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의사 장기려
바보 의사 장기려
  • 변택주 연구소통 소장
  • 승인 2013.03.08 16:4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변택주의 <섬기는 리더가 여는 보살피아드>- 10. 장기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에 잠들다.”

의사생활 60년 집은커녕 전 재산 천만 원, 그마저 간병인에게 선물하고 떠난 ‘덜 가지고 더 많이 존재’한 의사 장기려 묘비명이다.

▲ 장기려 박사 친필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는 사람들 곁에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와 1940년 일본 나고야대학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장기려.  그는 “치료비가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 곁을 지키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원을 세우고 간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1943년 간 종양절제수술은 하지 못한다는 통념을 깨고 간암 말기 환자 수술에 성공한다.

그 뒤로 전국에서 밀려드는 환자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쉬는 날에는 자전거에 왕진가방과 약품을 싣고 시골 마을을 돌며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폈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들을 위해 봉급으로 피를 사서 수술대에 오르게 할 만큼 월급을 모두 가난한 환자 치료비로 썼기 때문에 부인이 삯바느질을 해 겨우 살림을 꾸려갔다.

1950년 12월 피난길, 길이 엇갈려 아내 김봉숙과 다섯 남매를 북녘땅에 남겨두고 둘째 아들 가용만을 데리고 남으로 내려온 장기려 박사는 여섯 달 동안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일했다.

그 후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1.4후퇴 소식을 듣고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인데 공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마음먹고 미국 친구들에게 모금한 5천 달러를 가지고 돌아온 전영창(거창고등학교 설립자)을 만난다.

장기려 박사는 전영창이 가지고 온 5천 달러를 부싯돌 삼아 미군부대에서 천막 3개를 얻어 부산 영도구 남항동 한 교회 창고에서 1951년 6월 무료로 행려병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촛불을 켜고 응급 수술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병원 운영이 어려워 병원비를 조금씩 받게 되면서 장기려 박사는 주머니를 털어 가난한 환자를 치료했다.

월급을 다 털어도 환자를 도와줄 수 없게 되자 입원비를 내지 못해 퇴원을 못하는 환자에게 “제가 뒷문을 열어놓을 테니 어서 가세요.”하기도 여러 차례. 직원 눈치를 보면서도 늘 환자 편에 섰다. 부황으로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써준 처방전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시오. 원장”

장기려 박사는 평생 병원 옥탑방에 살면서 가진 돈을 털어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1968년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세워 당시 100원하던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을 받고 병원 문턱을 낮춰 온 국민에게 의료보험혜택이 돌아갈 때까지 30만 명 남짓한 영세민들을 보듬었다. 구걸 온 거지와 겸상을 하고, 겨울이면 거지에게 번번이 외투를 벗어주고 퍼렇게 얼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장기려 박사를 사람들은 슈바이처, 작은 예수, 또는 바보 의사라고 불렀다.

1959년 최초로 여성 간암 환자 간을 70퍼센트를 잘라내는 간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해 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장기려 박사를 기려 정부는 이날을 ‘간의 날’로 제정했다. 1979년에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게 한 공로로 아시아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 장기려 박사의 생전 진료 모습
가슴에 품은 아내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오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왔네.” 남모르게 돌봐준 환자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 1995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난 마지막 날까지 북녘에 두고 온 식구들을 만나지 못했던 장기려 박사 머리맡에는 사진 두 장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갓 결혼했을 때 젊은 아내 모습을 담은 사진이고, 또 하나는 뒷날 어렵사리 구한 여든 살 늙어버린 아내 사진이었다.

그러나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 정부가 북에 있는 식구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방북신청을 하라고 했을 때 “남쪽이든 북쪽이든 내 목숨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다면 모를까 사양하겠다.”고 했다.

뒷날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돌아보고 고향집과 평양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든 사람들 아픔이 나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을 재회하는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라고 했다.

아내는 편지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저는 마음속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주셨고 저는 그대로 했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삶은 성공한 삶입니다. 그리고 인생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습니다.”고 외쳤던 바보 의사 장기려.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경영코치, ‘연구소통’ 소장으로 소통을 연구하며, 지금즉市 트區 들으面 열리里 웃길 79에 산다. 펴낸 책으로는 <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3-04-06 23:21:21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이시대의 최고의 바보의사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저도 저런분을 미치도록 존경합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