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불교의 변질
국가불교의 변질
  • 김춘호
  • 승인 2013.04.2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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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9. 국가불교의 변질
1. 학문불교의 융성
율령체제하에서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한 법회와 기도를 담당하였던 승려들은 국가에 의해 그 신분이 보장·관리되었던 이른바 관승(官僧)이었다. 그리고 국가는 관승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방법으로서 출가제도의 국가관리와 더불어 승려들의 학문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 결과 나라의 거대사찰을 중심으로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이라는 종파가 형성된다.

▲ <남도육종(南都六宗)>

엄격히 말하면 이들 남도육종은 종파(宗派)로서의 성격보다는 학파(學派)로서의 성격인 강한 학문승 집단이었다. 당시는 진호국가를 위한 주술적 기도행위 만이 승려들의 종교적 실천행으로 용인되고 있었던 반면, 교학의 연구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승려들의 종교적 에너지가 교리연구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남도육종으로 대표되는 학문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2. 출가제도의 문란
국가에 의한 불교통제의 근간은 출가제도의 국가관리였다. 출가자의 수를 국가가 정하고, 출가자로서의 자질을 국가가 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운영하는 것으로서 출가자들의 질적 수준을 유지하는 한편,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한 법회와 기도의 적임자로서의 관승(官僧)을 생산해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라시대 후기가 되면 이러한 국가운영의 출가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예로서 우선, 교키(行基)와 그를 따르던 교키 집단이 토다이지(東大寺) 대불건립에 활용됨으로써 교키 집단내의 사도승(私度僧)들의 집단득도가 허락된 것을 들 수 있다. 엄격히 말해 당시의 범령대로라면 국가의 허락 없이 득도한 이들 사도승들은 승리령 위반자들로서 엄중한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천황이 병에 걸리거나 하면 치병을 위한 조치로서 자의적인 대량집단득도가 빈번히 행해지기도 하였다.

▲ <정창원(正倉院)> 나라켄 나라시(奈良県奈良市)(사진:http://wadaphoto.jp/maturi/siwasu1.htm)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의 <우바새공진해(優婆塞貢進解)>라는 문헌에는 당시 출가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전해진다. 토다이지(東大寺) 대불조영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전이나 불교의식 등의 일정수련기간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득도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는 출가제도 자체가 엄격한 기준에 의해 시행되기보다는 노역에 대한 대가, 내지는 포상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율령체제하의 막중한 세금과 부역 등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승려가 되는 사람들도 늘어나 국가에서는 이를 단속하기 위한 여려 방안들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출가제도의 방만한 운영은 승려질의 저하로 이어졌고, 승니령이 지향하는 관승으로서의 정행자(淨行者)라는 승려상이 유명무실화되어 간다.

3. 요승 도쿄(道鏡)
그러던 중에 일본고대사에 있어서 요승(妖僧)으로서 유명한 도쿄(道鏡, ?-772)라는 승려가 등장한다.
도쿄는 법상종의 승려로서 궁중의 안의 법당이었던 내도량(內道場)의 간병선사(看病禪師, 주술 등으로 병에 걸린 천황의 간호 및 치병을 담당)로 있으면서 여제 코겐(孝謙)천황의 총애를 받고 정무에 관여한다. 764년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706-764)가 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로 끝나고, 도쿄는 그해 태정대신선사(太政大臣禪師)로 임명되어 조정의 최고관직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765년 법왕(法王)이 되는데, 종교적 최고 권위와 현실적 최고 권력을 동시에 소유하게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는 그의 동생 정인(淨人)을 다이나곤(大納言, 종2위)에 임명하는 등 자신의 일족들을 조정의 주요보직에 임명함으로서 실권을 확고히 유지하려 하는데, 당시 5위 이상의 고급 관료에 그의 일족 10명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도쿄의 전횡은 후지와라씨(藤原氏)와 같은 유력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또한 도쿄에게 황위를 넘겨야한다는 우사진구(宇佐神宮) 하치반신(八幡神)의 신탁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게 되고, 그것을 믿은 도쿄는 내심 황위 찬탈을 꿈꾸기도 하지만 신탁이 허위로 밝혀지자 단념하였다고 한다.(宇佐八幡宮神託事件)

▲ <우사하치만진구(宇佐八幡宮)> 오이타켄 우사시(大分県宇佐市)(사진:http://www.jalan.net/kankou)

770년 코겐천황이 병사하자 코닌(光仁)천황이 즉위하게 되고, 도쿄는 같은 해 8월 지금의 도치기켄(栃木県) 시모츠케시의 야쿠시지(藥師寺, 터만 남음)로 좌천되었다가 772년 사망한다.

여제의 총애를 받은 승려 도쿄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도쿄가 코겐천황의 정부였다는 풍문을 만들어 냈고, 급기야 도쿄가 거근(巨根)의 소유자였다는 속설까지 유행하게 되어 그것이 에도시대에까지 이어지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이와 같은 출가제도의 문란한 양상과 도쿄와 같은 권력승의 대두, 그리고 불교계의 세속화경향은 이미 국가불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잉태·배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승니령하에서는 승려들의 자발적 수행이나 포교 활동과 같은 종교적 실천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관승들에게는 출세간적 종교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율령체제에 순응하는 종교관리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의 관심 역시 세속적 권력이나 현세적 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시대 불교계의 세속화경향에 경종을 울리며 새로운 불교로의 도약에 압장선 인물이 사이초(最澄)와 쿠카이(空海)이다. 일본불교의 형성과 전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평가되는 이들에 관해서는 다음 강좌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창원(正倉院)  나라 토다이지(東大寺) 서북쪽에 위치한 고대 창고로, 쇼무(聖武)천황, 코메이(光明)황후의 애장품을 비롯하여 나라시대 천황가의 보물들, 다양한 미술 공예품, 고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었던 보물창고다. 현재는 토다이지의 일부로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주>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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