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사상이 걸리버 묶는 끈이라고?”
“연기사상이 걸리버 묶는 끈이라고?”
  • 유응오
  • 승인 2013.03.11 11: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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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유응오의 ‘culture club’-4 슬라보예 지젝의 불교관 ‘유감’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대한 한 소견
불교사상에 대한 몰이해 ‘심각’
‘이교’ 운운은 오리엔탈리즘 전형

슬라보예 지젝이 우리나라 문화평론에서 갖는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에서 ‘응모작들 상당수가 지젝의 이론에 기대어 있다.’라고 지적될 정도이다. 많은 이가 지젝의 글에 매혹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최근 수십 년 사이 유럽에서 등장한 인물들 중 실로 문화 이론 전반을 아우르며 정신분석적 해석을 가하는 가장 뛰어난 해설가’라고 지젝을 평가했다.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의견을 말하자면, 지젝의 글은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본다. 하나는 난해한 라캉의 이론을 영화평론에 접목시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것이다.

그런데 지젝의 저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보면, 그의 불교관이 심각할 정도로 왜곡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젝은 <신화와 그것의 변천>이라는 글에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상대 비교했다.

“언뜻 보기에 불교와 기독교는 유사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와 불교 모두, 우주나 사회의 위계적 구조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절대적인 것(공空, 성령)과 접촉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여전히 존재의 대연쇄라는 이교적 사고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 중 가장 영웅적인 인물조차도, 소인국 사람들이 매어 놓은 수백 개의 작은 끈들로 인해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걸리버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과거의 행위들이 가져온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뒤따르며, 조만간에 우리의 발목을 붙들게 된다. 우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극적 시선 속에 내재된 중핵은 이것(업의 논리)이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우리가 저지른 죄의 궁극적인 증거이며 죄책감을 느껴야만 할 어떤 것이고 우주의 조화로운 균형을 방해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먼지가 다시 먼지로 돌아갈 때’ 우리는 자신의 궁극적인 소멸 속에서 그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사실은 이러한 이교적 사고방식 속에 어떤 단락이 들어 있다는 것, ‘존재론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의 중첩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는 인과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이티아(aitia)에 가장 잘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떤 것의 원인이 되다’라는 뜻의 아이티아는 동시에 ‘그것에 대해 죄를 짓다/ 책임을 지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교적 지평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복음(Gospel)은 과거의 부채를 지불 정지시키는 것, 우리를 과거의 행위들에 묶어놓는 끈들을 잘라내는 것, 과거를 청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전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마술도 없다. 이러한 해방은 단지 존재론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상의 분리를 뜻할 뿐이다. 윤리적 수준에서는 존재의 대연쇄를 끊을 수 없다. 죄는 용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으로 소급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말소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 세계 속에서 모든 차이들은 궁극적으로 무가치하며 모든 규정적 존재들은 그것이 처음 비롯되었던 원초적 심연 속으로 소멸해간다는 세계관에 의탁하여 사회적 위계질서(모든 사람/ 사물은 그것이 있어 마땅한 그 자리에 있다)를 정당화한다는 데 이교주의의 변증법적 역설이 있다. 이와 대칭을 이루는 반대편의 자리에서, 기독교는 가장 급진적인 차이/단절을 주장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보편성에로의 직접적인 접근과 평등을 단언한다. 이것이 불교로부터 기독교를 분리해내는 간극이다. 불교도 우리가 과거의 행위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해방은 오직 현실(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근본적으로 폐기함으로써, 생명을 규정하는 충동/ 번식(‘욕망’)의 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욕망의 불꽃을 끄고 열반이라는 원초적인 공허 속으로, 무형의 하나-전부(One-All) 속으로 침잠함으로써만 가능할 뿐이다. 삶 속에서는 어떠한 해방도 있을 수 없는데, 이 삶 속에서(그리고 이와 다른 삶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삶을 규정하는 열망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무엇이든(왕이든 거지든 혹은 파리든 사자든) 간에 그것은 전생에서 행한 업의 의해 결정된 것이고, 죽은 다음에는 현재의 삶이 다음번 윤회의 성격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불교와 정반대로 기독교는 근본적인 단절의 가능성, 존재의 대연쇄의 파열 가능성 쪽으로 내기를 거는데, 그것도 바로 지금의 삶 속에서, 우리가 완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 위에 세워지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육체이다.”

