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지요
알겠지요
  • 현각 스님/동국대 명예교수
  • 승인 2013.02.28 16: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현각 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6
이제 3월이다. 새 학기가 시작 된다는 사실에 설레발을 떨기 일 수다. 학생들에게 3월(March)은 많은 것이 변한다. 새 학교, 새 선생님, 새 친구, 새 책 등등. 새것이 참 많기도 하다. March는 ‘차분하고 리드미컬하게 앞으로 진군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달이야말로 젊은이의 달이라고 뚝 떼어주고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땅의 미래를 책임 질 2세들이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훈화는 삶의 버팀목이 될 만한 가르침이고, 담임선생님의 지도도 세심함이 더 해질 것이다. 수업시간 또한 진지함이 넘치겠지.

아스라이 떠오르는 옛 추억, 중학교 도덕시간이 생각난다. 당시 도덕과목은 전공한 선생님이 없었던 것 같다. 담당 선생님이 사정이 있었던지 결강을 메꾸려고 교장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오늘 진도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교단에서 오늘 진도가 어디냐고 묻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렇게 따분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진도를 모르면서 어찌 교단에 오르는지 모르겠다. 벅찬 마음으로 학생을 대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신하들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에서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명을 골라 사육신이라고 칭했다. 책을 편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여러분! 사육신 알겠지요?’라고 물으셨다. 학생들은 이해 여부를 떠나 ‘예’ 하고 큰 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때 나 혼자만이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버럭 화를 내며 ‘누가 사육신을 모르냐’는 반문이 따랐다. 손을 들어 본인임을 확인시켰다. ‘사육신을 모르면서 어찌 중학생이 되었느냐?’고 질책이 따랐다. 수업 마치고 교장실로 오라고 하였다.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사육신을 모르는 학생이 있으니 가르쳐주면 되는 일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웬 교장실일까 무언의 불만이 치솟았다.

수업을 마치며 교장 선생님은 본인이 사육신을 외우지 못한다고 실토하였다. 그리고 나를 일어나라고 하였다. 사육신을 알만한 학생이 교장선생님을 놀렸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그때 그 수업을 생각해보면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나만이 무인고도에 있는 느낌이었다. 분명 많은 학생들이 사육신을 외우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구동성으로 대답이 나왔을까.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배려한 의례성 응답이었다고 본다. 선생님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우회적인 표현을 쓰는 데 익숙한 급우들의 모습을 별로 탓하고 싶지는 않다. 염화미소와 이심전심이란 이런 경우에도 통용될 듯하니까.

집단이 거대하고 힘 있어 보여도 개인의 나약한 듯한 생각이 군중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에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생각과 행동은 먼 훗날 세상을 밝히는 작은 빛으로 남았다는 사실에 가슴 벅찬 감회가 있다. 집단에 나의 소중한 생각이 매몰되어버린다는 것과 같이 허전한 일이 없을 것만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교단에 서게 되는 새 선생님들이 있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워 숨가빠하는 세태에 갈채를 보낼 일이다. 갈채 받은 만큼 가르치는 일에서도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선생들이란 모른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어린 학생이라 하더라도 인지능력이 뛰어나다.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 학생은 그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로 기시감(旣視感)이 있다는 말이다. 임기응변으로 그 시간은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양심을 속였다는 사실에 가슴아파할 날이 있을 수 있다. 바로 잡고 싶으나 그 때 그 학생은 그 자리에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 빈약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고 영달에 몰입하는 우도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어떤 방면에서 으뜸인 도꼭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3월의 교정과 교실에서는 내가 겪었던 도덕시간의 상황이 재현 될 경우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인내와 포용력을 발휘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지적 탐구가 왕성한 학생의 마음을 사막화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운율에 맞추어 구구단을 외울 때의 단조롭고 따분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선생님이 ‘알겠지요’라고 했다면 ‘아니요’라고 난 대답했을 것이다. 주변과 동화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의례성 응답은 자기발전을 저해하는 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탐구해 가고 답을 도출해 내는 세존의 교육방법은 모두가 본받아야하는 티칭 법이 아닐까.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장ㆍ동국역경원장. 혜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