맙다.

나 역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지는 못하더라도 뒤떨어지지는 않겠다고 용을 쓰다 보니 어느새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열고 닫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이 법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또한 절집 생활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기에, 누구든지 일상이 바쁘면 SNS에 공을 들일 수 없기에 늘 한결같이 열심히 법을 전하는 분들을 보면 그저 감사하고, 존경스럽다.

내가 송강 스님(강서구 방화동 개화산 개화사 주지)을 만나고 감동한 것도 SNS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스님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 정기법회에 음력재일법회, 특별법회까지 하면 매월 12-15회 법회를 주관하고 있다. 그 많은 법회에서 법문하고 강의하면서 수행을 지도하기도 벅찬 일상임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그런데 스님은 페이스북에 날마다 글을 올리고, 일일이 댓글도 달아준다. 다음카페(개화사)에 육조단경, 금강경오가해, 신심명, 근본교리강좌, 주지스님 말씀 등을 연재하고 있고, <금강경 시리즈>, <백문백답>, <송강 스님의 인도 성지순례>, <경허 선사 깨달음의 노래> 등의 단행본을 출간한 것을 생각하면 실로 경이롭기조차 하다. 페이스북에서 스님의 연재 글을 읽으면서 그 에너지의 원천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송강 스님 페이스북 글 ‘사랑하기에서 나를 만나다

송강 스님은 불교방송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9년부터 불교방송에서 강의를 하고 자비의 전화를 진행했다. 앞서 밝힌 대로 여러 권의 단행본도 출간했다. 그래서 일찍이 명성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잠시 불교텔레비전 구성작가로 활동할 때 섭외를 위해 통화 한 차례, 나레이션 작업할 때 영상으로만 뵈었었다. 그런데 페이스북 덕분에 아주 오래 전부터 뵌 것처럼 친근해졌다. 요즘 페이스북에 [사랑하기]를 연재하고 있는 송강 스님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 중에 자신에 대해 탐구해 볼 의향이 있는 사람 있으면 우리가 도와주겠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무슨 소리야?’ 선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불교반이다. 교내 서클은 아니고 밖에서 다른 학교학생들이랑 함께 마음 수행을 하는 모임이다.’ 누군가 물었다. ‘여학생도 있습니까?’ 와~하는 웃음소리가 끝나자 선배가 웃으며 자신 있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부산에서 예쁜 애들은 다 우리 모임에 나온다.’ 하지만 애들은 그게 뻥이라는 것 쯤 다 안다는 듯 각자의 얘기로 돌아가 떠들기 시작했다. 선배는 아무런 성과도 없구나 하는 표정으로 교단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때 내가 큰소리로 ‘저요!’를 외치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곤 친구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눈짓과 옆구리 공략으로 대여섯 명이 손을 들자 선배는 토요일 교문에서 모여 함께 절로 가기로 하고 돌아갔다.”
-페이스북 송강/ 2013년 8월 22일 [사랑하기] 17 중에서

스님의 솔직 담백하면서도 대중의 눈높이에 딱 맞춘 글맵시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니 어쩌면 스님의 글을 통해 32, 3년 전의 나를 떠올렸기에 그토록 깊이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부터 불교동아리에 다녔던 나는 스님처럼 고1 때는 친구들을 꼬드겨 선배(?)를 기쁘게 했고, 고2 때는 후배들을 꾀어내기 위해 1학년 교실을 전전하였다. 후배들에게 내가 처음 터뜨린 말은, “제가 어느 동아리에서 온 것 같습니까?”였다. 그때마다 후배들은 “불교동아리요”라고 대답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는 질문에, “관세음보살같이 생겼어요”라는 후배들의 말에 정말 행복했었다. 한편 그때 고1 학생들은 대부분 관세음보살을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요즘 학생들은 어떨지 궁금하다. 모르는 아이가 태반일 듯, 마치 직무 유기를 한 것 같아 낯이 붉어진다.

암튼 그때 내 얘기를 스님께 댓글로 단 것은 그때 이후로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내 작은 삶의 고민을 풀고 나서는 더 이상 공부할 생각도 수행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는 입에 염불하고, 문서포교사라는 미명하에 부처님 가르침 담은 책을 만들면서 편하고 쉬운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수행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법을 전하는 스님이 뵙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읽자마자 스님께 댓글을 달았고, 그날 바로 개화사로 향했다.

한두 번의 삽질로 우물이 되지 않는다

사실 페이스북에 올린 스님의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수행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임을, 한두 번의 삽질에 우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스님의 경이로울 정도의 일과수행은 아주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소설 <원효성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무애가를 부르면서 거지들과 어울리는 원효 대사의 모습이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때부터 원효 대사의 스승인 부처님께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물 흐르듯 술술 써내려가는 스님의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니 비결은 독서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 도서반장을 맡아 도서관에 소장된 3천 권의 책을 다 읽었다는 스님, 동화책은 물론이고 세익스피어 전집,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등을 초등학교 때 섭렵하였으니 그 내공이 어디 가겠는가. 나 역시 가끔 초등학교 때 독서한 공력으로 책 만들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데, 만일 그때 스님처럼 춘원 이광수의 <원효 대사>를 읽었다면 출가를 할 수 있었을까?

