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희 의원, 정태근 의원의 ‘DJ 어록’ 인용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인 진수희 의원이 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세종시 문제에 대해 발언하던 중,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인용했다.
진 의원은 세종시 수정을 추진하는 모두에게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았다며 “김 전 대통령은 옥중서신에서 수도란 국토방위의 최전선에서 국민을 안심시키고 보호해야 하는 곳이고, 그래서 행정기관 이전은 절대 안된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취지는 이해하나, 명백한 왜곡이다. 인용조차도 틀렸다.
그런데 이런 식의 'DJ 어록‘ 갖다 붙이기는 처음이 아니라서 문제다.
지난 해 11월 5일 정기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이 있었다. 그때 이미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성북 갑)이 진 의원과 똑같이, 똑같은 자료와 똑같은 논리로, 똑같은 왜곡으로 발언했다. 그런데 정확히 두 달 뒤, 고의를 숨길 수 없는 왜곡이 되풀이됐다.
DJ의 ‘수도’에 대한 서신이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은
한나라당이 왜곡한 옥중서신을 썼을 당시인 1977년 11월 2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때 진주교도소는 서울에서 가장 먼 교도소였다.(이희호 자서전 <동행>, 170면)” 그래서 가족들은 진주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나서 다음날 첫 면회를 해야했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9호가 발령됐다. 배경에는 월남의 패망이 있었다.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지됐다. 긴급조치9호는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제정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9호의 올가미(이정석)”가 씌워졌다. ‘3.1 민주구국선언’이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 첫 면회는 54일만에야 허용됐다. 76년 5월 1일 1심에서 징역10년을 받았다. 상고심에서 징역5년을 받았다. 그해 4월 14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같은 해 6월 고 박정희 대통령은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법안의 내용은 임시행정수도건설에 선행한 부동산 투기방지와 계획조정 및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의 원활한 추진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문제는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근본취지였다. 유신독재를 강화하기 위한 ‘안보의 정치화’가 숨은 의도였다라는 점이다. 안보 이슈를 통해 독재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 당시 유신정권의 말기적 흐름을 포착해낸 사회적 민주화 운동을 틀어막으려는 극단적 방식이었다. 그래서 법안 제목에도 ‘임시’라는 말이 들어있었다.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의 정치였다.
당연히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은 특유의 방식대로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묵상을 거듭해, 교도소에서 ‘각국 수도에 관한 고찰’이라는 일종의 논문을 썼다. 그리고 그 논문을 옥중서신에 담아 내보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나라당이 박정희의 법안을 흔들어대지 않고 DJ의 옥중서신을 국회 본회의장과 최고위원회의에서 읽어대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왜 박 전 대통령의 정책과 법안과 어록을 선택하지 않고, 이에 반대했던 김 전 대통령의 서신을 선택하고 있는 걸까.
흥미로운 일이다.
아니다, 정치적 자의성의 극단이다. 제멋대로의 극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왜곡의 시작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제대로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지금이라도 긴 편지의 원문을 제대로 읽기를 희망한다. 당시 옥중서신의 문제의식과 취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 요즘 소식을 들으니 정부의 행정기관이 대폭 충청도 지방으로 이전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세계 수도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참으로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 세계 각국의 수도를 고찰해보았다. 영국의 런던, 프랑스의 파리, 독일의 베를린, 인도의 델리, 중국의 북경, 일본의 동경 등을 비교해보니, 지리적 중심지라는 이점이나 국왕의 편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토방위의 전방위에서 싸우고 짓밟히고 되찾고 하는 투쟁 속에서 수도라는 영광과 국민의 사랑을 얻게 되었다.
- 우리나라의 역대 수도를 비교해보니 외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등의 수도를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수도는 국내 행정과 집권자의 안전을 위주로 한 것이었으니, 북에서 강적이 오면 남으로 도망가고 남에서 오면 북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소극적 수호에 치중하고 적극적 개척에 등한하다는 내가 살펴본 역사관의 일면을 본 것 같아 씁쓸한 감을 금할 수 없다.
- 휴전선에서 불과 25km에 있는 수도, 거기서 정부와 국가의 모든 지도적 인물들이 국가방위에 끊임없이 긴장하며 숨쉬고 있을때, 그 남쪽의 국민의 믿음과 협력은 자연히 생겨날 것이다.
- 나도 71년 대통령 선거 때 주장한 바 있지만, 지금의 서울의 인구는 대폭 대전 지방으로 이주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역사는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 감연히 머리를 들이대고 가슴을 펴고서 그 도전을 받아들여 용감하고 슬기로운 응전을 한 자만이 행운과 승리의 신의 축복의 미소를 얻을 자격이 있다.
이쯤되면 대충 이해가 됐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특유의 학습방식으로 역사적 고찰과 국제관계학적 검토를 통해 수도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의도하고자하는 임시행정수도 건설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논박했다. 지역균형발전과 인구 분산이라는 차원에서의, 일종의 신도시 건설이나 부분 이전은 71년 이래 자신의 공약임을 상기시킨 다음, 안보의 정치적 이용이나 국가적 위난을 회피하려는 소극적 태도에서의 수도이전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옥중서신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 한 가지.
이때 김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정독하며 독파했다.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도 진주교도소였다. … 동아시아 역사 책을 볼때는 지리부도를 구해달라고 해 지도를 넣어 주었다. 책과 함께 옆에 펴 놓고 읽으면 아주 좋다며 흡족해 했다.(이희호 <동행> 172면)”
다시 왜곡을 지적한다
한나라당의 왜곡에 대한 첫 번째 반박은 이렇다. 김 전 대통령을 거론하기에 앞서 박정의 전 대통령의 잘못을 지적해달라라는 점이다.
둘째, 친박계인 안홍준 제1사무부총장이 같은 회의에서 한 말이다. “세종시는 엄밀히 말해 수도가 아니고 세종시 원안은 일부 부처만 옮기는 것”이라며 다시 한 번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결정을 거론했다. 인용하는 걸로 충분할 것 같다.
셋째는 제발 원문을 제대로 읽어야 하고 당시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그래야 왜곡이 덜할 것이다. 당장에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결정의 역사(물론 정책의 타당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되, 헌재결정의 적정성 여부에 대해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부분을 가져와 비교하는 방식은 옳지 못하다.
넷째는 헌법이 정하고 있는 지역균형발전과 중앙권력과 지방권력 간의 균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수도권 과밀과 집중에 대한 최소한의 문제의식이 균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결국 역사의식의 문제다
다시 197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보자.
“1978년은 긴급조치9호의 공포에서 벗어나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 이기도 하다.(조갑제, <유고 1>, 한길사, 59면)” 그해 7월 6일 체육관 선거가 있었다.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대의원 2583명 가운데 2578명이 참석해 2577표(무효 1표)를 얻어 99.9%의 득표율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강조하거니와 99.9%였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취임식은 12월 27일에 있었다. “외국의 축하사절로는 만주침략의 중심인물로 전범 A급이었던 전 일본 수상 기시가 이끈 일본인 12명 뿐이었다. … 그만큼 유신체제로 한국은 따돌림 받았고, 한국인 모두는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서중석, 강준만 앞의 책에서 재인용)”
1977년 12월 19일 김 전 대통령은 극비리에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다섯 번째로 대통령에 취임한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정지로 김 전 대통령을 석방했다. 새벽 1시 55분 병원을 떠나 2시 5분에 집으로 돌아왔다. 김 전 대통령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1976년 3월 8일 연행된지 2년 9개월만이었다.
한나라당이 지나치게 역사에 무지한 건 아닌지 간혹 염려스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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