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불교의 형성과 ‘승니령’(僧尼令)
국가불교의 형성과 ‘승니령’(僧尼令)
  • 김춘호
  • 승인 2013.03.18 10: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6. 제5강
지난 강좌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전래 초기 일본불교는 이른바 ‘씨족불교’의 성격을 가진다. 유력 씨족들 스스로가 사원(씨사)을 건립하고 자신들의 조상신을 모시며, 씨족 일원의 안녕을 기원하는 형태의 불교가 바로 ‘씨족불교’라고 하겠는데, 이 경우 불교흥륭에 대한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각각의 씨족들에게 있었다. 특히, 소가씨를 비롯한 도래계 씨족들이 그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유력 씨족들 주도로 전개되던 일본불교의 흐름은 일본이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확립해 감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즉, ‘씨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이번 강좌에서는 고대 일본의 국가불교의 성립과정과, 국가에 의한 승려관리 지침인 <승니령>(僧尼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소가가문의 멸망과 대화개신(大化改新)-씨족불교에서 국가불교로-

수용단계에서부터 일본의 불교는 숭불파 씨족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 필두는 역시 소가씨 일족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소가씨 일족의 흥망은 곧 씨족불교의 흥망이기도 하였다.

모노노베씨(物部氏)와 같은 견제세력이 사라지면서 소가씨는 가장 강력한 씨족으로서 일본조정의 실권을 대부분 장악한다. 소가씨의 딸들을 천황에게 시집보내어 아들이 태어나면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는 방법을 통해 대대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며, 조정의 주요 요직은 물론 기우제와 같은 국가적 제사를 독단적으로 행하기도 하였다.(642년 7월) 또 자신들의 능묘를 축조하는데 사적으로 백성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차기 천황의 옹립에는 필사적이어서 반대세력을 무참히 숙청하였고, 급기야는 배불파와의 전쟁에서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쇼토쿠(聖德)태자의 자손들(上宮王家)마저도 황위계승에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멸망시킨다.(643년 11월)

이와 같은 소가씨의 전횡에 자연히 불만을 가지는 호족들이 늘어났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후에 藤原鎌足)는 나카노 오오에노 오지(中大兄皇子, 후에 텐치(天智)천황)를 설득하여, 소가가문의 수장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의 암살을 계획하게 된다. 645년 6월 12일이 거사일로 정해졌다. 그날은 한반도 삼국(신라, 백제, 고구려)의 사신들이 일본 조정을 방문하여 천황을 만나는 중요한 날이었던 만큼, 최고의 실권자였던 소가노 이루카 역시 반드시 참석할 것이었고, 천황 앞에서는 호위 무사의 대동이나, 일체의 무장이 허락되지 않는 다는 점도 활용되었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나카노 오오에노 오지와 함께 무장한 체 미리 숨어 있다가 코교쿠(皇極)천황의 면전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 <을사정변(乙巳の変)>(그림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

