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最澄)
  • 김춘호
  • 승인 2013.05.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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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10. 천태종 개조 사이초
1. 나라시대 후기의 불교계

율령체제하에서 꾸준히 추진되었던 국가불교 정책은 불교의 지방 확산이라는 양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남도육종(南都六宗)으로 대표되는 학문불교의 발전을 불러온다.
그러나 나라시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불교계는 지나친 세속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우선 그 원인에 대해 짚어 보자.

율령국가체제하에서 규정되는 불교의 존재이유는 진호국가(鎭護國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승려들의 주된 소임은 호국법회에서 의식을 집전하고 경문을 암송하거나, 주술적 영험력을 닦아서 천황이나 그 일족들이 병에 걸리는 등의 위급상황이 닥치면 간병선사(看病禪師)로서 치병에 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국가가 요구하는 승려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은 《법화경》, 《최승왕경》 등과 같은 호국경전의 암송능력, 그리고 다라니, 신주 등의 밀교적 주법의 활용능력 등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의 승려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오로지 현세구복을 위한 매개적 역할이었다는 점이다. 즉, 국가의 안녕과 천황가의 번영이라는 현실적 이익을 불보살께 기원하는 기도자로서의 소임만이 강조될 뿐,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구도자로서의 모습은 물론 보살행과 같은 이타적 종교행자로서의 모습은 문제가 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승니령을 통해 승려들의 자발적 수행이나 포교활동과 같은 종교적 실천행이 엄격히 금지된 상황이었다는 점까지를 고려하면, 당시의 승려들에게는 출세간적 종교가로서의 모습보다는 율령체제에 순응하는 종교관리로서의 모습이 더욱 요구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강좌에서 살펴보듯이, 불교의 세속화와 도쿄(道鏡)와 같은 권력승의 등장은 국가불교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나라시대 후기의 불교는 남도육종과 같은 학문불교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불교의 지나친 세속화와 그에 따른 부작용을 극복해야 한다는 시대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이들이 사이초(最澄)와 쿠우카이(空海)이다. 일본불교사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 이들 두 사람은 나라시대 후기부터 헤이안(平安)시대 초기를 함께 살았는데, 사이초는 히에이잔(比叡山)을 중심으로 일본천태종을 개창하였고, 쿠우카이는 고야산(高野山)을 중심으로 진언종을 개창하였다. 사이초와 쿠우카이의 불교를 헤이안신불교(平安新佛敎), 내지는 남도육종에 견주에 헤이안이종(平安二宗)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번 강좌에서는 우선 사이초의 삶과 그의 불교에 대해 살펴보자.

2. 사이초(最澄)의 생애와 그의 불교

▲ 효교켄 일승사(一乘寺)소장 사이초 진영. 사진:http://www5a.biglobe.ne.jp/
사이초(最澄, 767-822)는 중국계 도래인 호족인 미츠노오히토(三津首)의 후손으로서 767년 현재의 시가현(滋賀県) 오츠시(大津市)에서 태어났다.(766년 출생설도 있음.) 778년 12세 되던 해 생가와 같은 지역에 있었던 오우미국분사(近江国分寺)의 승려 교효(行表, 722-797)의 제자로서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의 성장과정이나 출가의 직접계기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집안이 중국계 도래인 호족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불교 및 한학적 소양을 어려서부터 익혀왔을 가능성이 크다.

14세 오우미국분사의 결원으로 인해 출가를 허락받은 그는 이때 비로소 사이초(最澄)라인 법명을 얻게 된다. 17세에 정식 승려로서의 도첩을 교부받고, 19세에 토다이지(東大寺)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오우미국분사에서 스승 교효 아래에 수학한다. 교효는 743년 쿠호쿠지(興福寺)에서 수계한 승려로서 흥복사에서는 선과 유식을 배운 승려라고 하는데, 자세한 행장은 전하지 않는다.

