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대로 결정돼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더구나 지난여름 도로명주소의 폐해를 지적하고 즉각 폐기를 강력히 주장하던 그 열기는 어디가고 불교계도, 시민단체도 그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간간히 ‘지금에 와서 도로명주소가 별 실효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이 사업에 투입된 예산이 수천 억 원이라서 정부가 이를 폐기할 수 없다고 한다’거나 ‘불교계가 템플스테이 등, 정부지원 예산 때문에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등의 얘기만 들려온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 전국에 현존하는 불교지명은 어지간한 불교용어가 모두 있을 만큼 그 종류만도 5백여 가지를 훨씬 넘는다.
그리고 이들은 적게는 백여 년부터 많게는 천 년이 넘게 지역의 이름이자 문화와 전통을 상징하는 징표로 역사와 함께 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도로명주소의 시행과 함께 미륵과 아미타불을 뜻하는 서울 강북구의 미아(彌阿), 도선대사의 전설을 간직한 성동구의 도선(道詵)이란 법정지명이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큰절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대전과 음성, 정읍의 대사(大寺), 큰부처를 말하는 진안과 무주의 대불(大佛), 원효대사가 큰 깨우침을 얻었다는 포항의 대각(大覺), 절 이름이 지명이 된 광명의 노온사(老溫寺), 고양의 대자(大慈), 양양의 서림(西林), 춘천의 청평(淸平), 김해의 감로(甘露) 등과 같은 리동의 이름 백여 곳이, 그 지역에 있는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의 이름도 차지하지 못하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를 보면서 종교편향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의 주도면밀한 작품으로 생각했다. 이를 시행한 이 정권은 마치 2000년 5월에 이슬람을 모독하는 유산이라고 인류문화재인 바미안 석불을 로켓포로 파괴한 탈레반 정권과 다름이 없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천 년을 써온 이름을 송두리째 없앨 계획을 했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모한 짓을 보면서 왜 침묵하고 있는가? 지난해 여름 도로명주소법의 폐기를 주장하며 난리를 쳤는데, 왜 지금은 아무 말을 않고 있는가? 더구나 총선과 대선이란 절묘한 기회를 두고도 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아니 된다. 정말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도로명에 묻고 말 것인가?
아직 새 주소와 구 주소를 같이 쓰는 기간이라서 지명이 없어진 것이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새주소만 써야 하는 내후년부터는 국민들의 혼선도 혼선이지만, 천년을 넘게 써온 땅이름을 잃은 상실감이 너무 클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막아야 한다.
/ 박호석(전, 농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