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사한 얼굴
해사한 얼굴
  • 현각 스님 동국대 불교학술원장ㆍ역경원장
  • 승인 2013.03.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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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 7

대충 여장을 꾸렸다. 마구 달려오고 있는 봄, 봄, 봄, 봄맞이를 하고 싶어서이다. 여행의 맛이란 열차가 딱이라 생각했던 터라 열차에 몸을 맡겼다. 선반에 작은 짐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지인과 한담을 나누다 그만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옆자리에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포옥 안겨 있었다. 낯선 얼굴을 가리지 않고 그저 해사하기만 하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쥐엄쥐엄을 하며 한참을 갔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아지랑이가 군무를 추고 있다. 마치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연이어 놓인 듯하다. 이들은 봄의 합창단인가, 봄의 전령인가. 아니면 어느 영혼의 해탈한 모습인가. 역시 자연은 무궁한 사색의 보고임에 분명하다. 인간의 무디어진 감정도 순화시켜 주고 상실된 영혼도 불러주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만해스님의 <이른 봄>이라는 시가 뇌리를 스친다.

이른 봄 작은 언덕 쌓인 눈을 저어마소
제아무리 차다기로 돋은 움을 어이하리
봄옷을 새로 지어 가신 님께 보내고저

어느덧 열차는 목적지에 당도 하였다. 금세 타지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었다.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오불고불한 시골길의 정취는 추억 너머에 있나보다. 그 옛길에서 담 너머 얼굴을 드러낸 매화가지의 정취를 보고 싶다.

나지막한 산길을 걸었다. 턱 하니 발길을 멈추게 하는 가지가 있었다. 매화나무였다. 민낯으로 드러낸 꽃송이가 발길을 잡았던 것이다. 터질 듯한 봉우리가 연이어 삐주룩하게 건반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아마 저 나무 온 가지에 꽃이 만개했다면 이런 숨죽이는 감격은 덜 했을 것 같다. 작은 것은 소중하고 연약한 것들은 매력 덩이다. 어찌 보면 보호해주려는 본능을 지닌 인간의 마음은 치장하지 않은 꽃잎마냥 순수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매화를 구선이라고도 한다. 여윌 구(癯)자에 신선 선(仙)자를 썼다. 그러기에 선비의 꽃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선비의 전형은 어떠할까. 외형상으로 보면 깡마른 몸짓이고 눈엔 섬광이 빛나고 있다. 그 섬광으로 인간의 빗나간 언행, 도를 넘는 물욕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그가 받는 반상에 첩이란 말을 붙인다면 호사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쥐코밥상이 제격이다. 먹는 타령에 빠지지 않는 것은 자족(自足)할 줄 알기 때문이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인생의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고 자족의 극치를 만끽 할 줄 아는 것이다.

연신 새 떼가 내려앉는 공원으로 발길이 끌렸다. 유모차에 실려 봄 햇살을 받으러 나온 아기가 엄마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 한켠에는 아장걸음을 하며 손에 뭔가를 들고 모이 주듯이 뿌리기도 하고 던지기도 하고 있는 아기의 동작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 먹이를 주는 것이다. 새들은 겨우내 굶주린 허기를 채우려고 필사적으로 먹이를 쫓고 있다. 생명의 위험을 담보할 겨를도 없이. 간간이 엄마가 건네주는 먹이를 조막손에 듬뿍 쥐고 건네기를 거듭한다. 손에 묻어있는 먹이를 양손으로 털기도 하고 앞자락에 대고 털어내기도 한다. 이내 엄마 품으로 달려가는 아기의 해사한 얼굴은 매화의 그 모습과 닮았다.

저 고요한 산야에도 정글의 법칙이 더해갈 것이다. 인간이 휴식하고자 마련한 공원의 한 구석에서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엄존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배워 실천하고 있는 인간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평온이 있고 질서가 있을 것이다. 무심코 아기의 모습을 지켜보며 희망을 느꼈다. 저 아기들이 성인이 되면 자연 사랑의 마음이 더해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얼마 쯤 걷다보니 또 매화나무다. 이른 봄맞이를 나온 꽃송이가 유난히 해맑다. 긴 봄날에 얼굴이 탈까 걱정이다. 민낯으로 종일 햇살을 받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꽃은 속삭인다. ‘괜찮아요’라고. 우리 조상의 조상들도 분바르지 않고 연지곤지 없이도 선비의 사랑을 받았다오. 짙은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그 향기는 뭇 사람의 정신을 순화시키기도 한다오. 춥다고 향기를 팔지 않는 지고지순한 매화여!

움트는 가지에 연신 눈길을 마주하며 걸었다. 걷고 걷다 보니 봄은 이미 발밑에도 와 있다. 쏘옥 내민 쑥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도 향기가 솟는다. 그리고 솜털이 보얀 잎에서 생명의 경외심을 느낀다.

누가 보아주고 아니고는 전적으로 상대의 일이다. 그저 본분사를 잃지 않고 정진하는 새봄의 생명들은 감탄스럽다. 저 쑥은 태고의 건국설화를 간직하고 이렇게 자라고 있다. 인내와 기다림의 상징으로 드러나는 쑥이여.

오늘 여행은 썩 마음이 홀가분하다. 열차에서 만난 아기, 공원에서 만난 아기, 산과 공원에서 마주한 매화의 해사한 얼굴 때문이리라.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혜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최현각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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