785년 4월 6일 토다이지 계단원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이초는 비로소 정식 관승(官僧)으로서 거듭나는데, 수계 후 오우미국분사로는 돌아가 국분사 관승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살지 않고 히에이잔(比叡山)으로 들어가 산림수행과 경전연구에 몰두한다.

▲ 토다이지(東大寺) 계단원(戒壇院). 사진:http://www.todaiji.or.jp/

사이초의 이러한 결정의 배경으로 오우미국분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든가, 나가오카쿄(長岡京)로의 천도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불교계의 세속화, 형식화된 수계제도에 대한 환멸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무엇보다도 세속화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환멸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예산대사전(叡山大師傳)》에 수록된 당시 그의 원문(願文)에서 스스로의 행적을 깊이반성하고 육근 청정의 경지에서 정계(淨戒)를 구족하여 진여의 이치와 반야를 구하고, 대승이타행을 실천할 것을 서원하며 이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산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그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히에이잔에 들어가 작은 초암을 지은 사이초는 그곳을 히에이산사(比叡山寺)라고 이름하고 수행과 학문연구에 전념한다. 후에 이곳을 일승지관원(一乘止觀院)이라고 하였는데 현재의 엔랴쿠지(延暦寺) 근본도장(根本道場)의 전신이다.

입산 후 다양한 경전을 편력하던 사이초는 화엄의 장소 등을 통해 천태교학을 알게 되고, 당시 토다이지(東大寺) 당선원(唐禪院)에 있던 감진(鑑眞)이 들여온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를 서사하여 보고 법화일승(法華一乘)·일체개성(一切皆成) 등의 천태종의 입장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794년 헤이안(平安, 지금의 교토)으로의 천도가 단행되고, 수도와 인접한 히에이잔에서 수행하던 사이초는 칸무(桓武)천황의 눈에 띄게 되어, 797년 내봉공십선사(內奉公十禪師)의 소임을 맡게 된다. 내봉공십선사는 궁중안의 법당에 근무하는 10인의 승려를 말하는데, 주된 업무는 천황가의 안녕을 기도하거나 천황에게 조언하는 등이었다.

▲ 히에이잔 엔랴쿠지 근본도장(比叡山 延暦寺 根本道場). 사진:http://www.hieizan.or.jp/

산중에 숨어 수행에 전념하던 은둔승 사이초가 일약 천황의 최측근 조언자로 발탁된 것에 대해서는 《예산대사전》에 전하는 바와 같이, 이미 궁중에서 천황을 내봉공으로서 천황을 보좌하던 수흥선사(壽興禪寺)가 사이초의 입산 원문(願文)을 보고 그 문장의 수려함과 정신의 순수함에 감명 받아 사이초를 찾아 친교를 맺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떻든 이를 계기로 사이초는 일개 은둔승에서 십선사(十禪師)라는 권위를 얻게 되고, 그로부터 4년 후인 801년에는 남도(나라)의 16명의 고승들 앞에서 법화십강(法華十講)을 행하며, 이듬에 고웅산사(高雄山寺)에서 나라 남도육종의 승려들이 운집한 가운데 천태 강의를 행한다.

803년 견당사 파견이 결정되고, 사이초는 천태의 가르침을 보다 깊게 수학하기 위해 입당구법을 허락해 줄 것을 칸무(桓武)천황에게 청하고, 이듬에 7월 6일 견당사의 일행으로서 입당한다. 이때 후에 고야산(高野山)에서 진언종(眞言宗)을 개창한 쿠우카이(空海) 역시 함께 입당하는데, 쿠우카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좌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자.

중국 명주에 무사히 도착한 사이초는 곧바로 천태산으로 향하여 천태종 제7조 도수(道邃)와 천태산 국청사 좌주 행만(行満)으로부터 천태학을 배우고, 전적 및 법구 등을 밭는다. 또한 당시 새롭게 대두되고 있었던 진언밀교에 대해 대가 순요(順暁)를 찾아가 배우기도 한다.

