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에서 종단적으로 한글의례를 진행하기로 하고 우선 반야심경을 한글로 풀어 지난5일 공포하고 11일 부처님께 봉정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제대로 살피지 못해 의미를 살리지 못하기는 했으나 살펴보면 의례는 좋은 수행이요, 문화이며 좋은 정신을 높이는데 이롭게 쓰인다. 다른 종교의 보기를 들 것도 없이 법문을 듣고 무릎을 치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보다 자기 가족을 위해 생일불공을 해주고, 천도재를 지내주었을 때 무척 고맙고 감동적이라는 이야기들을 한다.
한편으로 법을 설하는 설법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교화의 대상자들이 느끼는 감정인데 어찌하겠는가? 하물며 목사님이 당신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나에게 염불을 부탁해서 정성스레 염불해드리고 고마움의 인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범불교적으로 쓰이고 있는 아침저녁 예불만 혼선을 피하기 위해 빼고는 거의 모든 의례를 한글의례로 바꾸어서 신도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한글의례는 스님이 대신 집행해주는 한문투의 의식이라서 제례, 교화의식이라고 규정해 본다. 그 보다는 스스로 진행하는 한글의식은 진행자 스스로 그 뜻을 알고 의미를 파악하면서 진행하므로 수행의식에 가깝다고 의례의 성격을 규정한 바 있다.
그리고 생일, 성년, 화혼, 회갑 등 평생의례는 물론이고 나아가 수시, 염습, 조문, 천도 등 왕생의례까지 전 과정을 우리글 ,우리말로 진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 발간한 한글법요집은 그러한 노력의 한 가지이다. 또 어느 불교잡지에 몇 년간 연재했던 불자가례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자가례는 신도의 입장에 더 다가간 것이기도 하다. 그런 처지에서 반야심경을 한글로 독송하겠다고 하는 것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한자나 인도어로 되어 있는 의식을 따라하지도 못하고 몇 시간씩 듣기만 하자니 괴로워하면서도 한글로 하는 것은 어쩐지 싱거운 느낌이 든다고 우리말화 하는 노력에 완전히 수긍하며 따라오는 경우가 드문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으나 한글로 표기할 때 뜻을 잘 살린 멋스런 언어를 고를 줄 아는 안목이 부족한데다 의의를 제대로 알고 실력 있는 이가 원력과 애정을 가지고진행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로 하려는 그 시도에 힘찬 박수를 보낸다.
고 익진 교수 등 몇 분들과 불광법회의 광덕 스님, 대한불교진흥원이나 군종교구 등이 한글반야심경이나 한글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법요집을 편찬하거나 그에 따라 한글의식을 집전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화 한 경전이나 의식의 내용은 번역어의 선택도 문제이지만 운율을 살리기 어렵게 늘어진 글들도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글법요집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나라의 국어정책의 문제이다. 일제시대에도 그랬고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에서 긴 시간동안 서양의 교육을 받고 문화적 인식이 부족한 이들이 국어정책을 주무르면서 우리말에 있었던 성조(聲調)를 무시하는 바람에 우리말과 글에 본디 있었던 맛과 멋을 제대로 살릴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국어정책의 탓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혹은 태국이나 미얀마, 스리랑카의 스님들이나 신도들 모두가 내용만 보고 알면 같은 음조로 염불을 따라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스님마다 다르고 신도들은 아예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국가의 국어정책이 잘못되어왔는데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글 우리말로 해야 우리의 의식이 하나 되고 좋아지고 높아지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것이다. 더더욱 모든 의례를 한글로 하도록 하고 새내기 스님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조계종단의 방침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비록 이웃 종단 소속의 수행자이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거들고자 한다. 함께 고민하고 좋은 해법을 찾아서 바람직한 불교의례의 진행과 불자들을 바로 알게 하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첫째, 제목은 한자어를 음사한 그대로를 읽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대로 읽는 것도 통일성이 있어서 괜찮다. 하지만 내용은 풀어서 뜻을 짐작하도록 해 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내용의 바탕에 관한 것이다. 지혜를 개발해 존재의 일반적 성질인 달라지고(無常),괴롭고(苦),내가 아님(無我)을 체득해 고통과 액난을 없애고 참행복(니르바나) 그리고 그것의 지속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와 반야심경의 바탕이다. 그래서 원문에는 ‘度一切苦厄...고통과 액난을 다 건넜다(극복했다)’인데 조계종본에는 ‘..건지느니라’고 하여 마치 관세음보살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액난을 건진 것처럼 이해하게 하여 본디의 특성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하게 생각된다.
셋째, 존재의 일반적 성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인 연(緣)해서 생긴 것(起)들의 성질(性)이 고정되지 않음(空)을 어찌 나타내는가의 문제이다. 공(空)은 물(物)처럼 존재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성질이다. 그래서 같은 값으로 표기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즉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라는 표현은 현장대사가 한자로 그리 표현했다 할지라도 우리글에서는 ‘물질의 성질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지 물질과 공이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이해라 할 수 없다.
넷째, 이왕 한글로 하기로 하였으면 몇 개는 한글로 하고 몇 개는 한자나 인도어로 하지 말고 다 한글로 바꾸는 것은 어떤가? 이번에 공표한 반야심경은 느낌상으로 보면 오히려 한자 경전으로 되돌아 간 듯한 느낌까지 준다. 왜냐하면 그동안 앞에서 말한 이들이 많은 부분을 풀어썼는데 이번에는 고집멸도 등 자세히 알게 해야 할 대목에서 그냥 한자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한 우리말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오히려 혼란만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리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두면 우리의 이해는 언제까지나 부족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현교와 밀교가 만나는 부분은 묘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통섭도 있으므로 마지막의 반야바라밀다주는 원어로 하더라도 국적불명의 발음인 ‘아제아제...’대신에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스와하’로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중국이나 일본, 남방불교권과도 통하는 발음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말로 진언도 바꿔야 온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병행하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여섯째, 모든 법회에 아무런 반성 없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은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날 법회의 성격과 목적에 맞는 경전의 전부나 일부를 읽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나는 법회의 성격에 맞는 경전을 골라서 독송한다. 보기를 든다면 쾌유기원을 할 때에는 약사경을 읽고, 봉사활동을 격려할 때는 육바라밀을 설한 경문을 함께하고, 영가를 위한 법회를 할 때는 아미타경이나 부모은중경이나 빨리 경전에서도 담장밖경을 독송하거나 한다. 이렇게 법회의 성격에 맞는 경전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불공마다 천수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필자가 옮긴 반야심경을 소개한다. 아직 여러모로 익지 않은 표현이 스스로도 걸리므로 보다 나은 표현을 찾아내는 노력을 더 할 것이다.
/ 법현 스님,열린선원 원장,태고종 전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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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이 문법상 그리 어긋나지 않는다 해도 받아들이기에 마음에 다가오지 못하며 일정한 벽이 있다.
결국 한글화는 이해를 용이하게 하자는 것인데 오히려 주어 목적어 대상, 자타력 등 혼잡스럽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문학회에 전화 상담 한바 예스러운 표현 등 가능하다고는 하나 어딘지 부족하고 부자연스러운 문장이다.
한글화를 행할 시 국어국문학자, 문법전문가, 불교시인 등 다양한 인사를 참여 시켜서 걸작을 내 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