지젝의 주장에 따르면, 불교는 존재의 대연쇄(‘어떤 것의 원인이 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이티아를 예로 든 것을 보면, 아마도 연기(緣起)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유추된다) 때문에 삶 속에서는 어떠한 해방도 있을 수 없는 반면, 기독교는 복음(‘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육체’ 운운하는 것을 봤을 때 대속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유추된다)으로 말미암아 과거를 청산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젝의 주장은 ‘종교는 마약이다.’라는 레닌의 명제에서 주어를 불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다. 불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서 기독교만 구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의 핵심사상으로 대속 사상을, 불교의 핵심사상으로 연기 사상을 꼽고 있다. 지젝이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불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대속 사상과 연기 사상은 존재론적인 해답을 관계론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원죄의 시대가 열렸고, 예수로 말미암아 속죄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말했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다. 그런 까닭에 대속 사상의 핵심은 아가페 즉,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연기 사상이 궁극적으로 지향 하는 것은 자비(慈悲)이다. 간단히 도식화하면, 대속 사상은 사랑에, 연기 사상은 자비에 귀결된다. 대체 불교의 연기 사상은 부정적으로 보고, 기독교의 대속 사상은 긍정적으로 볼 근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지젝이 불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존재의 대연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의 주장대로 라면 기독교는 단절성에, 불교는 연속성에 해당한다. 하지만 지젝이 주장한 ‘단절성’이라는 것이 불교 사상에 없는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단절성과 연속성은 인식론(認識論)에 해당한다. 선(禪) 불교의 돈점(頓漸), 즉,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논란이 바로 대표적인 인식론 논쟁이다. 게다가 선불교에서는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례로 초조 달마와 2조 혜가가 주고받은 안심(安心) 문답을 들어보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마음을 가져와 보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네 마음은 편안해졌다.”

초조 달마에서 6조 혜능으로 이어져 오는 전법기(傳法記)에는 안심(安心) 문답과 유사한 대화가 등장한다. 심지어 2조 혜가와 나병에 걸린 3조 승찬이 주고받은 대화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속죄와 매우 유사하기까지 하다.

“저의 죄를 참제(懺除)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네 죄를 가져오너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네 죄는 다 없어졌다.”

이런 사실들에 비춰봤을 때 지젝의 주장은 불교에 대한 몰이해라고 볼 수 있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주제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아니라 개신교의 적자인 칼뱅이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뤄졌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칼뱅이즘은 절대적 주권을 지닌 신관(神觀)과 예정설(豫定說)을 골자로 하고 있다. 칼뱅이즘의 문제는 신에 의해 구원을 받는 자가 결정된다고 바라보면서도, 부의 축적을 옹호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성립 당시 시민계급(자본가)이 칼뱅교를 지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칼뱅이즘에 입각해서 보면, ‘부자는 은총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지젝이 불교를 ‘이교’라고 명명하는 대목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역설한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되고 전도된 관점’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유기고가이자 작가. 충남 부여 출생.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주간불교>와 <불교투데이> 편집장을 지냈다. 200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했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서 당선해 등단했다. 주요 저서로는 『10.27법난의 진실(화남출판사)』, 『이번 생은 망했다(샘터)』, 『벽안출가(샘터)』, 『불교, 영화와 만나다(조계종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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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리리리~ 2013-07-28 17:20:46
분명 불교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비판입니다. 연기적 업의 흐름도 기독교처럼 주어진 현생의 기회에서 극복할 수 있는건데 ㅎㅎ. 비교해 오히려 주체적 구도의 길이지요. 저런 자가 서구 문명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활동하는 문화 평론 사상가라니.. 아직 서구문화는 근대의 틀에서 완전히 탈피 못한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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