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황홀하게 동공을 스친다. 아아, 눈물이야. 옷깃에 형체 없이 스며드는 햇볕이 체온에 온기를 더하고 있다.
분주히 도서관을 향하고 있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사뿐하게 느껴진다. 또 있지. 강의실을 향하여 무엇에 쫓기는 듯 달려가고 있는 학생도 눈에 띈다. 지각할까 염려가 앞서서일 수도 있다. 낯익은 학생이 지나가기에 손짓을 했다. 수강했던 적이 있는 학생이다. 최고 학년이 되었다는 중압감을 버티기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취직도 해야 하겠고 …. 그래, 같은 또래 젊은이가 겪는 고뇌가 아니겠느냐. 거기서 벗어나려거든 자신을 연소시켜라. 완전 연소시켜라. 타다 남은 나무깽이를 보아라. 완전 연소한 재 옆에 있으면 더욱 몰골이 사납다. 간밤에 흥겹게 놀았던 캠프파이어 자리를 아침에 보면 면면이 잘 드러나고 있지. 연소와 불연소의 콘트라스트가. 뭔가를 이룬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이에 비견되는 일이다. 남은 학창시절 완전 질주를 하여 회한이 없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을 건넸다.
발밑에는 잔디가 지척이다. 아직 봄 기지개도 켜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보드랍고 화창한 명지바람에도 말이다. 어느 화공이 실수로 캔버스에 파란물감을 떨구어 놓은 듯 파란색이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응시하였다. 그 정체를 알고자 함이다. 쑥이었다. 일찌감치 봄 채비를 하고 나들이를 나온 봄쑥이로구나. 젊은이의 뜨거운 열정보다 더한 정열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 동토를 떨치고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
아마 머지않아 누군가의 손길이 다가 올 것이다. 있지 않아야 할 것이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고 궁시렁거리면서 야멸차게 손이 미칠 것이다. 잡초라는 주홍글씨를 붙여 떨구어내고 말 것이 분명하다. 참, 억울할 일이다. 잔디의 삶과 쑥의 일생이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획일화된 기준에 따라 분류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쑥은 자신의 운명보다 오늘에 충실하고 싶다고 함성으로 함성으로 외치고 있다. 저 파란물감에 긴 생명의 환희가 넘쳐났으면 좋으련만.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목련을 보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보는 백목련꽃이다. 꼬투리가 마치 용수철이 튕겨나가 듯 달아나고 그 자리에 꽃이 피었다. 마치 박속같이 희고 이남박 속과 같이 겹겹이 쌓여 만개하였다. 이런 봄날이 되면 소풍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보물찾기를 마치고 나면 오락시간이다. 주변 성화에 못이겨 노래를 불렀다. 동심초였다. 결과는 큰 성과였다. 한 아름의 노트를 상품으로 받았으니 말이다. 그러한 일들이 엊그제의 일인 듯도 하다. 어찌 생각하면 먼 전생사 같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심초(同心草)란 노래는 사연이 있다. 그 구구절절한 이면사를 알고 부르는 사람은 흔치 않을 듯 하다. 다수가 시인 김억의 시로만 알고 있다. 실은 당나라 시인 설도(768~832)의 춘망사(春望詞), 즉 ‘봄을 기다리는 노래’라는 시다. 설도는 기녀신분이었으나 영리하였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말년에 기적에서 나와 여도사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의 시와 김억의 번역을 함께 옮겨놓는다.
풍화일장로 風花日將老
가기유묘묘 佳期猶渺渺
불결동심인 不結同心人
공결동심초 空結同心草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우리는 저 찬란한 꽃이 지고나면 어찌될까 걱정할 일이 없다. 잎이 솟아나고 그 잎은 큰 잎이 되어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걱정을 놓지 않는다. 오늘일도 다하지 못했는데 내일 일을 걱정한다. 걱정한다 한들 묘한 해결책도 없으련만 말이다. 이러한 일은 하나의 습관에서 비롯된 일이다. 소용없는 습관은 쉬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인생에는 예상치도 않았던 명지바람이 불어 올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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