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분사의 건립과 토다이지
국분사의 건립과 토다이지
  • 김춘호
  • 승인 2013.04.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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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7. 제6강
1. 국분사의 건립

고대 일본이 율령체제를 정비하여 천황중심의 율령국가로 거듭나면서 불교도 씨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 탈바꿈한다. 국가불교란 국가에 의해 불교의 진흥과 통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불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불교는 어디까지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구로서만 그 기능을 인정받는다.

고대 일본의 율령체제하에서 불교 통제수단으로 강구된 것이 승니령(僧尼令)이었다. 출가제도를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승려의 수 및 자격을 직접 통제하였고, 승려 일상생활의 규제는 물론 민간포교활동 등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려들에게는 이른바 관승(官僧)으로서 국가와 천황가의 번영을 불보살께 기원하는 소임이 강요되었다.

한편, 국가에 의한 불교진흥 사업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국 각 지방마다 이른바 국분사(國分寺)라는 사찰을 건립하게 하는 것이었다.

국분사의 건립은 741년 4월 14일, 쇼무(聖武)천황이 이른바 ‘국분사건립조(国分寺建立の詔)’를 내린 것에서 비롯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당시 국분사의 성격이나 운영실태, 규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각국(各國, 여기서 ‘국(國)’은 행정단위로서 현재의 ‘현(県)’과 비슷한 규모임)마다 7층탑을 건립하고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과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사경하여 봉안할 것.
→ 둘째, 천황스스로 금자(金字)로 금광명최승왕경을 사경하여 전국의 탑마다 안치할 것을 서원.
→ 셋째, 각 지역마다 국분승사(國分僧寺)와 국분니사(國分尼寺)를 각각 하나씩 건립하고, 승사의 이름은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 니사는 법화멸죄지사(法華滅罪之寺)로 하며, 사찰 운영의 재원으로서 승사에는 봉호(封戶) 50호와 수전 10정, 니사에는 수전 10정을 부여하고, 승사에는 비구 20인, 니사에는 비구니 10인을 각각 상주시킬 것. 승사와 니사는 거리를 두고 건립하고 승니는 교계(敎戒)를 받게 하며, 만약 승니의 결원이 있을 시에는 즉각 보충할 것.
→ 넷째, 매월 8일에는 반드시 금광명최승왕경을 독경하고, 매월 보름에는 계갈마(戒羯磨)를 암송하며, 매월 육재일(六齋日, 8·14·15·23·29·30일)에는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여 살생하는 것을 금지함. 국사(國司, 지방 수령)는 이를 항상 감독할 것.

이 ‘국분사건립조’가 내려지기 이전에도 쇼무천황은 가뭄으로 인한 흉년 등의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치면 전국의 각 사찰에 호국경전의 사경이나 불상의 조영을 명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737년 3월에는 장육석가삼존상(丈六釋迦三尊像)의 조영과 대반야경(大般若經) 사경, 740년 6월에는 7층탑의 건립과 법화경(法華經) 사경, 같은 해 9월에는 관음상과 관음경(觀音經)의 사경 등을 전국의 사찰에 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이 741년에 이르러 ‘국분사건조’라는 형태로 완성되고 있는 것이다.

‘국분사건립조’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금광명최승왕경과 같은 호국경전의 사경을 전국규모로 행하여 불탑에 봉안하도로 하는 부분이다. 특히 천황이 직접 금자로 금광명최승왕경의 사경을 발원하고 있는데, 이는 금광명최승왕경의 ‘사천왕품(四天王品)’에서 사천왕 등의 여러 호법신들이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강설하는 국왕과 백성들을 국난이나 기아, 질병 등에서 수호하여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설하고 있는 것을 신봉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전신앙을 통한 호국불교의 형태는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금광명최승왕경은 물론 인왕경(仁王經), 법화경 등도 호국경전으로서 자주 사경되었다. 그리고 국분승사(國分僧寺)의 정식명칭을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金光明四天王護國之寺)’라고 하는 것이나, 전국의 모든 국분사에서 매월 8일에 반드시 금광명최승왕경을 독송할 것을 명하고 있는 부분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국분사건립조’에서는 국분사의 경제적 운영 계획과 더불어 상주 승려의 숫자, 그리고 구체적인 법회일정까지를 명시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즉, 국분승사에는 봉호(封戶) 50호와 수전(水田) 10정, 국분니사에는 수전 10정이 지급되어 그곳에서의 수입이 각각의 국분사의 운영경비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국분사에는 비구승 20인, 국분니사에는 비구니승 10인이 항상 상주하여야 하며, 매월 8일과 15일에 독경법회가 의무시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국분사와 국분니사의 운영 및 관리는 각국(各國)의 수령인 국사(國司)에게 그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현재 발굴조사 등을 통해 일본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국분사는 국분승사가 총 68개소, 국분니사가 50곳에 이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분사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쇠퇴하여 절터만이 현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일본 각지의 지명중에 ‘고쿠분(國分)’ 혹은 ‘고쿠분지(国分寺)’ 등으로 불리는 곳은 대부분 나라시대 국분사가 있던 곳이며, 국분사가 국사(國司)의 관리하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지역의 관청과 가까운 곳에 건립되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도심에 절터가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 <비추고쿠분지(備中国分寺) 오카야마켄 소자시(岡山県総社市)> 사진출처 : http://ja.wikipedia.org/)

