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서 깨닫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망망대해에서 깨닫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 유응오
  • 승인 2013.04.0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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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유응오의 ‘culture club’-6. 라이프 오브 파이
끝내 풀 수 없는 원주율, 끝내 닿을 수 없는 절대성
식인섬의 양면성은 ‘불사선 불사악’ 연상시켜

선재동자의 구도기(求道記)인 《화엄경》<입법계품>에는 53선지식이 등장하는데, 이 선지식들의 직업이 다채롭다. 도량신, 주야신, 천(天) 등 신의 지위에 놓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라문, 선인 비구, 비구니 등 수행자들도 있고, 왕, 부자, 현자 등 사회 지도층들도 있다. 심지어 선지식에는 뱃사공, 매춘부 등 사회 밑바닥들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법정 스님은 《스승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결국 진리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구도의 길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업(業)으로 하고 있는 그 길에 통달한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계통이나 명장(明匠)은 있다. 영화감독 중에서 명장을 꼽으라면 필자는 이안 감독을 꼽고 싶다. 그 이유는 단 한편도 재미없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웰 메이드하면서도 영화마다 삶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출신 감독 중에서는 허리우드에 진출해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거머쥔 대표적인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e)》역시 기대에 찬물을 끼얹지 않은 대가의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안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즐거웠고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하여, 단선적인 스토리텔링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안 감독의 재주에 놀랐고(대가 감독이 만든 3D 영화라는 점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와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의 대부분이 조난당한 파이와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라이프 오보 파이》는 《아바타》에 비해 현저하게 단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눈이 호강한다.’라는 느낌을 주는 3D 영화 특유의 재미는 고스란히 가져가고 있다.) 단순한 서사 속에 생에 대한 성찰을 담는 이안 감독의 혜안(慧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의 원작은 40여 개국에서 700만부가 팔렸으며,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한 동명 소설이다.

영화의 서사는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인 파이가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을 당하게 된다. 배에는 동물들도 실려 있었던 터라 조난을 당한 것은 파이만이 아니다. 구명보트 안에서 파이는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갈 호랑이가 함께 머물게 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파이’는 227일간 기묘한 동거를 한다. 항해 중에 한 무인도에 도착하지만 그 무인도는 평화로운 풍광과는 달리 밤이 되면 식인섬으로 돌변한다. 섬을 빠져나와 다시 항해한 끝에 파이는 남미의 한 바닷가에 도착하게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미학은 크게 두 가지이다. 말미까지 영화에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은 3D 영화 특유의 판타스틱한 영상미학이다. 그러나 말미에 와서는 영화가 지닌 철학적인 메시지에 더 주목하게 된다. 영화 말미에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허구일 수 있다는 암시를 던진다.

영화 속에서는 보트에 탄 것은 하이에나와 다리를 다친 얼룩말이었다. 이어 바나나를 타고 온 오랑우탄이 보트에 올랐다. 하이에나는 얼룩말의 몸을 먹는가 싶더니 오랑우탄마저 죽였다. 그때 보트 밑에 숨어 있던 리처드 파커가 나타나 하이에나를 죽였다. 그래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기묘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박 회사의 사람들은 파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바나나는 물에 뜨지 않고, 지구상에 식인섬은 발견된 게 없으니 선박 회사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파이의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렸던 것이다. 하여 파이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구명보트에는 파이와 어머니, 배에서 만난 불교신자, 고약한 성격의 주방장이 타고 있었다. 다리가 다친 불교신자는 일찌감치 죽었다. 주방장은 불교신자의 인육을 이용해 낚시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어머니가 화를 내자 주방장이 어머니마저 죽였다. 분노한 파이가 주방장을 죽였다.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도식화하면, 주방장은 하이에나로, 엄마는 오랑우탄으로, 불교신자는 얼룩말로, 자신은 리처드 파커로 바뀌는 것이다.

반전과 함께 관객들은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는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 해답은 1884년에 벌어진 난파선 미뇨넷호 사건에 있다. 미뇨넷호가 침몰했을 때 구명보트에는 세 사람이 몸을 싣게 됐다. 그런데 더들리라는 선장이 스티븐스라는 항해사와 모의해서 급사 소년인 리처드 파커를 살해한 뒤 그 인육을 먹었다.

영화 속 정황상으로 봐도, 원작의 모티브가 된 미뇨넷호 사건으로 봐도 보트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은 뒤늦게 파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연과 인간사회가 양면적이기 때문이다. 흔히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자연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입장과 자연은 약육강식만이 존재한다는 입장.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견해 중 이안 감독은 어디에 동의하는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둘 다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주인공의 이름이 파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아름다운 해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지만 ‘피신’은 오줌싸개라는 뜻이어서 주인공은 친구들로부터 수시로 놀림을 받는다. 하여, 주인공은 ‘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는다.

잘 알다시피 파이는 ‘원둘레의 길이와 원의 지름의 비율’을 일컫는 원주율(圓周率)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인류는 정확한 원주율을 찾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숫자만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원주율은 절대적인 가르침에 다가갈 수 없는 인간 존재와 유사하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에서 조난당한 파이가 리처드 파커라는 환영의 분신을 만드는 것은 뱅골 호랑이처럼 의연히 삶을 헤쳐 나가고 싶은 자기 의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사상에 입각해 보면, 이 영화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자연은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라는 화두. 그리고 중생은 완전무결한 불성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화두.

전자의 화두에 대한 해답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파이가 잠시 머문 섬은 낮에는 평화로움을 간직하지만 밤이 되면 식인섬으로 돌변한다. 밤이 되자 파이가 마셨던 연못에는 물고기가 둥둥 떠다니고, 파이가 딴 고혹적인 빛깔의 꽃에는 사람의 이빨이 들어 있다.
낮과 밤이 다른 식인섬은 육조 혜능 대사가 설한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후자에 대한 해답은 망망대해에서 올리는 파이의 기도에 해답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파이가 신성(神聖)에 대해 말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성당에 갔다가 신부로부터 예수의 생애에 대해 듣고서 파이는 ‘신이 독생자인 예수에게 왜 고난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의심을 갖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망망대해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하는 순간이 되자 파이는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절해고독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 파이의 모습은 육조 혜능 대사가 설한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가 끝난 뒤 필자는 마지막 질문을 갖게 됐다.《라이프 오브 파이》는 희극인가, 아니면 비극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그 해답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필자는 파이처럼 긍정적 허무주의를 몸소 체득할 만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기고가이자 작가. 충남 부여 출생.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주간불교>와 <불교투데이> 편집장을 지냈다. 200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했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서 당선해 등단했다. 주요 저서로는 『10.27법난의 진실(화남출판사)』, 『이번 생은 망했다(샘터)』, 『벽안출가(샘터)』, 『불교, 영화와 만나다(조계종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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