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감
죽비감
  • 현각 스님
  • 승인 2013.09.09 15: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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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14
이제 족히 5~6년이 되었나 보다. 도량에 대나무가 없기에 지방에 갔다가 몇 촉을 얻어다 심은 대나무 말이다. 연전에도 추운 겨울에 심었다 낭패를 본 일이 있기에 각별히 관심을 쏟고 있는 터이다. 지난 해에는 냉해가 심하여 새잎을 틔우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마치 삼대 마냥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모습이 핏기 잃은 사람 같기도 했다.

삼 밭에서 삼 밑둥까지 낮게 낫을 넣어 베어 낸 다음 다발로 묶어 김이 물씬나게 쪄내고 나면 삼과 삼대를 일일이 벗겨 낸다. 맨살이 드러난 삼대를 다발 다발 세워 놓으면 가을의 전령 잠자리가 날아와 쉬어가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 때 아이들은 견실한 삼대 하나를 뽑아들고 잠자리채를 만든다. 삼대 꼭지를 떼내고 두 가닥으로 벌려 버팀대를 끼워놓으면 역삼각형의 공간이 생긴다. 이걸 가지고 거미줄을 입혀놓으면 손색없는 아이들의 장난감 잠자리채로 변신하는 것이다.

추위에 몸살을 하다 알몸을 드러낸 삼대가 되어버린 대나무는 푸른 산에 낯선 객이 되어 문안을 드리고 있는 듯 머쓱하게 서 있다. 이른 봄부터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달떠 안절부절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의 속사정을 헤아렸을까. 계곡 밑바닥에서 촉이 올라오고 있었다. 우후죽순이란 말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봄비만 오면 몰라보게 자라는 대나무의 성장이 매일 기쁨을 안겨 주었다.

사정이 있어 여름 내내 눈길을 마주할 수 없던 대나무가 어찌 되었을까 마음이 갔다. 요리조리 세심한 눈길이 대나무에서 대나무로 옮겨 갔다. 어찌 이럴수가 있나. 지난 긴 긴 장마에 시련이 닥친 것이다.

범람하는 계곡물에 거친 돌들이 이들을 할퀴고 간 것이다. 그 자리에는 깊은 상처가 생겼다. 상당한 시간이 걸려 자가 치료를 한 모양이다. 인간 세상과 같이 구급차나 구급약을 대령할 수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상처가 완치된 자리는 마디가 짧았다. 그 다음 마디는 정상적인 발육을 한 것이다. 제대로 자랄 수 없을 만큼 통증을 감내했을 대나무 마디가 성스러워 보인다. 인내의 화신 같기도 하였다. 물을 좋아 한다는 대나무 속성만 알고 계곡에 심었던 게 우매한 나의 소견 때문이다. 계곡에 심었다가 언젠가 큰 물이 지면 재앙을 입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사유세계는 밀물과 썰물같이 한 범주 속에서만 작용하는 것일까. 무슨 인간까지 들먹인단 말이냐. 오직 옹색한 나의 사유세계를 탓하면 그만인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발육을 하게 된 다음 마디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 대나무가 튼실히 자라면 죽비감으로 최상급이 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로 선방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죽비는 수행승에게 안성맞춤이 된다. 대나무의 한 마디가 상처를 입어 누구의 도움없이 치료가 되었듯이 수행자는 오직 자신과의 치열한 구도 후에 해탈이 따르기 때문이다. 죽비 일 성에 팔만 사천 의 번뇌가 사라지고 바윗덩이보다 무거웠던 화두의 의심덩어리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찌 정신적인 해탈에만 주력할 것인가. 중생이 있는 한 수행자는 육체적 해탈도 사회적 해탈도 도덕적 해탈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중생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사회의 무질서는 그들만의 일이 아니다. 도덕적 붕괴도 먼 나라의 얘기가 아니고 코 앞에 놓인 우리의 문제이다.

긴 여름이 지나간 도량에는 벌써 겨울채비를 하고 있는 개미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먹이를 창고에 비축하는 일 보다 혹독한 북풍을 이기는 것이 우선인 모양이다. 북쪽에 높게 언덕을 쌓고 있다. 물론 남향의 햇살을 잘 들게 함이기도 하다. 조석으로 서늘한 날씨라고 긴 팔 옷을 챙기고 있는 인간의 삶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고 더 사유할 줄 아는 모습에서 둔탁한 정신세계에 새 기운을 축적하게 된다. 아마 저들의 모습을 보니 금년 겨울도 여간 추울 모양이다. 기상대 예보보다 훨씬 빠른 예보다.

