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마음을 깨달아 '영원한 편안의 세계‘에 이르는 종교다. 물질이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자도 영원한 만족과는 거리가 멀다. 계급적 출세는 더더욱 아니며 만족을 못주기에 ’중 벼슬 닭 벼슬만도 못 한 것‘이라 했다.
부처님도 중생을 깨닫게 하는 방편일진데 하물며 승려는...
마음은 다 없고, 다 있기에 늘 부족함이 없이 ‘항상’하다. 해서 금강경 마지막에 석가는 ‘현상계(現象界)라는 것은 별이나, 눈앞의 그림자나, 등불이나, 혹은 환상이나, 이슬이나, 물거품이나, 꿈이나, 번개나, 구름과 같이 여기는 것이 옳다.’라 한 것이다.
지지고 볶는 이세상의 모든 것은 태양이 뜨면 안 보이는 밤하늘의 별이나 백주가 되면 소용없는 등불, 피곤할시 보이는 헛것인 환상, 털면 없어지는 이슬, 흘러가 버리면 없어지는 물거품, 자고나면 허망한 꿈, 어쩌다 여름에 한번 치는 번개와 구름과 같다 한 것이다. 왜? 이것이 현실이며 사실이니까?
그런데 수행한다는 스님들 그것도 고위급들이 직위나 직책의 상(相)을 내는 분이 있다면 인간본능의 힘을 과시하려는 태도이며, 조선불교를 억압한 주자학적 논리, 반상의 철학에 근거했다는 보아야 한다. 하여 ‘도’가 마음을 비운 자에게는 쉽고, 욕심이 많은 자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뿐이랴 수행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수행하니 대접해라 할 것도 못된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불교는 승려와 재가자의 관계가 서구의 모 종교와 같이 통제하는 자. 통제 받는 자로 주종 구분되어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속히 고쳐야 한다. 바로잡아야만 불교다운 불교며 조계종다운 조계종이다. 그러면 승속이 다 같이 무질서하게 될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답은 차별성과 분별상 그리고 평등성과 평등상이 동시에 존재하도록 하면 된다. 이것이 현상계의 방편이다. 출가자는 구도자라는 그 자체의 상을 여의어서 재가자나 타인을 스승이상 대하고, 재가자는 ‘너희 승려면 별거냐 하는 아만의 상을 버리고 심연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존경심으로 대하면’ 된다.
한국불교는 승려의 가치관과 자세를 근본에서 다시 가르쳐야 한다.
천도제 설사 ‘신령스런 존재가 어딘가 존재’하며, 우주인으로서 귀신이상의 능력의 존재’가 있다 해도 역시 ‘성주괴공과 윤회’를 못 벗어나는 그야말로 부처님 손박닥안의 중생 들이다.
부진님 너무 좋은말씀에 감사 합니다.
직접 뵙기는 힘들것 같고 혹시 부진님 인터넷 끼페나 불로그가 잇를까요,,
연락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