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착각이 바로 어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밝은 면을 밝히다 보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사회·정치적으로 상대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싸우는 풍토를 탈피해 밝은 면으로 모두를 치유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두운 것을 없애 밝음을 드러내려 하지만 어두운 것을 없애는 일과 밝음을 드러내는 일을 같이하려 드니 얼마나 어려운가요.” △“불교가 국민·불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며 “‘중도’(中道)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들이 속한 가족·국가·세계가 변할 수 있다.”라 하셨다.
원로대종사님의 법문과 주장이시기에 대중은 신뢰를 할 것이 당연하며, 필자 역시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님의 법문을 온전히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현실에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의견을 피력한다.
스님께서는 “‘나’라는 착각이 바로 어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밝은 면을 밝히다 보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라고 하셨다. 앞 문장은 이해가 되나 연결된 뒷 문장은 그 연결도 그러하거니와, 법문의 내용이 현 종단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에 법문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고 여래의 가르침에도 부합되지 않는다고 본다.
‘나’라는 착각이 바로 어둠을 만들어 냈다면, 그 ‘나’라는 어둠의 원인을 깨야만 온전한 밝음이 오는 것이다. 밝은 면을 밝혀서 사라지는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고 어둠의 근원은 그 밝음 속에서 살아 꿈틀거린다. 어둠의 지적을 받았으면 가르침으로 수용해서 스스로 밝아져라 해야 옳다.
그 동안 종단의 정치승들이 ‘나’와 ‘나’의 연장선인 ‘문중’, ‘계파’, ‘기득권’이라는 착각과 ‘치암’으로 인해 조계종이 현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나라는 착각’과 그 연장선의 모든 것들을 깨야만 종단이 밝아진다는 지적이 필요한 때다.
스님이 말씀하신 ‘나(我)라는 착각’이 의미하는 것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으로, 곧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고 이기영 박사의 금강경 해제 산스크리트어 원문 해석 38쪽에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하여, “수보리여, 만약에 구도자가 ‘살아있는 것들이란 생각’을 일으킨다고 하면, 이미 그는 구도자라고는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누구든지, ‘자아(自我)라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살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나, ‘개체(個體)라고 하는 생각’이나, 개인이라고 하는 생각 등을 일으키거나 하는 사람은 이미 구도자라고는 불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풀어놓고 있다.
인간은 ‘나(我)’를 집착하기에 중생이다. ‘사상’을 단멸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고우 스님은 ‘나’를 부정해야 한다고 하시고는 별안간 “밝은 면을 밝히다 보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라고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인간사에 무엇이 밝은 면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밝은 것은 ‘사상을 여의는 것’이며, 인간사에 밝은 면은 ‘사상을 여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삶을 사는 세상풍토’를 의미함일 게다.
상을 여의고 조건 없이 베푸는 삶을 사는 구도자, 즉 보살이 한량없이 많이 출현하여 자비가 넘치는 세상은 이미 ‘어둡거나 밝음도 여읜’ 세계, 균형과 조화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중도(中道)란 바로 이것을 말함이라 사료되며, 현재 그러한 세계에 사는 분들도 허다하다.
지혜의 가르침은 밝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이나 사회적 차원에서 “구제”라고 하는 것은, 번뇌를 절단하고 탐심을 다스리며 사회악을 제거함으로써 오염된 세상, 곧 개인이나 사회의 ‘어느 덧 생겨난 무명’과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계기’를 스스로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혹된 세계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흔히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말한다. 그 12의 지분(支分)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다. 하나의 원으로 형상화한 이미지로 12연기를 이해하지만, 결국 ‘무명의 멸’에서부터 출발하여 ‘늙고 죽는 근심 슬픔의 고뇌가 없어짐’을 말한다.
“사회·정치적으로 상대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싸우는 풍토를 탈피해 밝은 면으로 모두를 치유해야 한다.”라 하신 바는, 자칫 사회의 어두운 면 즉 악(惡)이나 범죄(犯罪)를 처벌하고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행함으로써 사회에 정의를 세우는 일을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로 간주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우려마저 든다. 물론 의도하신 바는 그것이 아닐 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것을 없애 밝음을 드러내려 하지만 어두운 것을 없애는 일과 밝음을 드러내는 일을 같이하려 드니 얼마나 어려운가요.”라고 하셨는데, 세상을 밝게 하려면 “물든 생각과 잘못된 제도부터 제거하라”고 일러주셨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 제아무리 어려워도 말이다.
지혜의 가르침은 어두운 것을 깨닫고 없애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밝음을 드러내는 것은 그 뒤에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개인이나 세상의 어두운 것을 속속들이 찾아서 제거하는 것이 ‘정화(淨化. 비속한 상태를 신성한 상태로 바꾸는 일)’로서 조계종단이 할 일이다.
인류역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으며, 누구든 자신의 처지와 입맛에 따라 오욕의 역사를 멀리하고 영광의 역사만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얼마든지 합리화와 미화가 가능하다. 개인이나 사회나 어두운 면을 스스로 드러내 참회하게 하고 지혜의 등불을 밝혀주는 것이 불교의 방편이다. 어두운 곳을 보지 못하거나 부정하지 않고서는 밝음은 요원하다.
스님의 주장은 자칫 오늘날 조계종의 역사적 근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명분으로 오용될 수도 있다. 창종 50년사의 출발은 비구의 입장에서 아내와 자식을 둔 일제불교의 어두운 부분을 털어내는 작업, 다시 말해 “정화”하는 작업으로부터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보자. 일제강점의 역사를 일본은 아직까지도 합리화한다. 군부 독재시절도 그 시절에 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으로 지나온 행적들을 미화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5공 시절에 물가를 잡은 치적으로 그 오욕의 역사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며, 일제가 수탈의 목적으로 가설한 철도와 산업시설로 인해 위안부 등 치욕의 역사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온전한 참회도 어렵다.
어두운 역사를 지적하기에 그나마 반성하고,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의 지적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싸우는 풍토”라 한다면, 입과 귀와 언로를 막음이며, 현상계의 질서유지에 혼란이 예상된다.
종단은 현재 일대 쇄신(刷新. 나쁜 폐단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함)의 기로에 서 있다. 불교는 포살(布薩)과 자자(自恣)의 종교다. 허물과 어두운 것을 버리는 것이 우선인데 이를 들춰내지 말라면 그야말로 허물을 향내 나는 천으로 덮으라는 것과 같다. 선지식이란 지혜의 검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의 어두운 곳을 깨는 분이 아니시던가?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들 혀서 그냥 밥망덥고 이슈
사실은 유 지가 행자는 컨녕 사미계 안유 비구계 90년도에 받은일
읍는디 을마전에 비계세로 받고총무원에 돈좀 쬐끔 아주쬐금 2억정도 박에
언주니께 비구계 거저주대여 그냥 팍퍽 쓰지뭐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