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먹이사슬’로 돌아가려 하는가
왜 다시 ‘먹이사슬’로 돌아가려 하는가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10.01.21 17:3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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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이유,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먹이사슬’로부터의 해방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근저에는 이성이 있겠지요. 더 근저에는 종교적 입장에 선다면, 신의 뜻이 있을 거구요.

먹이사슬은 생태계 내의 종(種)간의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런 먹이사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호랑이보다도 힘이 없고, 코끼리보다도 작고, 독사보다도 독이 없고, 말보다도 느리고, 물고기보다도 헤엄치지 못하고, 새보다도 날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을까요. 먹이사슬로부터의 독립, 약육강식으로부터의 독립 덕분이었을 겁니다.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이 약육강식이겠지요. 신분, 권력, 돈, 폭력, 학벌, 지역, 종교, 배경,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인간의 창의성은 발현될 수 있고, 한없이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요즘 다시 그런 세상이 점점 도래하지 않나 묵시론적 두려움에 떨릴 때가 있습니다.

재벌이 대기업 수준을 넘어 지나친 경우들이 있습니다. 대형슈퍼마켓이 동네 구멍가게를 허물어뜨립니다. 자본과 시장의 질서라고 설명하기에는 왠지 변명 같아 보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 후손들이 밥장사를 하고, 커피장사를 하고, 면세품 장사를 하고, 인터넷 쇼핑 장사를 합니다. 하청, 재하청의 구조는 협력관계를 넘어 극단적으로 종속시키고 때로는 독점의 힘으로 시장에서 힘이 약한 자의 지위를 쉽게 넘어뜨립니다. 중소기업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수파, 소수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기술, 나와 다른 재능,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폭력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수결이 곧 만사라는 생각이고, 지배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다수당, 다수결이면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마음껏 재단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싹쓸이로 이어집니다. 엽관주의로 이어집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고 오만해집니다. 일자리조차도 소비자인 시민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납세자인 국민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만들고 정부가 만든다고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울해집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여가에 있습니다. 여유와 휴가에 있습니다. 기호와 취미에 있습니다. 휴식에 있습니다.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이 아니라, 밥 먹으면서 즐길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밥 먹는 것의 의미를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배고프면 사냥에 나서는 맹수와는 다릅니다.

OECD가 지난해 발표한 ‘2009년 OECD 통계연보’(Fact Book)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연간 근로시간은 2316시간입니다. OECD 평균(1768시간)보다 1.3배가량 길어 여전히 최장시간 노동입니다. 2위인 헝가리(1천986시간)보다 무려 300시간 이상 많은 압도적 1위입니다. 2006년 기준으로도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은 2354시간으로 1위였습니다.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 2009년 OECD 통계연보(Factbook)
어른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아이들은 사교육에 시달립니다. 제 또래 아이들보다 가장 잠을 조금 자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사교육이 주고, 학교가 종입니다. 아이들은 학원에 가기 위해 학교에 갑니다. 학교는 학원을 위해 존재하는 부속기관입니다. 잠을 가장 적게 자고, 운동을 가장 적게 합니다. 운동을 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예체능도 오로지 대학입시의 수단일뿐입니다. 세상을 즐기는 방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명문대학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그것도 서울대, 연.고대입니다. 이미 신분질서화된지 오래입니다. 20대 자살률이 세계 1위이고, 20~30대 여성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오래전부터입니다.

거북이만이 자기 집을 지고 다닙니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습니다. 오로지 집장만을 위해 평생을 투자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아파트가 필요할까요. 진시황릉처럼 그 아파트를 지고 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내집 마련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수치로 환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수도권은 12 내지 13입니다. 자신의 봉급을 하나도 쓰지 않고 12년을 모았을 때 집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엔 기준의 배를 넘어섰습니다. 어느 누가 자기 봉급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을 수가 있나요. 집을 사기 위해 1/3을 저축한다고 그럽시다. 그러면 12가 세 배가 되어 36이 됩니다. 36년 걸려야 내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명퇴해야 합니다. 집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재테크의 핵심은 이미 부동산 투기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사람테크나 시테크가 아니라 공간테크, 즉 아파트테크가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된지 오래입니다.

대학진학률은 세계 1위인데, 좋은 일자리는 생겨나지 않고, 부모들의 기대는 여전히 화이트칼라에 있고, 그런데 대학 납부금은 거의 연간 1000만원 수준이고, 나와서 갚을 희망은 없고, 수도권에 집 사서 결혼해야 하고, 집을 살려면 30년이 넘게 걸리고, 이런 세상에서 어떤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사회입니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은 게 아니라, 남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희망으로 아이를 낳자고 얘기할 수 있고, 어떤 비전으로 결혼해서 잘 살아보자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들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지 잘 압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인본주의적 전통을 포기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돈이라는 현실적 선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입니다. 인간다운 삶보다는 돈 되는 삶, 돈 되는 일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되냐 안 되냐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정신보다는 물질이고, 영혼보다는 돈입니다.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물적 가치를 신뢰합니다. 인본주의적 전통은 사라지고 맙니다.

뻔한 소리입니다만, 2010년 한 해 이런 부분에 대한 막걸리 한 잔 토론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인생입니까. 어떻게 살다가야 할 인생인데요.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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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2010-02-21 15:43:11
갸우뚱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모두들 암묵적으로 종교의 기준을 개독교에 두고 있으니 신의 뜻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을 겁니다. 종교의 기준을 개독교에 두면 불교가 종교냐 아니냐하는 말까지 나오는 겁니다. 종교의 기준을 유교라든지 다른 종교로 바꾸면 어떨까요...

우타 2010-01-25 00:01:32
좋은 글입니다. 답답한 한국 현실입니다.

갸우뚱 2010-01-22 02:10:24
이 분은 불자가 아니었군요.
굳이 배척할 생각은 없지만 불교매체 칼럼에 신의 뜻을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무신론자의 관성화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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