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앙 강찬호 기자의 칼럼, ‘민주당 소신파 의원 3인’
어제 자 중앙일보 칼럼입니다. 민주당 소신파 의원으로 세 사람을 꼽았습니다.
첫째, 3선의 송영길 의원입니다. 최근 출간한 자서전에서 “국보법 폐지 직권 상정을 하지 않은 김원기 의장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던 우리가 야당이 돼서는 ‘직권 상정 반대’를 외치며, 직권 상정을 한 김형오 의장을 비난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을 높이 샀습니다.
둘째, 초선의 비례대표 안규백 의원입니다.
“내년 예산에서 정부가 대통령 전용기 구입비 계상을 포기했는데도 자진해서 예산(착수비 140억원)을 추가”시킨 점을 높이 샀습니다.
셋째, 재선의 조경태 의원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조건부 찬성이 아닌 ‘(전면) 찬성’했다는 것입니다.
정권교체에 따른 입장변화를 꼬집으며 이 세 사람 의원들은 예외적으로 진정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칼럼인 것 같습니다.
2. 정권교체에 따른 여·야의 공수교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강 차장의 칼럼과는 어긋나게 지난 정부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등 직권상정에 반대했습니다. 직권상정 자체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대통령 전용기 구입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았습니다. 공수처 설립에 대해서도 늘 비판적이었습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은 좀 달랐지요. 그런 한나라당이 지금은 입장이 바뀌어 있지요. 그렇다면 피장파장인가요. 그래서 과거 한나라당의 입장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추려내서 ‘한나라당 소신파 의원 몇몇 사람’하는 칼럼을 생산해야 공평한 일이 되는 걸까요.
사실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블로그의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론적으로 한 번 검토해볼 필요를 느낍니다. 몇 가지 한 번 구분을 지어나가 볼까요.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와 언론과 학자들에게 최소한의 구별과 평가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제공했으면 하는 순진한 생각에서입니다.
3. 근본 문제는 여·야 모두 보수정당이라는 점입니다
최장집 선생의 날카로운 비판을 인용합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사실상 차이가 없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경제정책의 기조로, 재벌과 대기업을 성장의 중심동력으로,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는 쪽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히 똑같은 정책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입장이 바뀔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야당의 근본적 사명인 반대를 해야 되겠지요. 그때의 반대는 논리적 반대, 원칙적 반대, 원리적 반대가 아닌,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차이점이라곤 한미동맹에 대한 관점 차이가 약간 있을 것이고,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차이가 상당히 다르다는 수준이겠지요. 물론 지역적 정치기반의 차이가 심대하지요. 결과적으로 정책과 철학과 정강에 바탕을 둔 반대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일관성 자체가 없어 보이는 것이고, 달리 차이점을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정치구조입니다.
4. ‘반대를 위한 반대’의 층위를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의 변화, 정책의 변화, 찬반의 변화는 무조건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몇 단계의 층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개인의 정치철학과 양심의 변화인지 아닌지를 평가해 볼 필요는 있겠지요.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의 양심, 평화국가의 양심, 사형제 폐지 등과 관련된 생명권 존중에 대한 양심, 종교의 자유에 대한 양심,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양심, 학문의 자유에 대한 양심 등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근본적 가치질서와 기본권에 대한 양심이 그대로 유지되는지 아니면 그때 그때 다른지는 좀 더 충실히 평가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와 언론의 집중적 관심이 필요하겠지요.
둘째, 정당의 소신을 좀 더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요. 정강정책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이 부분이 취약하지요. 사실 대한민국은 당론에 대한 강요 수준이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국회법은 당론보다 개인의 양심이 앞선다고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그럼에도 앞선 항목에서의 비판과는 정반대로 각 정당이 분명한 원칙과 소신과 당론과 강령을 가져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역정당의 틀을 벗어던져야만 하지요. 정책정당이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시민이 정책을 강요하고 정책을 구속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이 따르게 되겠지요. 정당 전체의 일반적인 당론변화인지, 혹은 당론의 급작스런 왜곡인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서 정당의 강령을 좀 더 강화시키고 일관된 방향으로 끌어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셋째, 국회라는 입장 또한 존중될 필요가 있겠지요.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민의의 대변과 함께 행정부에 대한 견제와 균형입니다. 삼권분립이 헌법질서의 기본입니다. 국회 스스로 법절차를 준수하고, 국회 스스로 행정부에 대한 견제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지 또한 중대한 기준이 되어야겠지요. 의회주의자의 본분과 정통성을 벗어나거나 왜곡시키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될 이유가 되겠지요. 국회가 정당에 종속되거나, 행정부에 종속되거나, 특정 정파에 종속되거나, 특정 유력 지도자에 종속되는 일은 결국 헌정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넷째, 여·야라는 근본 사명 또한 중대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야당은 영어로 반대를 의미합니다. 반대 정당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중대한 견제가 되고, 그 견제를 통해 여당은 다시 한 번 민심을 살펴보고, 자신들의 정책의 타당성 여부, 절차적 정의 여부를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요. 물론 그런 반대가 의회주의에 충실하고 당의 정강에도 일치되며, 의원 개인의 소신과도 합치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반대는 철저히 매도당해야만 마땅할까요. 소신의 변절, 의회주의의 위반, 당 정강 정책의 무소신의 비판과는 별개로, 반대 그 자체가 갖는 의미를 야당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고 한번쯤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의 근저에도 제가 야당의 당원이라는 속성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가져봅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반대가 갖는 의미를 재평가하고 분석하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5. 결국 근본문제는 정책정당입니다.
정권교체는 여·야의 공수교대가 아니라, 정책의 전면적인 변경이어야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난 정부의 정책 중 현 정부에 의해 그대로 지켜지거나 확대, 강화되고 있는 정책도 상당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한미 FTA와 한미간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입니다.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지요. 자유무역주의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가 지난 정부에 의해 시작되고, 현 정부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종부세 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사회정책적 차이도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네 정책 현실이 암울하다는 의미이겠지요. 그만큼 지난 정부의 정책적 취약성이 상당했다는 역설이 되기도 하겠지요.
야당은 야당대로 지난 정부 시절 야당이었던 현 정부를 두고 입장변화를 비판합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지난 정부 시절 집권 여당이었던 현 야당을 두고 입장변화를 비판합니다. 그래본들 서로 간에 의미 없는 논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장파장일 뿐이고, 또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 그때는 또 다시 현재와 똑같은 논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어찌 보면 블랙코메디고, 어찌 보면 안타가운 일이지요. 그럼에도 위에서 검토해 본 바와 같은 그런 몇 가지 층위에서 소신과 당론과 의회주의와 견제와 균형의 의미와 정책정당의 의미를 차근차근 뜯어보는 것도 그리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낙선 상태에서 여의도를 바라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앙일보> 12월 7일자, 강찬호, '민주당 소신파 의원 3인'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90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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