원효 대사를 통해 부처님을 알게 되었고, 중학교 때부터는 장래희망란에 당연히 ‘스님’이라고 썼던 소년의 출가는 이미 전생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입이 보살”이라는 말이 있는데, 말의 힘은 운명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절에 다니는 친구들이 드물어 나는 학교에서 불교신자로 유명한 편이었다.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갈 거냐?”라는 질문을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자주 받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법을 전하는 법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세속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던지, 파르라니 머리 깎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지, 아니면 일반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법을 전하는 게 더 편할 거라는 생각을 했는지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법사가 되겠다는 대답만 기억이 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문서포교사로 살아가고 있으니 나도 스님처럼 꿈은 이룬 셈인가?

무쇠 상자에서 탈출하기, 습관이 삶을 만든다

“저는 스승 복이 참 많습니다. 중학교 때 석암 스님과 화엄 스님께 지도를 받았고, 고등학교 때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신 김도완 선생님으로부터 체계적인 불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교학 공부도 했지만 참선 수행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 당시 은사이신 화엄 스님께서 범어사 유나로 계셨는데, 유나실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경봉 스님, 향곡 스님, 혜산 스님 등 당대에 내로라 하셨던 스님들을 찾아뵈면서 지도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정말 부러울 정도로 스승 복이 많다. 중학교 때부터 대율사이신 석암 스님과 대선사이신 화엄 스님의 덕화를 입으며 성장했다. 게다가 종립학교 교재로 부처님의 생애, 기본교리 등의 공부를 마친 다음 보조국사 <진심직설>, 원효대사 <유심안락문(정토왕생 이야기)>, <초발심자경문>, <반야심경>, <법성게>, <육조단경>, <선가귀감> 등을 실력 있고 신심 깊은 김도완 선생님께 한문 원전으로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도 배우고, 김잉석 교수의 <화엄학개론>까지 배울 정도로 든든히 교학의 기반을 닦으면서 한편으론 참선 수행, 선(禪)·교(敎)·율(律)을 청소년 시절 이미 회통하였으니 마치 스님을 위한 맞춤시스템이 작동된 듯하다.

하기야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만들어간 인연이리라. 나 역시 스님처럼 중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았다. 내가 지금 스님 앞에서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것은 다 알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부처님 그늘에서 그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왔을 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한 것, 한순간 자신의 고민을 풀었다고 해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마구니라는 것을 요즘에야 절감한다. 게다가 세속의 살림살이라는 것이 마음공부를 방해하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 부처님께서 당신의 가족 친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라훌라에게까지 출가를 권하신 뜻을 알겠다.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듯 번잡한 세속에서 마음공부를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그야말로 뛰어난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고 나와 같은 욕망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들은 세속에서 벗어나 철저히 침잠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다. 나의 출가에 대한 미련과 환상을 갖고 있는 마음을 알아채셨는지 스님께서는 공부가 되었으면 출가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진짜 공부를 잘했으면 출가했겠습니까? 중학교 때 사미계를 받고 그때부터 출가가 장래 희망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대학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깨달아서 부처님처럼 되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화두병에 걸렸습니다. 참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밀어붙이다 보니 참선병에 걸린 겁니다. 눈에 안 보이는 무쇠 상자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밥맛도 없고 사는 재미도 없고 심지어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오로지 화두만 의심했지요. 무쇠 상자에서 탈출을 해야 살아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은산철벽에 부딪쳐서 끙끙 앓았다. 나중에는 미쳐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석암 스님을 찾아뵈었고, 김해 영구암에 계시다는 화엄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는 답을 들었다. 한달음에 김해로 달려갔다. 당시 김해에서 가장 큰 절이었던 은하사로 찾아가 화엄 스님의 행방을 여쭈었다. 암자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올라갔는데, 두 번이나 화엄 스님을 뵙지 못하고 실망하며 돌아갔다가 세 번째에 비로소 산중턱에서 화엄 스님을 뵈었다.

다짜고짜 살려고 왔다고 말씀드리자, “밖에서 공부해도 될 텐데”라는 화엄 스님께 “혼자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부터 살랍니다.”라고 하며 화엄 스님의 뒤를 따랐다. 김해 시장에서 씨감자를 사신 화엄 스님이 “이것 짊어지고 올라가게. 내년 봄에 감자가 잘 될 거야.”라는 말씀으로 허락하셨고, 화엄 스님과 함께 30리길을 걸어서 김해 영구암으로 돌아오는 그날부터 무쇠 상자가 덜 짓누르는 것 같았다.

