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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82
 설봉
 2018-10-06 20:02:58  |   조회: 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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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금강경 오해 82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26-3. 불언: “須菩提! 若以三十二相觀如來者, 轉輪聖王則是如來.”
26-3.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수보리야! 만약 네 말대로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곧 여래라고 해야 될 것인가?”
[강해] 나의 번역은 羅什말 그대로의 직역은 아니지만, 그 내면의 흐름을 표출시킨 의역이다. “轉輪聖王”이란 ····· 그 뜻은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바퀴라는 것은 인도 고대의 성왕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를 상징화한 것으로, 적진에 자유자재로 굴러다니면서 적을 분쇄하는 무기인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을 이렇게 우리의 무명을 쳐부수는 바퀴로 상징한데서 생겨난 말인 것이다. ·····. 전통적으로 이 “三十二相”의 관념은 오직 붓다에게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이 전륜성왕 또한 三十二相을 구비하여 태어나며, 즉위할 때, 하늘로부터 이 輪寶를 感得하여 그것을 굴려 전인도를 정복하게 된다는 메시아적 전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대답은 바로 이러한 三十二相을 구비했다고 하는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들 과연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냐고 비꼰 것이다.
수보리의 말대로 여래를 相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상을 구비한 자로 여겨지는 전륜성왕이야말로 곧 여래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 붓다의 어조속에는 종교가 결단코 정치에 아부할 수 없다는 날카로운 새카즘이 숨어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많은 자들이 “호국불교‘라고 말한다. ·····. 그것은 역사적 상황에서 그렇게 형선된 것일 뿐 그러한 역사적 상황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종교는 나라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 불교는 호국불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호국기독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오로지 불법과 하나님의 진리를 이 땅에 실현할 뿐인 것이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라 한 들, 그를 여래로 볼 수 있겠는가?

--- 전륜성왕이란 말의 뜻은 도올이 말한 대로다. 이 뜻으로 석가여래가 깨달은 뜻, 곧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서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은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로써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중도·여래·열반의 보리살타라는 이 뜻을 비유하여 설명한 것이다.
보리살타와 여래의 관계는 전륜의 바퀴에 비유할 수 있다. 바퀴의 축은 바퀴 전체를 굴리는 대승의 보리살타며, 축에 의해서 구르는 바퀴는 소승의 보리살타로써 여래이다. 또 바퀴는 바퀴살 전체로 지탱되어 구르는 대승의 보라살타며, 바퀴살은 바퀴를 지탱하여 구르는 소승의 보리살타인 여래이다. 이 바퀴축과 바퀴와 바퀴살이 온통 대·소승적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도이듯, 이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모든 성품의 삶, 곧 중중무진의 시·공간인 삼세는 이 바퀴법도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전륜의 바퀴가 적진을 넘어 삼천대천세계를 종횡무진 내달리며 이 삼천대천세계를 삼천대천세계로 살게 하는 성스러운 왕으로써의 법인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수보리는 물론 뭔 전륜성왕뿐만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은 32상으로 작동하는 작동성으로써 보리살타의 여래이다. 32상은 삼천의 삼세인 과거 현재 미래의 3세계가 총체적 작동성으로 거듭(2로 표상) 작동하는 중중무진의 작동성인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므로, 이를 전륜성왕에 비유하여 보리살타의 여래법을 이 분절은 설명하는 것이다. 결코 정치적 성왕으로써의 전륜성왕 같은 이를 비꼬는 말이 아니다.

26-3. 세존불이 말한다. “수보리야, 수보리가 32상으로 드러난 지혜의 보리인 여래이다. 이 32상의 수보리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전륜성왕으로써의 법칙인 이 보리살타의 여래인 것이다.”

32상으로써의 삼천대천세계가 총체적 작동성으로 거듭 작동하는 수보리도 보리살타의 여래며, 수보리를 이루는 수보리의 32상 역시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이 수보리와 같은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온통 총체적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로써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32상은 석가여래나 전륜성왕 같은 어떤 특출난 사람이나 하늘로부터 感得할 수 있는 보물이 아니다. 32는 전에 우리가 흔히 산모와 신생아를 보호하는 기간을 일러 삼칠일(37)이라고 하듯, 사람이 이 수로 어떤 관념을 표상한 것이다. 도올처럼 이 32를 정치적 권력과 연관된 메시아적 전설로 관념한 대도, 이 관념은 마땅히 여래로써의 사람이 그럴 수 있기는 한 것이지만, 석가여래가 이 32라는 수를 거론한 까닭은 평범한 이들과 다른 이 뭔 32상을 운명적으로 구비한 정치지도자라 할지라도, 이를 여래로 볼 수 없다고, 그런 이나, 또 그렇게 알고 있는 이를 비꼰말이 아니다. 도올이 자신의 ‘번역은 羅什말 그대로의 직역은 아니지만, 그 내면의 흐름을 표출시킨 의역’이라면, 이 32라는 말을 쓴 석가여래의 ‘내면의 흐름을 표출’시켜야지, 자신이 아는 생각의 내면이나 표출해서야 석가여래의 깨달음인 32의 相으로 표상한 진리의 진실이라는 법을 바르게 말하는 건 고사하고, 이를 바르게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를 석가여래의 새카이즘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올이 얼마나 정치적 색깔이 진한 사람인지를 노출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특정 집단이나 이념적 정치성에 치우쳐선 안 된다. 선악조차에도 치우쳐 사로잡혀 종교를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항차 집단이나 이념이겠는가? 그렇다고 뭔 중립일 것이 어디 있단다고 중립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 32상인 ‘오로지 불법과 하나님의 진리’로 37일이 지나면, 이 32상을 스스로 의지할 수 있으니, 이 32상을 스스로 의지하는 삶이어야 한다.
삼천대천세계가 총체적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거듭 작동하는 중중무진의 32상으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이라는 이 법은 이미 정해져 있어, 이를 인간이 인간의 땅에서 실천해야할 실재의 실체랄 불법이며 하나님의 진리로 서있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은 ‘아무리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아무리 허접한 사람은 물론, 이런 모든 사람들의 육근이며 오온에 비쳐지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 32상법인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인 것이다.
석가여래나 예수는 물론 이 금강경도 오로지 이 32상법을 바르게 알라는 것이지, 이를 실천하고 않고는 오직 우리 사람의 절대자유의지로써의 삶인 것이다.