소가노 이루카의 죽음과 나카노 오오에노 오지의 설득으로 그동안 소가씨를 따르던 호족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소가씨의 반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645년 6월 13일 지병을 앓던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 이루카의 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함으로서 소가씨 본가가 멸망한다.(乙巳の変)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로 이어지며 100여 년 간 번성하였던 소가가문의 멸망을 계기로 일본은 그동안 주요 씨족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국가체제에서 탈피하여 천황 중심의 율령국가로의 혁신을 단행한다. 646년 1월 단행된 이른바 대화개신(大化改新)이 그것인데, 그 요점은 크게 4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호족들의 사유지와 백성들을 모두 천황에게로 귀속시키는 이른바 공지공민(公地公民)
둘째, 천황의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을 위해 지방통치체제 정비(國郡制度)
셋째, 호적과 토지를 정리하여 모든 공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빌려주고 그 수입의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반전수수(班田収授)법 시행
넷째, 공민들에게 세금과 부역 등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러한 정치체제 및 사회제도의 변화는 불교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즉 불교흥륭의 주도권이 소가씨에서 천황=국가로 넘어가자, 국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불교의 수용과 전파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651년과 12월 그믐에 궁중에 2천 백여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일체경》을 읽게 하고 그날 밤 궁중 곳곳에 2천 7백 개의 등을 밝히고 《안택경(安宅經)》, 《토측경(土側經)》을 읽게 한다. 또한 이듬해인 652년 12월 그믐에도 전국의 승려를 궁중에 초청하여 공양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법회를 천황이 주도한다. 660년 5월에도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가 궁중에서 열리게 된다. 천왕의 명으로 100개의 고좌(高座)와 100개의 납가사(納袈裟)가 준비되고, 100명의 승려를 초청하여 《인왕반야바라밀경(仁王般若波羅蜜經)》을 읽게 하고 공양하는 것이다. 이는 이 경전에서 설하는 바와 같이 내란이나 외구의 침입 등의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인왕경》을 설하면 나라의 귀신들이 이 경전의 설법을 듣기를 원하여 그 나라를 위기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독송의 공덕을 통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불교신앙의 목적과 주체가 개인적 차원의 ‘씨족불교’의 성격을 탈피하여 ‘국가불교’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2. <승니령>(僧尼令)

국가불교로의 흐름은 천황중심의 율령국가의 틀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더욱더 분명히 드러나는데, 685년에도 천황은 각 지방의 관청마다 사원을 건립하고 불상과 경전을 안치하게 하였고, 702년 당나라의 율령체제를 본떠 만든 대보령(大寶令)이 반포되었는데 그 안에 승려들의 활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규제하는 <<승니령>(僧尼令)> 27개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아래의 표와 같다.

▲ 고대 일본의 <승니령>.

27개조의 <승니령>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이나 자격취득, 보시물의 관리, 남녀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는데, 그 중에서 우선 주목되는 부분은 승려들의 포교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1조, 제2조, 제5조, 제23조 등이 이와 관련된 부분인데, 승녀들의 사적 포교활동 자체가 혹세무민 행위로 규정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천문과 점복의 결과는 곧 위정자의 치세가 어떠한가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혹시 있을 수 있는 승려들에 의한 정부비판 등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불교라는 시스템아래의 승려들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천황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기본적인 소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점은 국가의 허락 없이 사적으로 득도하는 것(私度)이나 타인의 명의 등을 이용한 불법적인 승려자격 취득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제22조와 제16조가 이에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항목이고, 제20조의 경우 승려의 죽음을 보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물려받아 승려가 되는 경우를 대비하는 목적을 가진 항목임으로 역시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은 승려의 출가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것은 효율적인 불교의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승려들에게 주어졌던 면책, 과세, 과역 등의 혜택을 노리고 승려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막고자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승려들의 남녀관계나, 보시물 혹은 재산관련, 불음주 등의 승려들의 행실과 관련된 항목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어찌 보면 출가 승려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이러한 내용들이 <승니령>이라는 법령으로서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어기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당시 일반인들이 가졌던 승려관(僧侶觀)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을사정변(乙巳の変)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율령국가로의 개혁은 호족 중심의 일본고대 사회를 뿌리째 바꾸어,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불교역시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데, 그 핵심의 하나가 <승니령>이었다. <승니령> 아래에서의 승려는 오로지 국가의 율령에 의해 규정되고 관리되는 승려(官僧)로서 국가와 천황가의 안녕만을 기도하는 것이 의무였다. 속세의 세속적 가치들을 버리고 구도의 이상적인 환경으로 들어가는 출가의 본래의미는 사라지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율령국가의 승려’만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승니령>하에서 승려들의 대외활동은 크게 위축되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의 지원에 따른 신분 및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전연구에 힘쓰는 승려들이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수도 나라의 대찰들을 중심으로 학문불교의 발전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