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대사는 떠돌이 승려였습니다. 한 때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신라조정으로부터 높은 벼슬을 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치고 평생을 거지 행색으로 전국의 장바닥을 떠돌았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터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원효 대사가 장터를 떠돌며 설법을 하신 까닭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스님을 서라벌 사람들은 ‘각설이(覺說-이)’라고 불렀습니다. 깨달은 이, 혹은 깨달음의 말씀을 전하는 이라는 뜻이었던 겁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는 동냥아치를 이르는 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신라는 귀족들이 대를 이어가며 지방을 분리 통치하던 귀족사회였습니다. 원효 스님 당시의 신라는 기강이 문란했습니다. 귀족들은 방탕하여 사치를 즐겼고 자기들의 뱃속을 채우느라 백성들을 마구 수탈했습니다. 그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민초들은 하나 둘 고향을 떴고 서라벌 거리는 동냥아치로 넘쳐났습니다.
그 수가 많다보니 동냥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타령이나 재담을 팔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앞을 다퉈가며 원효 대사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스님이 나타나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니 그들에게는 더없는 대박장소였던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언제부터인가 ‘각설이패’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각설이 스님을 쫒아 다니는 패거리라는 뜻입니다.
이런 스님이 어느 귀족의 회갑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누더기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문지기가 가로막았습니다.
“이 거지야! 여기가 어디라고 기웃대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문전박대를 당한 스님이 껄껄 웃고 돌아와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문지기가 스님을 알아보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연회석으로 안내했습니다.
잔치 상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한 산해진미가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음식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그 집 주인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여 까닭을 물었습니다.
"대사님, 왜 음식을 안 드십니까?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스님은 마지못해 수저를 집어 들었으나 음식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옷에다 붓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로 그랬거니 생각하고 키득거리던 사람들이 한참을 지켜보다가 계속되는 행동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습니다.
"스님, 왜 음식을 옷에 부으십니까?"
그러자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음식들은 나를 보고 준 것이 아니라 내 옷을 보고 준 것입니다. 그러니 옷에다 붓는 것이 당연하지요."
원효대사의 이러한 행동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없는 사람을 먼저 배려하라’는 꾸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가 사람이 사는 사회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사회가 사람이 꾸려가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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