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자무늬
격자무늬
  • 현각 스님
  • 승인 2013.01.0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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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현각스님의 <클릭! 마음의 두드림>

한 해가 간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아쉽고 그리운 것이 어찌 한 해를 보내는 일 뿐일까. 인간의 주거 공간을 따뜻하게 하고 완전 연소가 되어 연통에서 연신 어린아이의 가동질이라도 익힌 듯 허공에 흩날리는 회백색의 연기(煙氣)를 본다. 거기에서 미련이나 주저함이란 찾을 길 없다. 오직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가벼이 갈 뿐이다. 저러한 영혼은 하늘을 날기에 걸림이 없을 것이다. 문득 인간도 걸림 없이 사는 모습이란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상념에 젖었다. 연기의 실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리게 아쉽다.

연기의 격식 없는 모습과는 대조되는 무늬가 있다. 전통 한옥의 방문에서 볼 수 있는 격자무늬가 그것이다. 격자무늬는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줄이 진 무늬다. 지도의 모눈에서도 볼 수 있다. 격자는 도식화된 듯 하여 지리함을 떨치기 어려운 듯 하지만, 보고 보면 거기서 질서 정연한 법칙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편안해 지기도 한다. 그리드(grid)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리드란 지구의 위도와 경도가 만들어 내는 그물코 모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 곳곳에 펼쳐진 그물망 같은 연결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부처님이 세상 곳곳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을 인드라망(Indrajala)이라고 한다. jala는 ‘그물’을 뜻하는 말이다. 또 나가르쥬나가 쓰는 ‘무기’이기도 하다. 이 그물에는 보배 구슬이 박혀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이 무수히 겹쳐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쉼 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부처님이 온 세상 어느 곳 하나 빠진 곳 없이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이라고 화엄세계에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컴퓨터의 등장과 더불어 www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World Wide Web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말이다. 1990년대 초반 유럽의 원자력연구소에서는 세계 각지에 있는 과학자들과 상호 연구 결과물을 손쉽게 공유하기 위하여 고안해냈던 것이다. 서양의 과학자의 머리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양의 인문학자가 이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어 흥미진진해진다. 천망회회소이불루(天網恢恢疎而不漏)라고 노자는 강조하였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성글지만 새지 않는다’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넌센스 같은 말이다. 이재에 밝은 사람들의 셈법으로야 어딘가 허술한 데가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리나 하늘의 이치로 보면 삿된 인간의 일들이 부질없고 어린아이의 불장난 같은 것이다. 하늘의 이치는 국량이 한 없이 크고 세상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품과 아량을 지니고 있기에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우리가 보고 체험한 거미줄이야 좁고 크기 또한 미미하다. 그래야만이 거미는 먹이가 망에 쉽게 걸려들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거미줄을 통째로 벗어나 지나간다면 거미로서는 만사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거미의 그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넓은 컴퓨터의 그물은 미세한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전송하고 있다. 만약 여기에 오류가 생긴다면 과학의 발전은커녕 퇴보의 길을 자초할 뿐이다. 호리유차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이라고 했던가. ‘털끝만한 차이가 생겨도 결국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생긴다’고 승찬 선사는 강조한 바 있다. 그 격차란 도의 진수에 접근이 어렵다는 말을 한 것이다. 선사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말은 달리했을 것이다. 호리보다 미세한 단위가 나노이니까 나노유차천지현격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헤아려 본다. 나노는 10억 분의 1에 해당하는 단위로 머리카락 굵기의 약 10만 분의 1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그물도 얼마나 광대한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안하게도 된다. 도리에 맞는 일이면야 쉽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선듯 손이 가지 않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이 많기도 하다. 나는 그만해도 된다고 물러서는 경우는 여간해서 드물다. 뭐든지 채우고 지니기만 하려고 하다 여의치 못하면 좌절하고 마는 것이 세상살이인 듯 하다. 이만하면 만족하다고 물러나 앉는 경우는 보기 드문 것을 보면.

지난해를 보내며 아쉬워했듯이 그 아쉬움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한다. 아쉬움을 지닌 사람에게는 우주가 챙겨주어 뭔가를 가득 채워줄 터이니. 가득한 내용물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진리와 온유, 이해와 화목이 넘치는 삶으로 가득 찰 것이다.

새해에는 격자무늬를 새롭게 보아야 할 것 같다. 하늘의 크고 성근 그물도 격자라는 사실도 인식해야 할 일이다. 컴퓨터의 작은 부호가 독자와 필자의 가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밝히는 일월과 같은 이치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전북 정읍 출생. 혜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2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동국대 석ㆍ박사 과정 후 선학과 교수.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선학회 초대 학회장, 美 하버드대 세계종교연구센터 초청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선학의 이해』 『선어록산책』 『행복에 이르는 뗏목』 『날마다 좋은 날』 『선학전집』(全11권)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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