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홧가루
송홧가루
  • 현각 스님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 승인 2013.05.24 14: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12.

싱그럽다는 말을 실감하는 아침이다. 간밤에 소리 없이 는개가 내린 것도 아니건만 금낭화에 맺힌 이슬방울이 영롱하다. 햇살에 비친 구슬은 순간 진주도 되었다가 무지개도 품는다. 무지개는 비가 그친 뒤 계곡의 옹달샘에서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난다.

언젠가 정동진 앞바다를 유람하다가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그 검푸른 바닷속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보고 바닷속에도 무지개가 뜨나보다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무지개는 물이 있는 곳이라면 존재하는 것인가. 작은 물방울이 맺힌 금낭화에도 일곱색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 무지개는 물방울과 햇빛이 있는 곳이라면 가능한 모양이다.

금낭화를 보고 있노라면 잊혀졌던 전설의 작은 실타래가 풀린다. 겨울이면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면 뚜껑에 밥물이 맺혔던 놋주발이 아련히 떠오른다. 아랫목에는 몇 방울의 밥물이 고여 있기도 했다. 어머니의 정이 넘쳐나듯이 ⋯.

산을 오르려고 등산화 끈을 맨다. 연못 난간에 발을 올리고 단단히 맨다. 언제 온 전령인지 송홧가루가 신발에 내려와 있다. 연초록의 색을 띄고 얄따랗게 실눈을 뜬 듯 고랑을 이루고 있다. 뭔가 함 없이 한다는 말은 예삿말이 아닌 듯하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간단한 도수 체조를 하고 났다. 연못가에는 송홧가루가 짙은 선을 그어 놓았다. 수량(水量)의 높낮이에 따라 그 선은 한 둘이 아니다. 누가 장대를 대고 그어 놓은 듯 수평을 이루고 있다. 물의 속성은 낮은 곳을 좋아하고 공평을 제일로 하다 보니 사방 어느 곳 하나 균형을 잃은 곳이 없다.

오늘은 연장을 들고 산에 오르려 한다. 산행 길에 나뭇가지가 무성해졌기 때문이다. 길을 정돈해 주고 싶어서이다. 막상 톱을 가지고 나섰지만 가지를 자를 수 없었다.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이제 겨우 그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그들을 잘라내다니. 다만 인간이 편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차마 톱을 가지에 대지 못하고 바짝 자르지 않은 소나무의 묵은 여백의 가지만 잘라 주었다. 원 줄기에 바짝 자르지 않은 가지는 후일에 옹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소나무에 송홧가루가 날린다. 무지개보다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허공을 날으고 있다. 어느 대작불사의 현장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염원을 가득담은 신도들의 향 기운이 하늘로 날아 지상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이 마주하는 듯 했다. 저 천상에는 염원의 향내가 가득하겠지. 뿐만 아니라 송홧가루로 치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라고 시인 박목월은 윤사월에서 읊고 있지만 봉우리를 훨씬 높이 넘나드는 송홧가루가 아닐까 한다.
이 절기가 되면 유독 산을 찾는 이유가 있다. 송화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등산길 초입에서부터 산 정상까지는 온통 소나무 군락이다. 그러니 그 나무에 피어 있는 소나무 꽃에 눈길을 보내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 산에 취한 등산객은 많은 듯 한데 나무나 송화에 취한 사람은 드문 듯 하다. 또 하나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중생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그 중생심의 내용은 이러하다.

송홧가루는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한다고 한다. 치매에도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또 꽃가루에 함유된 콜린은 지방간을 해소하는 특수물질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노화예방에도 효과가 있다지. 그러니 그 속에 흠뻑 빠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하면 답이 될지 모르겠다. 명나라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송화는 맛이 달고 따뜻하며 독이 없다고 했고, 심장과 폐를 원활하게 하고 기를 늘린다고 했다.

바위에 가루가 주버기로 앉아 있으면 쉼터가 된다. 등산객의 발길이 숨 가쁘다. 저렇게 산에 올라서도 바쁜 걸음이라면 뭐 하러 산에 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쉬고 쉬어 가다 보면 자연과 나는 쉽게 동화될 수 있다. 자연과 동화는 우선 편안함에 있다. 시름을 떨칠 수 있다. 신비감을 느낄 수 있다. 신비감이 없는 생활은 새장에 갇혀 사는 새의 삶이다. 창공을 날아보지 않고 하늘 세계의 무궁함을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송홧가루는 허공세계를 수놓을 것이다. 시샘하는 인간 세상에도 내려앉을 것이다. 절기가 바뀔 때 까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 어느 날 찬란했던 날의 꿈을 전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법주사 선학대학원장.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최현각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