도올은 이렇게 말한다.
26-4. 須菩提白佛言: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不應以三十二相觀如來.”
26-4.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제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의 뜻을 깨달아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알겠나이다.”

26-5. 爾時, 世尊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26-5. 이 때에, 세존께서는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시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강해] 대화의 다이내미즘이 살아있고, 또 마지막 끝마무리도 아름다운 게송으로 재치있게 표현되고 있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어느 성당에 마리아상이 피흘린다고 쫓아가고, 어느 절깐에 부처님상이 땀흘린다고 달려가는 추태를 생각할 때, 이 금강경의 지혜는 그 얼마나 많은 인류사의 종교미신을 단절시킬 수 있는 신령스런 말씀으로 가득 차있는가?

--- 아니 이 금강경이 나온 지가 몇 달이 된 것인가? 2~3년이 된 것인가? 이미 수천 년이 지났는데, 설령 이 지구상의 어떤 특정지역에서만 이 금강경이 유통되었단다고 해도, 그 지역에 종교미신이랄 것이 없었단 말인가? 오히려 이 금강경의 정신이 탄생한 지역에서조차 이 금강이 사라져 숨어 버렸잖은가.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은 설령 뭔 미신이란 대도, 이를 단절시킬 수 있는 신령스런 말씀이 아니다. 오직 미신이란 대도, 이 미신이 진리의 진실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설령 내가 32상으로써의 연기의 실상이 아니라고 믿는 대도,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진리의 진실이 아니라고 믿는 대도, 오직 이것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바르게 알아보란 것이다.

26-4. 수보리 보살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보리살타의 내가 세존이 말씀하신 바의 뜻·義이므로 32상으로 볼 수 없는 여래란 대도 부처임을 알겠습니다.”

상대적 인식인 有我도 非有我도, 凡夫도 非凡夫도 보리살타의 여래임과 같이 32상의 인연·인과가 총체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것이 나란 대도, 아니란 대도, 오직 일체 이 모든 것이 연기의 실상으로써 진리의 진실인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안 앎의 생각을 수보리가 말하는 것이다. 석가여래의 몸만 여래가 아니라 몸을 구성하는 모든 형상·비형상으로써의 형상인 몸은 온통 총체적 인연·인과의 논리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로써 보리살타의 여래라는 법이다. 비형상인 생각이라도 이미 이 비형상이라는 이 생각으로서 형상의 몸이다. 형상으로써의 나도, 소리로써의 나도, 삼세의 대통역사선상에 우뚝 선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인 진리의 진실이다.

26-5. 이때 세존은 노래를 지어 말했다. “지혜의 보리는 형상으로 본 나이며,/ 소리로 구한 나이다./ 이런 사람의 행은 사람 삶일 뿐인 사도이니/ 여래의 법을 바르게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32상을 사람의 32기관의 형상으로만 보아서는 이 기관작동의 이 사람이 온통 인연·인과의 대·소승적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여래로써 연기의 실상이며 진리의 진실임을 바르게 알아볼 수 있는 길과는 다른 삿된 길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여기 3연 是人行邪道란 구절을 바르게 살펴야 한다. 1·2연의 육근작동인 나를 부정하는 반전의 邪道가 아니라, 이런 육근작동으로 사는 것이 사람만의 삶을 사는 사도인데, 이런 사람 삶에만 사로잡혀 살아서는 이 사로잡힌 사람 삶으로써의 사도가 여래라는 법임을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육근 각각의 작동성으로 작동하는 내가 32상의 전륜성왕으로써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바르게 아는 진리인식의 깨달음을 석가여래는 노래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인 이 모든 성품들의 삶은 삼세의 대통역사로써 보리살타의 여래인 부처 앞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이를 표상하여 희망하는 것이며, 표상으로서의 마리아상이나 불상으로써의 희망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종교미신을 단절시키려 하는 이는 이미 자신이 종교미신에 사로잡혀 작동하고 있는 중도로써 보리살타의 여래임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음성이나 형상으로써의 我인 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실재하는 실체랄 것으로 구하는 건, 구태여 불교의 이 금강경이 선 까닭과 다른 사도이므로, 이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法身非相으로서의 我가 보리살타의 여래법임을 바르게 알아볼 수 없음을 이 分은 설명하는 것이다.
2018-10-06 20: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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