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잊은 겨레, 미래가 없다
역사 잊은 겨레, 미래가 없다
  • 변택주
  • 승인 2013.09.23 14:1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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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변택주의 <섬기는 리더가 여는 보살피아드>-37. 최초 국사교과서 저자 김교헌
뉴라이트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400여 건 오류를 기록 다른 교과서보다 2배나 더 많았다. 수정 보완을 해 최종 검정에 통과했지만, 최종본에서도 오류가 298건 나타났다고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4개 학술단체가 밝혔다. 독립운동을 다룬 35쪽에 이승만은 36번 나오는데 김구는 8번, 안창호는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5.16쿠데타 정당성을 옹호하고 있으며, 현대 정치인 평가도 이명박 대통령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4.3, 4.19, 5.18 같은 민주화 운동을 왜곡하거나, 민간인 희생을 줄여 적고 있다.

나라는 몸, 역사는 얼과 같아
고려 학자 행촌杏村 이암李嵒(1297-1364)은 <단군세기檀君世紀> 머리글에서 “나라는 사람에게 몸과 같고, 역사는 얼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잊은 겨레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을 남겼다.

▲ 강화 마니산 참성단

우리 역사 왜곡을 말할 때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이병도를 떠올릴 만큼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 비틀기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문정창文定昌(1899-1980)이 지은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 (박문당, 1967)에 따르면,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나서 1911년 말까지 한해 남짓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군경을 동원, 온 나라를 샅샅이 훑어 51종 20만권 사서를 강탈하거나 불태웠단다.

1930-1940년대에 일본 궁내성 왕실 도서관(서릉부)에서 12년 동안 사무 촉탁으로 근무하고 <화랑세기花郞世紀>필사본(남당 사후인 1989년과 1995년에 발견)을 남긴 재야 사학자였던 박창화朴昌和(1889-1962)에 따르면, 일제는 1916년부터 세 해 남짓 조선사를 편찬한다면서 또 한 차례 사적을 거둬들여 그 가운데 희귀한 비장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나라奈良현 도다이사(東大寺)에 있는 왕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正倉院과 동경대 비밀서고처럼 은밀한 곳에 깊이 숨겨놓았다. 그런데 일제는 한민족 혼을 말살하려고 단군 관련 기록을 중점 강탈하거나 약탈해 일본으로 밀반출했다고 한다. 이마니시 류와 이병도가 일제강점기에 한겨레에게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은 아마 환국桓國-신시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고조선 이전 상고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일이다.

교과서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국사교과서는 <신단민사神檀民史>다. 이 책은 1923년 처음 출간되어 만주와 해외동포, 독립군 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저자는 조선 고종 때 대사성, 문헌비고찬집위원,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1868-1928) 선생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군과 동포들에게 읽힐만한 역사서가 없어 안타까워했던 선생이 규장각과 당시 전해지던 각종 사서를 두루 참고하여 혼신을 기울여 쓴 역사서이다.

▲ 김교헌과 신단실기 표지

신교사관 최남선, 신채호에게 이어져

구한말 석학 김교헌은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해 대사성, 문헌비고찬집위원을 거쳐 1909년 규장각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국조보감감인위원을 겸했다. 김교헌은 1910년 일제가 우리 국토를 강점하고 민족혼을 말살하려고 군경을 동원해 온 나라에서 사서를 수거해 강탈하고 태워 없애자 이에 맞서 현채玄采, 박은식朴殷植,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이끌면서 고전과 사서를 수집하고 간행, 보급에 앞장섰다. 그리고 <신단민사神檀民史>, <신단실기檀記實記>, <배달족역사>를 펴내 겨레의식을 불어넣고 역사 원형인 신교사관을 정립했다. 김교헌 신교사관은 최남선, 장지연, 유근,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에게 영향을 미쳐 민족사학과 국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독립운동가인 석농石儂 유근柳瑾은 <신찬초등역사>(1910),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1920),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조선사연구>(1946)를 써서 민족사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 근대사학확립을 했다. ‘독사신론’이 비록 미완성 작품이지만 단군시대부터 발해시대까지 근대 민족주의사학 기본 골격을 명쾌하게 제시, 우리나라 근대사학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13년 신채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예관 신규식 초청으로 상하이로 가 신규식, 박은식과 더불어 ‘박달학원’을 세워 한국사를 강의했다. 1914년 윤세복 초청으로 다시 펑텐奉天성 회인현으로 옮겨가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선사’를 집필했다고 하나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김교헌은 1918년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이 선언은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뒷날 도쿄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 기폭제가 되었다.

<신단실기>는 한국사를 배달족檀君族이라는 한겨레로 체계를 잡고 요遼·금金까지 한국사에 넣는 역사를 정립, 한반도에 머물렀던 역사인식을 대륙으로 넓혔다. <신단민사>는 통사 체계 구성을 목적으로 한 교과서용 편찬으로, 이 책에서도 대륙사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때문에 <신단민사>는 당시 항일 독립군으로 길러낸 사관학교 학생들 국사 교재로 널리 쓰여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배달족역사> 또한 <신단민사>와 닮은 통사체계 구성으로, 상하이임시정부에서 간행, 국사교과서로 쓰여 겨레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신단민사>는 광복이 된 1946년 다시 출간되어 ‘신단민족 역사서’로 단군과 동아시아민족사를 적바림한 유일한 역사서이자 교과서로 가치와 의미를 평가받으며,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경영코치, ‘연구소통’ 소장으로 소통을 연구하며, 지금즉市 트區 들으面 열리里 웃길 79에 산다. 펴낸 책으로는 <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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