김해 영구암에서의 행자생활은 무쇠 상자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빡빡했다. 새벽예불, 사시기도, 저녁예불, 하루 세 차례 기도를 하는데 두 시간은 족히 걸리니 기본적으로 여섯 시간은 기도를 했다. 시장에 가려면 30리 길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높은 암자였으니 웬만한 것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해야 했다. 매일 밭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2년 동안 영구암에서 지내는 동안 열 몇 개의 밭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문적인 노동자들도 왔다가 일주일도 못 가 두손두발 다 들곤 했는데, 꼬박 2년 동안 밭을 만들고, 나무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를 하면서 수행한 스님의 근기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사실 노동은 힘들지 않았습니다. 무쇠 상자에 갇히고 은산철벽에 부딪친 게 문제였지요. 또 은사스님과 같이 일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줄 몰랐습니다. 나무를 하러 갈 때는 당신도 톱을 들고 같이 나무를 잘랐고, 밭도 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땀 흘려 일하면서 당신 수행하신 얘기를 해 주시면 환희심이 나고 공부 길이 점점 열리는 것을 느꼈지요.”

‘아, 부럽다.’ 나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가슴 밑바닥부터 부러움이 솟구쳐 올랐다. 함께 일하며 법을 전하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렇듯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 전전생부터 쌓고 또 쌓은 선업, 복덕의 인연이 아닌가.

스님의 은사이신 화엄 스님을 월간 <불광> 기자로 있을 때 ‘선지식 탐방’ 취재차 찾아뵌 적이 있고 불교텔레비전에서 ‘인연 그리고 법연’을 만든 인연이 있으니 그나마 나도 아주 복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중생의 마음을 치유하는 대의왕, 대원력을 실천하신 화엄 스님, 스님은 출가 전 사람들의 육신을 고쳐주는 의사였다. 불보살의 가피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고, 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백약이 무효한 상태에서 백일기도를 통해 완쾌되었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 ‘마음을 깨치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물론이요,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가 되겠구나’ 하는 확신으로 선찰대본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발심 출가하였다. 스님은 남다른 출가 인연만큼이나 치열하게 수행 정진하였다. 불교정화 당시에는 정화의 중추였던 동산 스님을 보필하여 정화 불사를 도왔고, 정화 후에는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장좌불와 정진을 하였다.

일등 수좌로 칭송받던 스님은 범어사 주지를 세 차례 역임하면서 범어사를 명실공히 선찰대본산으로 일구었고, 범어사 선원장으로 참선 납자들을 지도하였다. 참선 수행과 지장기도로 경계가 열린 스님은 김해 영구암에서 보림을 하면서 선서화를 시작, 일행삼매의 경지에서 무심(無心)으로 구사하는 일필휘지의 선서화(禪書畵)는 독보적 경지를 구가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말년에는 임진왜란 때 폐사된 동림사를 복원하여 중생 교화에 힘쓰셨던 화엄 스님, 스님은 중생의 마음을 치유하는 우리 시대의 지장보살이었다.
-불교텔레비전 ‘인연 그리고 법연’ 나레이션 중에서...

“새벽 두 시에 일어나 평균 두 시간밖에 못 잤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온 주말에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꼬박 밤을 새곤 했지요.”

번뇌가 곧 깨달음, 번뇌가 커야 깨달음도 큰 것인가? 무쇠 상자 속에 갇힌 것 같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한 스님은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견디기 힘든 행자생활을 하면서 무쇠 상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제 어느 때 풀려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게 답답함에서 해탈한 체험, 훨훨 날아갈 듯한 대자유의 법열은 그 이후 수행의 길을 걷는 데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다. 행자 때부터 잠을 자지 않고 일하면서 수행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지금도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이면 족하다. 글 쓰고, 법문하고, 신도들을 제접하며 수행하는, 스님의 짐짓 경이롭게 다가오던 하루 일과는 행자 때부터 철저하게 체득한 것이었다. 습관이 삶을 만드는 것임을 스님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 역시 사람의 거울이 최고 최상의 가르침을 준다.

땀, 먼지로 만들어진 부처님 향기 전하며

중고등학교 때, 그리고 행자시절 이미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 이후 스님은 전법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다. 선방 수행, 중앙승가대에 입학한 것도 대장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위해서였다. 방학 때도 학교에 머물면서 대장경을 읽고 또 읽었다.

“일찍이 법화경과 인연이 되었습니다. 법화경을 통해 선교 통합의 이치를 알았습니다. 교학을 하지 않고 참선을 하는 것은 설계도 없이 집 짓는 꼴이고, 교학만 하고 참선을 하지 않는 것은 허구 헌날 설계도만 들여다보는 꼴입니다. 교학이 설계도라면 직접 집을 짓는 것은 참선입니다.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경을 볼 때도 선정에 들어서 봐야 합니다.”