이리하여 사이초의 8계월간의 단기 입당구법여행은 끝이 나고 무사히 귀국하는데, 사이초가 귀국시에 가져온 경전 및 전적은 모두 234부 460권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 전적은 모두 필사하여 남도칠대사(南都七大寺: 興福寺, 東大寺, 西大寺, 藥師寺, 元興寺, 大安寺, 法隆寺)에 기증하였으며, 그것을 기록한 목록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806년 쿠우카이(空海)가 입당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사이초는 당에서 정식으로 밀교를 배우고 돌아온 그를 밀교의 스승으로 받들며, 제자들과 함께 진엄밀교의 입문관정을 쿠우카이에게 직접 받기도 한다. 이것이 당시로서는 무명이었던 쿠우카이(空海)를 일약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밀교관련 서적을 빌려보거나 제자들을 보내어 밀교를 배우게 하는 등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밀교의 근본경전의 하나인 《이취경(理趣経)》의 해설서인 《이취석경(理趣釋經)》의 대여를 쿠우카이가 단호히 거절하면서 두 사람은 멀어진다. 밀교의 비법을 수행을 통해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다만 문자만을 통해 이해하려는 사이초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것이 쿠우카이의 거절 이유였다. 하지만 사이초의 입장에서는 국가적 공인까지 받은 일문의 수장으로서 그것을 버리고 진언밀교를 다시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이초의 만년은 논쟁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사이초는 법상종의 승려 덕일(德一)과의 삼일권실(三一權實) 논쟁과 엔랴쿠지(延暦寺)에 대승계단(大乘戒壇)의 설치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먼저, 삼일권실 논쟁에 대해 살펴보자. 사이초가 법화경 등을 근거로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반드시 언젠가는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데 대해, 덕일은 법상종의 교의를 근거로 불성이 전혀 없는 인간이나 불성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인간도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반드시 성불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 히에이잔 엔랴쿠지 계단원(比叡山 延暦寺 戒壇院). 사진:http://shop.plaza.rakuten.co.jp/

결과적으로 사이초의 입장은 히에이잔에서 수학한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 조사들에게 계승되어 일본불교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두 번째는 대승계단의 설치를 둘러싼 논쟁이다. 한 사람의 정식 승려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계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수계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계단이다. 그런데 당시는 국가불교의 흐름 속에서 토다이지(東大寺) 계단원(戒壇院)과 같이 나라의 일부사찰의 계단만이 공인되고 있었다. 따라서 천태종에서 제자를 키워냈다고 하더라도 수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나라의 사찰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초는 사가(嵯峨)천황에게 히에이잔 엔랴쿠지(延暦寺)에 새로운 계단 설치를 허락해 줄 것을 탄원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나라불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성사되지 못하다가 822년 7월 그의 사후 7일째에 성사된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경전이 화엄경이라면 일본은 법화경이다. 법화경문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본의 사상, 문화, 예술 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 법화경의 내용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한 기틀을 마련한 것이 사이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히에이잔(比叡山) 엔랴큐지(延暦寺)에서는 일본불교를 이끌었던 수많은 조사들이 배출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보살십지(菩薩十地)와 같은 수행의 단계가 마련되어 수행자들은 그 단계에 따라 수행의 깊이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이초의 가르침은 제자 엔닌(円仁)와 엔친(円珍)에게로 계승되어 천태밀교(天台密敎, 台密이라고도 함)라는 쿠카이의 밀교와는 다른 밀교가 만들어져 많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親鸞), 시종의 잇펜(一遍), 임제종의 에이사이(榮西), 조동종의 도겐(道元), 일련종(日蓮宗) 개조 니치렌(日蓮) 등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를 이끌었던 조사들이 모두 히에이잔에서 수행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사이초의 히에이잔 불교는 일본불교의 모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사이초(最澄) 연표.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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