그림을 읽고 난향을 듣는 심미안이 있듯이 많은 수행자들이 죽비소리를 듣는 단계를 넘어 그 소리를 읽는 예지가 넘쳐나길 바란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최현각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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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un7 2013-09-22 17:56:42
禪 을하는데 꼭 알아야할 中道 와 相, 相 은 모양의뜻이 아니고, 相의뜻은 相 對 性 과 差 別 性 이다. 불교의 핵심 論理中에 하나이다. : 中道는 불교의 敎 理 와는 관계가없고 六祖大師또한 中道 에대한 用語 자체도언급하신바 없다.
中道 에 對 한 부처님의언급; 부처님이 成佛하시기 前 王子로서,29歲에 當時 인도 바라문교 의 바라문으로 出家하셔서,바라문교 의 수행방법인 忍慾 과 苦行 으로서,6년간 斷食(극 小食)하셔서,피골이상접하여 쓰러질정도였다. 苦行의 무모함을 깨닫고 , 단식을중단하고,보리수 나무아래서 7일밤낫을 사색 , 禪定에 드신후에, 弱肉 强食 生老病死 에 대한 大覺을이루시고 成佛하셧다.大覺하신 내용은, 초전법륜에서 말씀하신 四聖諦 八正道로 시작하셨다. 中道는 大覺의 진리가 아니고, 苦行또한 목적이아니고.悟覺깨달음 을위한 수단인데,.悟覺을 위해서는, 苦行이나安樂(王子시절)의 극단적인 어느한쪽의 생활이 아니고,苦行과安樂 의 中間, 中道의生活이 수행생활에 적당하다 는 것이다. 백장스님의 修道者 청규와도 같은것이다.
宗敎와 學文은다르다. 학문을 경시하는것이 아니고,禪과學文(敎理)을 선명히 구분하고, 상호 이해를 깁히 하자는것이다.
宗敎는 心身의 實體 實在이고 ,學文은 억만가지도 가능한 思量이다.
부처님이 보이신 三處 傳心(佛 佛心)을 가르치기 위해서,그렇게많은 經을 설하셨다.
그러나 經은 말이나 글 (書) 이지 佛 佛心은 아니다. 삼장을포함해서 많은스님들 학자들의 著書들은 학문이지, 佛 佛心은아니다.불교의 觀点에서 말하면 思量이다.
법달이 삼천번 法華經을 독송 했어도,見性成佛하기전에는, 妄想의思量 이다.
불교에대한 연구 저서 분석 들은 궁극적으로,思量이다.마치 부처님을가르키는 손가락이다 .가르키는 손가락이지, 부처는 아니다.가르키는 손가락을보고, 見性했다든가 부처로 착각하는 가짜도인( 道人 )이 너무많다.
最近代 성철스님은 學者僧으로서, 中道를 主張하여 한국불교에, 가짜道人을 量産하여,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은하지않고 것넘엇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 等 에서,六祖法寶壇經 에 中道라는 表現이 있다 하시지만, 六祖壇經 의 原本 인 돈황본( 돈황신본 )에는 中道라는 表現 用語자체가 한마디도 없다. 六祖壇經에는 不立文字 言語道斷 , 禪을모르는 學者僧이 모르는 部分이 있다. 성철스님 또한 學者僧의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學者僧들은 思量으로서, 끗까지 전부를 해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순을 갖이고잇다. 육조단경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數百年후에 여러學者僧들에 의해서 原本(돈황본)뒤에 써서붙여서 개조된,혜흔본,흥성사본,대승사본,설승본, 종보본, 덕이본 等等 많은기록이 있다. 성철스님은 이中에 넓이 알려진 덕이본 을 예로들어, 육조대사 의 中道를 主張하시지만. 덕이본 은 六祖大師님이 入寂하신후 數百年후에 原本뒤에, 學者僧들이 써서붙여서 변조된것이다.
中道란 불교에 맞지않는 주장이다. 예를들어서, 有 또는 無 에서,한쪽을선택하면.편견 단견 이 되어서,見性의 答이 되지않는다고치자, 有도아니고 無도아니니까, 有無또한 存立할수 없으니, 中道 또한 存立할수없다. 中道는 妄想에서 生成된 思量이다.
시심마 話頭를 제대로 들어보면, 本人이 見性했는지 못했는지 선명하게 알수있고, 보림에는 定한법이없는상태이고, 話頭는알고자하는 ? 인데 ,中道라는 先入見 思量을갖이고 어떻게 修行에 精進할수 있겠는가?
육조단경 에서,見性은 반드시, 눈밝은 禪 師의 점검을 받지않으면,外道에 떠러진다는
六祖大師의 경책을 想 起해야한다. yoong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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