청소년기부터 참선 수행, 화두병을 앓다가 마침내 은산철벽을 뚫은 스님, 선교 통합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장경을 다 읽으면서 어디에도 막힘이 없게 되었다.

“포교를 하려면 경전 공부를 해야 하고, 매일 선정에 들지 않으면 경전의 바른 뜻을 뚫지를 못합니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은 스님의 삶이 그와 같은 이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스님은 30대 중반에 최연소로 조계종 총무원 총무국장과 재정국장을 겸임하면서 종단에 기여했다. 불교방송 개국에도 실질적인 역할을 했고, 교리강의·경전과 선어록 강의·자비의 전화 MC를 맡아 불교방송이 자리 잡는 데 일조했다. 1994년 종무행정에서 손을 떼면서 앞으로는 오로지 땀과 먼지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향기와 에너지를 전하며 살아가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그 뒤 단 한순간도 곁눈질하지 않고 불자들에게, 심지어 이웃종교인들에게까지 법을 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강서구 방화동에 터를 잡고 교화한 지 이십여 년, 강서구에 아름다운 절로 손꼽히는 개화동 개화사는 다양한 법회와 기도 수행하는 불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토요일에 열리는 스님의 벽암록 강의는 매우 특별하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스님이 청중에게 질문을 던져 각자 스스로 답을 찾게끔 이끌어주는 것이다. 선문답에 접근해서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머릿속으로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질문을 던지면 깜깜하거든요. 질문을 통해 답을 스스로 찾게 해 줍니다. 답변을 들으면서 가까이 갔으면 가까이 갔다고 해 주고, 아니면 전혀 아니라고 해 주면서 더 열심히 파고들라고 합니다.”

스님의 이러한 지도 방식은 옛날 조실스님과 방장스님이 지도해 주던 정통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다 없어졌다. 문답은 강의와 차원이 다르다. 강의는 이론 위주인지라 궁구하는 게 없어진다. 그냥 들을 뿐이고, 앵무새처럼 따라할 뿐이다. ‘왜 이 질문이 나왔을까? 왜 이 답이 나왔을까?’ 하는 의심하지 않으면 공부의 진척이 없다. 하지만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법을 깨우쳐 주면 어느 순간 ‘아하’ 하는 깨달음이 온다. 그런데 왜 이렇듯 좋은 문답법이 사라지고 있을까? 선지식의 부재 때문?

한 순간도 딴생각 못하게, 그야말로 긴장감이 감도는 1부 문답 강의시간이 지나면 2부 소리향차법회가 진행된다. 아름다운 클래식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침향의 향기를 느끼고 보이차를 마시며 묵언 정진, 말없이 오감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자기 안의 깊고 깊은 마음, 심층의식으로 향하게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세생생 묵은 찌꺼기가 맑혀지고 수행에 깊이가 더해진다. 두터운 장막을 제거해야 진리를 보기 쉬운 법, 소리향차는 아주 좋은 수행 도구다.

불교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음악을 수행프로그램에 도입한 스님은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 2만 장이 넘는 음반을 가지고 있을 정도니 스님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수행과 전법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스님은 음악이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주고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고, 조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조화는 깨달음의 경계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음악을 수행프로그램에 접목한 측면도 있지만,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음악을 가까이 했다. 스님과 친분이 두터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불화가 방혜자 선생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개화사에 들르는데, 그분이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불교 이야기만 할 수 없었기에 음악을 더욱 가까이 한 것이다.


페이스북, 카페에 글쓰기, 책 출판하기, 소리향차법회 등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부처님 법 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스님의 모습에서 나는 조화, 평화, 행복, 희망을 보았다. 가을하늘이 참 높고도 맑다. 며칠 후면 추석 명절이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떠오르면서 “더도 덜도 말고 송강 스님만 같아라”는 말을 소리내 외치고 싶다.

   
민족사 주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월간 <법륜>, <현대불교>, <불광> 편집부장, 불교시대사 편집기획위원을 역임했다. 엮은 책으로 『행복해지는 습관-정무 스님의 세상 사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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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순 2013-09-27 15:02:48
수락산님 감사합니다. 고민만 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불자임을 반성합니다. 앞으로 행동하는 불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락산 2013-09-26 14:32:51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웬지 무겁고 딱딱하게 느껴지던 목소리
사진으로 뵈니 되게 인상 좋으시네요~ ㅎㅎ
"부처님 법을 좋아하면서도 사람 때문에 떠나가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계속 떠나는 중이지요.
송강 스님처럼 주인임을 망각하고 종단 현실에 무관심하며 열심히 자기만 잘 사는 스님
사기순 님처럼 고민만 하고 고언을 내놓지 않은 지식인 불자의 책임이 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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