국분사의 규모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지만, 국분니사보다는 국분사가 큰 규모이고, 국분사의 경우 다다 수가 1탑 1금당의 가람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국분사건립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실재로 많은 국분사들에서는 7층 목탑에 걸맞은 큰 규모의 목탑지가 발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 규모나 사격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곳은 역시 국분사의 총본산이었던 나라의 토다이지(東大寺)이다.

2. 국분사 총본산 토다이지(東大寺)

나라시대(奈良時代) 국가불교 체제하에서 가장 번영하였던 사찰은 토다이지(東大寺)였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 사찰이 당시 수도 야마토노구니(大和国)의 국분사임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던 국분사의 총본산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모든 국가적 역량이 이 사찰의 조영에 투입되었고, 그 결과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찾아볼 없었던 쌍탑가람(雙塔伽藍, 동서 양탑은 현존하지 않지만 높이가 약 70m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의 대 사원이 완성되었고, 그 중심에는 상고 15m, 무게 약 50여 톤에 달하는 거대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조영되었다.

오늘날에도 나라일원 세계문화유산의 중심사찰로서 매년 수천만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 명소중의 명소이다.

▲ <토다이지 대불전(東大寺大仏殿)> (사진 출처 : http://upload.wikimedia.org/)

토다이지는 원래 지금의 대불전 동쪽에 있는 와카쿠사야마(若草山)에 있었던 금종사(金鐘寺)라는 사찰이었다. 신라승 심상(審祥, 신라에 유학한 일본승이라는 설도 있음)이 이곳에 머물며 제자들에게 화엄교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후에 토다이지 초대 별당(別当, 주지)이 되는 로변(良弁, 689-774, 백제계 도래인)도 심상의 제자이며, 노사나불(대불)의 조영과 국가불교의 교학적 기초가 화엄교학에 있다는 것도 밀접히 관련된다.

741년 쇼무천황의 ‘국분사건립조’가 내려지고, 이듬해 금종사가 야마토노구니(大和国)의 국분사로 지정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745년 쇼무천황은 총국분사 동대사에 거대 비로자나불을 조성할 것을 발원한다. 그리고 대불조영은 막대한 자금과 연인원 260만명이 동원되어야 하는 어려운 사업이었지만, 당시 민중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행기(行基, 668-749)의 주도로 성료되어, 752년 5월 26일 개안법회가 열린다. 이날의 개안법회는 천황을 비롯한 각국의 사절과, 인도출신의 승려 보리선나(菩提僊那)를 비롯한 1만 수천인의 승려가 참가하였고, 당시 참가한 승려들의 명부가 오늘날에도 정창원문서에 남아있다.

대불의 건조와 더불어 대불전의 동서 양쪽에 7층 목탑도 조성되었다.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따르면 753년 완성되었다고 하나, 764년에 탑의 상륜부인 노반(露盤)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 무렵 완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완성당시 동서 양탑의 높이는 약 70m에 달하는 거대 목탑이었다. 그러나 1180년 병화로 소실되어 그 후 몇 차래의 재건이 있었지만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 2010년 4월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현재는 재건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 <토다이지 대불 오미누구이(東大寺大仏お身拭い)> 오미누구이(お身拭い)는 매년 8월 7일 행해지는 동대사의 연중행사로서 대불에 쌓인 먼지를 청소하는 행사다. (사진출처 : http://pinbokejun.blog93.fc2.com/)

수도 나라에 15m의 금동 대불과 7층 쌍탑을 가진 거대 가람 토다이지를 총국분사로, 그리고 전국 각지에도 국분사로서 승사와 니사가 건립되면서 646년 대화개신(大化の改新)이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국가불교로의 이행은 그 정점에 이른다. 그 사이 불교는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일본 전역으로 확산·소개 되는 눈부신 양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승려들은 관승으로서 국가의 안녕을 위한 기도가 의무시되기는 하였으나, 안정적 신분이 확보되면서 수도의 거대사원을 중심으로 학문승들이 늘어났고 법상, 구사, 화엄, 성실, 율 등의 종학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한편, 나라시대의 이러한 국가불교의 흐름과는 별도로 국가불교에서 소외되었던 민중의 구제와 교화를 통해, 보살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대중적 존경을 받았던 행기(行基) 존재 역시 주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좌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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